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는 ‘악은 스스로 생각할 능력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생기는 것’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 개념이 탄생하는 과정을 과장없이 차분한 연출로 보여준다.
철학자가 생각하는 모습이 과연 영화로 시각화될 수 있을까? 마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과 배우 바버라 수코바가 이를 해냈다. 폰 트로타의 신작 <한나 아렌트>가 1월10일 독일 언론에 공개됐다. 폰 트로타 감독은 전작들을 통해 로자 룩셈부르크, 구드룬 엔슬린, 힐데가르트 폰 빙엔 등 자신의 시대를 치열히 살아낸 여성인물들을 영화로 그려낸 바 있다.
영화는 담배를 피우며 번민과 사색에 빠진 한나 아렌트(1906~75)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초반부터 롱테이크 장면을 할애한다. 카메라는 아렌트가 혼자 생각에 몰두해 있는 영민한 표정의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따라간다. 사건과 사건 사이, 대사 없이 고뇌하는 아렌트의 오랜 ‘침묵’은 내레이션이 없음에도 관객으로 하여금 생각의 진폭을 넓히게 한다.
<한나 아렌트>가 주목하는 시대적 배경은 1960년대 초반이다. 당시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취재해 <뉴욕타임스>에 싣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떠난다. 영화는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독일 지성인들의 60년대 모습부터 대학에서 강의하는 아렌트의 모습, 그녀와 남편의 내밀한 사적 공간까지 그야말로 한 여성 철학자의 소소한 일상을 차분하게 묘사한다.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하이데거와의 일화를 말하는 장면들도 스치듯 등장한다. 가장 주목하게 되는 대목은 역시 아이히만의 재판 장면인데, 폰 트로타 감독은 재연을 피하고 실제 기록영상을 그대로 삽입했다. 아이히만이 재판 도중 “명령을 따라했을 뿐”이라는 말을 반복하거나, 손수건으로 코를 푸는 실제 모습이 등장하고 한나 아렌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실소를 내뱉는다. ‘악은 스스로 생각할 능력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생기는 것’(<뉴욕타임스>의 한나 아렌트의 기사 중)이라는 아렌트의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 개념이 탄생하는 과정을 영화는 과장없이 차분한 연출로 보여준다. 한나 아렌트 자신이 그랬듯이.
한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다
마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 인터뷰
-수많은 인물 중 왜 하필 한나 아렌트를 선택했나.
=한나 아렌트의 저작들은 여전히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그녀의 철학은 21세기인 지금에 와서야 제대로 받아들여진다. 가령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이 처음 나왔을 때 많은 이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지만 지금은 나치 범죄를 이야기할 때 널리 통용되는 개념이 됐다. 독창적인 사유를 하는 철학자 뒤에 숨은 한 여자에게 관심이 갔다.
-로자 룩셈부르크, 힐데가르트 폰 빙엔에 이어 이번 한나 아렌트 역할에도 바버라 수코바를 주연배우로 캐스팅했다.
=처음부터 한나 아렌트 역은 그녀의 것이었다. 바버라의 저항을 꺾고 캐스팅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바버라 없이는 이 영화를 생각할 수도 없었다. 나는 사유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배우를 원했다. 오직 바버라만이 이를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촬영, 시나리오, 연출 등 여성 스탭의 비중이 높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 그래도 순전히 우연이라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말하고 싶은 건 한나 아렌트가 페미니스트는 아니었다는 거다. 그녀의 삶을 소재로 해 영화란 매체에 맞게 열정과 높은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만든 작품으로 봐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