[스페셜2]
앤, 당신에게 홀려버렸어요
2013-01-24
글 : 이후경 (영화평론가)
<다크 나이트 라이즈> <원데이> <레미제라블>로 훌쩍 도약한 배우 앤 해서웨이
<레미제라블>(2012)

<프린세스 다이어리>의 어수룩했던 소녀는 이제 너무 오래된 이야기가 됐다. 배우로서 앤 해서웨이의 도약은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처음 감지된 바 있지만, 지난해 개봉한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캣우먼, <원데이>의 짝사랑녀, <레미제라블>의 판틴의 3중주가 그녀의 연기를 다시 한 옥타브 올려놓은 느낌이다. 이에 그녀를 위한 기획을 마련했다. 이런 시도에도 그녀에게 우리가 홀려버린 이유가 온전히 설명되지는 않는다. 그럴 때는 글을 덮고, 스크린 위에서 언제나 우아하고 활기로운 그녀의 이미지에 더 오래 빠져 있는 편을 택해도 좋다.

으슥한 뒷골목, 상처입은 눈을 한 어미 고양이 한 마리가 웅크린 채 앉아 울고 있다. 새끼 먹일 식량을 구하러 나섰다가 봉변만 당한 거다. 윤기가 흘렀던 털은 들쭉날쭉 잘려나갔고, 새하얗던 이빨도 두어개쯤 뽑혀나간 몰골이다. 하지만 날카로운 발톱은 아직 남아 있어, 작은 위협에도 반격을 취할 태세.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 위태로운 짐승에게서 눈길을 거두지 못한다. 특히 치명적인 울음소리가 발목을 붙잡는다. 자기 처지에 대한 서러움과 한탄, 세상에 대한 분노와 절망감이 절절히 들어차 있는 그 울음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까지 난도질해놓는다. 급기야 주변을 배회하던 자들까지 덩달아 코를 훌쩍이고 만다.

<I Dreamed a Dream>. <레미제라블>의 주제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곡을 뮤지컬 무대에서 영화 스크린으로 제대로 옮기는 일이 비단 꿈에 불과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앤 해서웨이 덕택이다. 한 마리의 고양이 같은 외모에 고양이 같은 몸놀림으로 은밀하게 접근하다 맹렬하게 달려들 줄 아는 그녀는, 배우란 때때로 불안해서 아름다운 동물이며 그 점이 무대 위의 판틴보다 스크린 속의 판틴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녀의 애달픈 눈빛, 달뜬 호흡, 충동과 절제가 교차하는 몸짓들과 목소리는 작은 떨림으로도 큰 파장을 일으킨다. 이 장면 하나로 그녀가 이 영화의 실질적인 여주인임을 공고히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린세스 다이어리>(2001)
<브로크백 마운틴>(2005)

<브로크백 마운틴>을 통해 ‘공주’에서 배우로

어쩌면 그녀는 여주인공의 운명을 타고났는지도 모른다. 방년 17살에 오디션에서 의자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몸개그’로 단번에 <프린세스 다이어리>의 미아 서모폴리스 역에 캐스팅된 그녀는 장차 유럽의 작은 왕국 제노비아를 이끌어갈 왕녀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하지만 디즈니 동산에서 만들어진 이 영화로 그녀는 ‘스타’가 되었을 뿐 ‘배우’로서는 갈 길이 멀어 보였다. 연이어 출연한 <천국의 맞은편> <니콜라스 니클비>와 같은 가족드라마나 성장코미디에서도 데뷔작만큼 이목을 끌지 못했고, 뉴욕대학교 졸업 즈음 돌아온 <프린세스 다이어리2>와 <엘라 인챈티드>에서도 여전히 공주표 드레스를 벗지 못한 모습이었다. 마약과 섹스에 빠진 십대들의 세계에서 고독에 천착한 <하복>은 일종의 성인식에 해당했으나 혹평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2005년, 그녀는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아직 성장판이 열려 있음을 확인시킨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그녀가 연기한 텍사스 여자도 한 장면으로 승부한다. “달콤해 보일 수도 있지만, 실은 포식자에 더 가깝죠.” 잭 트위스트(제이크 질렌홀)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뭘 기다리느냐”고 묻더니 어느새 그의 아이의 엄마이자 가족 사업의 우두머리 루린 트위스트가 되어 있는 그녀는, 관객을 유인하는 데는 오히려 느긋하다. 그녀만의 포획의 기술은 다른 주조연들이 퇴장했거나 퇴장할 즈음에야 헤드숏 하나로 입증된다. 에니스 델마(히스 레저)가 ‘발신자 사망’ 도장이 찍힌 잭의 엽서를 받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브로크백 마운틴’이 가리키는 바를 알려줄 때다. 절제가 미덕인 장면인데, 오디션에서 “화가 나면서도 미묘한 질투심을 표출시키는 전화 대화 장면의 리딩을 시켰는데 그녀가 인상적이고 정확한 리딩을 해서 매우 놀랐다”는 리안 감독의 평가가 과찬이 아니다. “그 장면 하나로 앞에 내가 나온 장면들을 다시 뒤져보게 만들고 싶었다”는 그녀의 소망도 소망에 머무르지 않는다.

