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에 태어나 전후 일본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살았던 오시마 나기사가 지난 1월15일 여든살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사인은 폐렴. 오시마는 1950년대 후반 일본의 영화계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60년대 내내 일본영화의 급진성을 이끌었다. 진보적 신문의 기자가 되고 싶었으나 우연히도 감독의 길로 접어든 20대 후반의 젊은 청년이 일본 영화계에 가져온 파장은 실로 엄청났다.
그는 쇼치쿠 누벨바그의 기수, 더 나아가 일본 뉴웨이브의 전사이기도 했다. 때문에 프랑스의 장 뤽 고다르와 종종 비교되며 일본의 고다르라고도 불렸다. 오시마 자신은 고다르와의 미학적 공감대가 없음을 강조하면서도 “영화에서 진지하게 정치적 주제들을 대면하는 그의 태도에는 동의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말하자면 오시마에게 정치적인 것은 그의 영화 만들기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그는 데뷔 초기에 강렬한 정치적 영화들을 집중적으로 쏟아냈다. <청춘 잔혹 이야기>(1960), <일본의 밤과 안개>(1960) 등으로 불만과 불안으로 휩싸인 전후 일본 세대의 이야기를 힘있게 그려냈다. 어두운 세대론이 길러낸 저항의 기질, 성과 범죄와 죽음이라는 소재에 대한 본능적 매혹, 그리고 강렬한 이야기를 지어낼 줄 아는 창의력과 폭발할 것 같은 영화적 형식의 실험들이 그의 영화를 진일보하게 했다. 오시마는 이내 제작사 쇼치쿠와 결별을 선언하게 되는데, 영화 속 결혼식 장면을 일약 사상 투쟁의 장으로 변모시켜버린 <일본의 밤과 안개>의 내용에 제작사 쇼치쿠가 놀란 나머지 개봉 3일 만에 급히 극장에서 영화를 내리자, 오시마가 쇼치쿠를 비난하며 자기의 길을 가게 된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았다. 그런 그의 성격과 행보를 염두에 둔 말일 것인데, 이마무라 쇼헤이는 “나는 시골 농부이고 오시마 나기사는 사무라이”라고 말했으며 일본영화 전문가 도널드 리치는 “오시마를 보다 진지한 스즈키 세이준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오시마의 정치적, 미학적 혁신성은 60년대 내내 그리고 70년대 초반 작품에 이르기까지 가파르게 상승한다. <백주의 살인마>(1966), <교사형>(1968) <도쿄전쟁전후비화>(1970), <의식>(1970) 등은 내용면에서도 형식면에서도 급진적이었다. 또한 “일본적인 것을 연구하고 그게 무엇인지 밝혀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 외에 영화를 만드는 방법을 나는 모른다”고 오시마는 말할 정도였는데, 말하자면 이 영화들에는 일본사회에 대한 저항적 탐구라는 주제가 관통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오시마 영화 인생의 최후의 정점이 된 작품은 <감각의 제국>(1976)이었다. 1930년대에 실존했던 한 커플의 지독한 육체적 탐닉을 소재로 한 이 영화에서 오시마는 노골적인 성애의 장면들을 통해 그 자신만의 탐미주의를 감행했고 그에 뒤따른 제도 검열에 맞서 투쟁하느라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 뒤 <감각의 제국>의 속편 격에 해당하는 <열정의 제국>(1978)을 만들어내지만 어딘지 모르게 오시마의 영화 인생은 이때부터 하락세를 걷게 된다.
1980년대가 되었을 때 오시마는 창의적 에너지도 정치적 열기도 떠나보낸 것처럼 보였다. 기타노 다케시를 출연시킨 <전장의 메리크리스마스>(1983)를 만들었지만 호평을 얻지 못했고 <막스 내 사랑>(1987)도 마찬가지였으며 이후로는 오랫동안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 기회조차 없었다. 그리고 1995년에 갑자기 찾아온 뇌졸중, 그 병마를 이겨내고 <고하토> (1999)를 완성하여 복귀하는가 싶었지만 끝내 이 작품이 오시마의 평범한 유작으로 남고 말았다. 되돌아보면 오시마의 ‘영화적’ 인생은 강렬했고 또 그런 만큼 짧았다. 불꽃같은 삶이었다고 해야 할 것인가. 오시마는 <일본의 밤과 안개>의 한 장면을 가리키며, “그 불꽃은 내 영화의 인물들의 삶을 대변한다. 우리 삶의 이미지이기도 하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그 불꽃같은 삶이란 오시마의 것이기도 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