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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 업] 남녀간의 정감이 없는 것이 이 영화의 에로스
2013-01-22
글 : 김성훈
사진 : 최성열
<전쟁과 한 여자>로 엣나인 필름 페스티벌 찾은 이노우에 준이치 감독과 데라와키 겐 프로듀서
이노우에 준이치 감독과 데라와키 겐 프로듀서(왼쪽부터).

‘21세기 <감각의 제국>!’ <전쟁과 한 여자>의 홍보 전단지는 영화를 그렇게 소개하고 있었다. <전쟁과 한 여자>는 중일전쟁 때 섹스를 느끼지 못하는 여자(에구치 노리코)와 섹스를 느끼게 해주려는 소설가(나가세 마사토시)의 사랑과, 전쟁 때 겪은 트라우마 때문에 강간을 일삼는 한 남자(무라카미 준)의 사연을 그린 영화다. 전쟁 중 서로의 몸을 탐닉하는 두 남녀를 통해 사회(국가)와 개인의 관계에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언뜻 비슷하게 비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전쟁과 한 여자>는 여러모로 <감각의 제국>과 다른 작품이다. 홍보 전단지에 쓰인 표현을 못마땅해한 데라와키 겐 프로듀서는 “어디까지나 이 영화는 에로스에서 출발한 영화”라며 “전쟁을 다른 시각에서 보여주고 싶었다”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맞다. 영화평론가이자 교수이며, 핑크영화제 프로그래머이자 전 일본 문화청 문화부장이었던 그 데라와키 겐이 맞다. 프로듀서가 된 그가 이노우에 준이치 감독과 함께 만든 <전쟁과 한 여자>를 들고 아트나인 개관 기념으로 열린 엣나인 필름 페스티벌을 찾았다.

-새로 개관한 극장 아트나인을 둘러보니 어떤가.
=이노우에 준이치_영화는 만들기만 하면 끝나는 게 아니다. 관객과 어떻게 소통할 건지가 중요하다. 한국은 흥행이 되지 않으면 영화를 3일 만에 스크린에서 내린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트나인 같은 양심적인 극장이 많이 생겨서 예술영화 관객층을 키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극장을 둘러보니 영화를 보든 보지 않든 테이블에 앉아서 음식을 먹거나 술을 마시면 영화 이야기가 절로 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 좋은 문화 공간이 될 것 같다.

-<전쟁과 한 여자>는 어떻게 출발하게 된 영화인가.
=데라와키 겐_아트나인을 운영하고 있는 엣나인 필름과 지난 4년 동안 핑크영화제의 프로그래밍을 맡아왔다. 핑크영화의 편당 예산이 보통 300만엔(약 3500만원)인데, 그 정도의 예산으로라면 나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왔다. 쉽게 접근했다. 이 영화는 전쟁과 관련한 어떤 이념이나 사상을 다루는 작품이 아니다. 전쟁 중에도 섹스를 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 영화다. 상반신에서 사고하는 게 아니라 하반신에서 생각하는,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전쟁을 다루고 싶었다.

-영화에는 세 남녀가 등장한다.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하는 여자와 그녀를 만족시켜주고 싶은 소설가. 그리고 전쟁의 트라우마 때문에 강간을 일삼는 한 남자. 어떻게 구상하게 된 이야기인가.
=데라와키 겐_사카구치 안고 작가가 쓴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소설은 소설가와 한 여자의 이야기다. 여기에 중일전쟁(1937)에 참전한 뒤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한 군인의 이야기를 추가했다. 중일전쟁 당시, 100만명이 넘는 일본 군인이 징병됐다. 그들은 중국에서 폭력, 강간 등의 전쟁 범죄를 저질렀을 텐데, 거기에 대해 아무도 궁금하게 여기지 않는 게 이상했다. 그런 의미에서 군인 캐릭터를 새로 추가했다.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케이티>를 쓴 아라히 하루히코 작가가 각색했다.
=데라와키 겐_프로듀서로서 중요했던 건 누가 시나리오를 쓰는가였다. 감독은 누가 맡아도 괜찮았다. 그래서 일본의 톱 클라스 시나리오작가인 아라히 하루히코를 찾아갔다. 세세한 주문은 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써달라고 했다. 어떤 작품이 나올지 기대를 하면서 시나리오를 기다렸다. (“시나리오가 처음 나왔을 때 기억나나?”라는 질문에) 바라던 훌륭한 시나리오였다. 예산이 적은 탓에 배우, 스탭에게 개런티를 거의 챙겨주지 못했다. 폭력적이고 성적으로 민감한 신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었던 건 각본 덕이었다.