비록 다른 세 배우에 좀더 많은 주목이 쏟아졌던 것은 사실이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함께 호연한 메릴 스트립마저 전년 가장 과소평가받은 연기로 루린 역의 해서웨이를 꼽았을 정도다. 하지만 대중이 공주 마크를 뗀 그녀의 매력을 본격적으로 깨닫기 시작한 계기는 역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다. <뉴욕타임스>는, 살벌한 패션지 편집장에 맞선 인턴 앤디 삭스의 생존기를 다룬 이 영화를 앤 해서웨이의 “승리”로까지 치켜세웠다. 하지만 이 영화가 그녀의 필모그래피에 새로움을 더하진 못했다. 근본적으로는 ‘미운 오리 새끼 백조 만들기’식 드라마의 반복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식 칙릿 무비라 할 만한 <비커밍 제인>도 조 라이트의 <오만과 편견>을 넘어서지 못하며 평작으로 분류됐다. 제인 오스틴의 개인사와 소설 사이의 변별점을 효과적으로 채택하지 못한 까닭이다. 하지만 두 주연작을 통해 해서웨이는 자신의 장점을 확실히 인지시켰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
<겟 스마트>(2008)

솔직함이 가능케 한 단순한 연기

그녀가 배우로서 지닌 가장 큰 보물은 ‘솔직함’이다(그녀의 사생활에 관한 솔직함은 아니다. 그녀는 화제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자기 사생활을 팔아먹는” 행위를 극도로 혐오하는 배우 중 하나다). “카메라 앞에서 완전히 자신을 무장해제하고 솔직하게 연기한다. 그 점이 카메라로 보면 특히 사랑스럽고 빛이 난다”고 한 스트립이나 “날뛰는 망아지 같은 매력(이 점은 <다크 나이트 라이즈>와 <레미제라블>에서 만개한다)과 숨김없는 태도”를 지적한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의 평가 모두 공감할 만하다. 해서웨이와 함께한 어느 인터뷰에서 미아 와시코스카는 “배우는 훌륭한 거짓말쟁이인가”라는 질문에 “배우는 거짓말을 하는 동시에 아주 솔직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연기는 거짓말보다 자신을 까발리는 행위에 가깝다”고 훌륭히 지적한 바 있는데, 해서웨이의 연기에는 그런 순간이 수없이 존재한다.

그녀의 솔직함을 가장 극단적으로 활용한 경우는 아마도 <레이첼 결혼하다>일 것이다. 약에 취해 사고로 동생을 죽음으로 내몬 중독자 킴을 맡은 그녀는, 거의 홈비디오처럼 인물들을 뒤쫓는 카메라 앞에서 킴을 보호하는 데 철저히 실패한다. 갱생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날 밤, 그녀가 언니 레이첼의 결혼식 리허설 파티에서 축배를 올리는 장면에서는 보는 사람마저 발가벗겨지는 기분이다. “날것 그대로의 날카로운 연기는 킴이 짜증 유발자라는 점을 숨기지 않는 동시에 킴이 아무리 견디기 힘든 인간이라 해도 킴의 내면적 고통에 이입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는 한 평자의 설명이 적절하다.

솔직한 연기는 또 단순한 연기를 가능케 한다. 그것은 드라마나 장르물에서 종종 발견되는 굳은 연기의 유의어가 결코 아니다. 그녀의 연기는 잘 아는 친구의 표정처럼 감정 변화를 투명하게 감지하게 한다. 부분적으로는, 얼굴 면적을 꽉 채울 만큼 커다란 눈, 코, 입(어떤 순간에는 그녀의 얼굴이 피에로나 조커의 그것처럼 다가올 정도다)이 애매모호한 연기에 적합하지 못하다는 점, 몸의 근육 하나하나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배우가 아니라는 점 등이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덕분에 그녀는 본의 아니게 장르적 모델로부터 자유로우며, 결과적으로 각기 다른 장르물에서 다른 배우들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돋보인다. <겟 스마트>의 에이전트 99에게서는 스티브 카렐에겐 억제된 종류의 자연스러움이 묻어 있고, <신부들의 전쟁>의 엠마는 케이트 허드슨이 둔감해 보일 정도로 날씬한 코미디를 펼쳐 보이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하얀 여왕은 캐리커처화에 능숙한 조니 뎁과 헬레나 본햄 카터와 정반대되는 ‘돌+아이’ 연기로 연기의 이물감을 어루만진다. 그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아무리 연기의 실천과 효과를 간명하게 가져가도, 연기의 원리와 작용이 지닌 미지의 성격은 훼손되지 않음을 알고 있는 듯하다.

<레이첼 결혼하다>(2008)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10)

영화 연기에 특화된 생동감

해서웨이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고 한다면 그것은 연극이나 TV드라마와 달리 영화에서 유독 부각되는 개성의 연기다. 테크닉의 반대말로서의 연기. 그렇다고 그녀가 사전 준비의 중요성을 간과하거나 즉흥성을 과신하는 배우는 아니다. 그녀가 거쳐온 감독들이 하나같이 강조하듯 그녀는 현장에 나가기 전 방대한 리서치를 바탕으로 배역을 이해하는 작업에 만반을 기한다. 필요하다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나 <레미제라블>에서처럼 15kg씩 체중 조절도 감수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메소드 연기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연기란 “퍼포먼스가 아니라 그동안 내가 준비한 것이 나올 수 있도록 충분히 나를 열어놓는 것”이라고 믿는 그녀는, 좋은 배우들이 대개 그렇듯이, “그냥 한다”. 기술보다 개성에 기인한 그 무위성이 특유의 생동감을 낳는다. <러브&드럭스>나 <원데이>와 같은 로맨스영화에서 때때로 상대배우가 그녀를 리액션으로 쫓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도 그래서다.

2012년 상반기와 하반기에 나누어 도착한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셀리나 카일과 <레미제라블>의 판틴. 두 여자는 (현재까지) 해서웨이의 생동감이 최대로 분출된 결과물이다. “포텐이 터졌다”라는 표현이 이보다 더 좋은 상대를 만날 수 있으랴. 먼저 셀리나 카일. 캣우먼의 귀환을 알릴 그녀에 대해 “조커와 마찬가지로 이미 다른 배우(미셸 파이퍼)가 완벽하게 만들어놓은 캐릭터인 만큼 가장 연기하기 어려운 캐릭터일 것”이라고 짐작했던 크리스천 베일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3달 반 동안 엄밀한 카메라 테스트를 거쳐 그녀를 캐스팅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그녀를 “영화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는 배우”라고 평했는데, 그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혹은 베일의 평가대로, 그녀의 개성은 “코스튬에 갇히지 않는다”. 브루스 웨인과 맞닥뜨리는 첫 장면, 웨인과 춤을 추며 밀고 당기듯 대화를 나누는 연회 장면, 웨인을 베인에게 데려다주는 장면, 사과를 빼앗긴 꼬마를 불량배들로부터 구해주는 장면, 웨인에게 바이크를 선물받는 장면. 이 모든 장면 하나하나에 그녀가 저만의 통통 튀고 싱그러운 몸놀림으로 상쾌함을 더하는데, 그녀에 눈길을 뺏긴 나머지 웨인은 아웃포커스되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

<I Dreamed a Dream>, 20번의 테이크 중 4번째 테이크

다시 <레미제라블>. 이 영화에서 그녀는 노래 잘하는 배우 이상이다. 노래라면, 뮤지컬 <레미제라블>에서 판틴을 맡은 적도 있는 배우 엄마 아래서 자라 고등학생 때 코러스단의 소프라노로 카네기홀에 서본 경력도 있는 그녀다. 하지만 판틴의 그녀는 뮤지컬의 취약점인 짧은 대사부터 뮤지컬 미학의 정점에 위치한 긴 독백까지, 모든 멜로디와 가사에 숨을 불어넣는다는 점이 다른 배우들과 비교해도 남다르다. 노래가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 압도할 만한 순간성은,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처럼, 노래에 몸짓들이 더해지면서 일어난다. 해서웨이는 판틴 역을 준비하며 성노동자 여성에 관한 자료를 많이 찾아봤는데 그중 한 여성이 “원래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말을 반복하며 흐느끼던 중 손을 이마에 가져다대는 제스처가 특히 마음에 와닿았다고 했다. 그리고 “연기를 하면 안되겠다”고 했다. 배우들이 말로는 쉽게 하지만 몸으로는 쉽게 보여주지 못하는 그 연기의 모범을, 그녀는 해낸다. 반복이 요체인 영화연기에 그녀는 손짓, 고갯짓, 자세의 변화 같은 무의식적인 세부로 극적인 일회성을 불어넣는다. 그중 <I Dreamed a Dream>는 20테이크를 찍은 뒤 결국 4번째 테이크를 썼다는데, 16번을 더 찍어도 4번째 테이크의 체험을 복기하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최근 해서웨이가 케네디 센터 공로상을 받은 메릴 스트립에게 바치는 선물로 <She’s My Pal>이라는 뮤지컬 넘버를 부른 적이 있다. 그때 객석에 있던 스트립은 저도 모르게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그녀의 연기를 들여다보려 애쓰고 있다. 지금 극장에서 <레미제라블>의 판틴을 보고 있는 관객의 모습도 비슷할 거다. 그녀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잡으며 무언가를 더 보게 만든다. 비록 우리가 더 본 것이 무엇인지를 말로 옮기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그 얼굴과 몸의 기운이 스티븐 스필버그의 <로보포칼립스>에서는 어떻게 작동할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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