-시나리오가 나온 뒤 감독 제안을 받았을 것이다. 건네받은 시나리오가 어땠나.
=이노우에 준이치_본업이 시나리오작가다. 아오야마 신지 영화의 각본도 여러 편 썼다. 아라히 하루히코 선생의 제자인 까닭에 그동안 공동 집필도 많이 했다. 감독직을 제안받았을 때 감독으로서가 아닌 각본가로서 시나리오를 읽었다. 그동안 전쟁과 관련한 시나리오를 3편 정도 썼는데, 단 한편도 영화화되지 못했다. 전쟁을 파헤치다보면 일본이 밝히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 소재를 많은 예산으로 그리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투자자가 이건 이래서 빼달라, 저건 저래서 빼달라고 요구하니까. 나도 그렇고, 아라히 하루히코 선생도 그렇고, 평소 일본영화에 품고 있던 불만을 해결할 수 있는 작품이 바로 이 영화였다. 예산이 적어 전쟁과 관련한 시퀀스 대부분을 내레이션이나 여주인공의 대사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는데,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게 풀어가는 것이 감독으로서의 과제였던 것 같다.

-영화에는 다양한 섹스가 나온다. 성적 쾌감이 든다기보다 허무하더라.
=이노우에 준이치_보통 핑크영화 속 에로스는 다음과 같다. 벗네, 벗네, 벗네 하다가 남녀의 몸이 합쳐지잖나. 그러나 이 영화에서 그런 과정이 없다. 남녀간의 정감이 없다. 물건과 물건, 행위와 행위가 부딪쳤을 때 어떤 화학반응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이 영화의 에로스를 묘사하는 것이 힘들고 어려웠다.
데라와키 겐_감독은 에로스를 그리기 힘들었다 생각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성적 쾌감을 느끼지 못하지만 느끼고 싶은 여자와 느끼게 해주고 싶은 소설가는 굉장히 좋은 에로스를 만들 수 있는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프로듀서의 욕심이었다. 물론 연출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런 점에서 프로듀서로서 제대로 조율하지 못한 것 같다.
이노우에 준이치_아니다. 감독인 내가 능력이 모자랐던 것 같다.

-프로듀서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해보니까 어떻던가.
=데라와키 겐_프로듀서는 세 가지를 잘해야 하는 것 같다. 시나리오를 소중하게 여길 것. 현장에서 감독의 자유를 보장할 것. 돈을 잘 굴리고 돈이 현장을 간섭하게 하지 않을 것. 프로듀서가 잘해야 현장이 잘 굴러가고 영화가 훌륭해진다. 그간 했던 모든 일에서 프로듀서를 했다고 생각한다. 일본 문화청에 있을 때는 일본 문화를 어떻게 하면 세계에 알릴 수 있을지 ‘프로듀스’했고, 교수일 때는 학교에서 어떻게 하면 학생들을 잘 가르칠지 ‘프로듀스’했다. 영화 프로듀서로서 이번 영화를 잘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그간 시나리오를 쓰다가 처음으로 메가폰을 쥐었다. 계속 감독을 할 생각인가.
=이노우에 준이치_많은 배우, 스탭의 도움 덕에 이번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음 작품도 연출할 것이다, 라고 쉽게 얘기하지 못하겠다. ‘이런 영화가 있는데 함께하자’라는 얘기가 나오면 그 일을 잘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때 인디스페이스에 후원금을 내기도 했다.
=데라와키 겐_인디스페이스에 아직 가보지 못했다. 가봐야 하는데…. 영화인들끼리 무언가를 만든다는 게 내 마음을 흔들었다. 정부나 대기업의 지원에 기대지 않고 영화인과 관객이 자발적으로 모금해서 재개관한 거잖나. 그들의 의지와 계획이 인상적이었다.

-차기작은 무엇인가.
=이노우에 준이치_시나리오작가로 참여한 작품이 한편 있다. <후쿠시마>(가제)라는 제목의 영화다. 제목대로 후쿠시마 원전 1호기가 처음 생길 때 마을에서 반대 운동이 있었는데, 그때 일을 소재로 한 이야기다.
데라와키 겐_아직 특별한 계획은 없다. 영화 기획을 더 해보려고 하는데 뭐가 될진 아직 모르겠다. 몇 가지를 두고 생각 중이다. <전쟁과 한 여자>가 그랬듯이 남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찍지 않고, 모든 사람이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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