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인인가, 아니면 람보인가.” <다이하드>(1988)에서 테러리스트(앨런 릭맨)가 자신의 계획을 훼방놓는 존 맥클레인(브루스 윌리스)에게 정체를 물었다. <다이하드> 시리즈가 나온 지 25년째가 된 만큼 우리가 먼저 그 질문에 대답해보자. 존 맥클레인은 존 웨인이 되기엔 소박하고, 람보가 되기엔 힘이 약한 남자랄까. 그렇다면 존 맥클레인의 대답은 어떠했을까. “전설의 카우보이 로이 로저스가 우상이라네.” 100편이 넘는 서부극에 출연한 까닭에 ‘카우보이의 왕’이라 불렸던 가수 겸 배우인 로이 로저스 말이다. 맞다. 1980년대 당시 인기를 끌었던 람보나 코만도 같은 히어로급 액션영화 속 주인공에 비하면 존 맥클레인은 확실히 카우보이에 어울리는 남자다. 어쨌거나 재미있는 건 로이 로저스나 존 맥클레인이나 ‘때(피와 땀)에 전 셔츠’를 입었다는 사실이다.
‘때(피와 땀)에 전 셔츠’를 입은 남자
‘카우보이’ 존 맥클레인이 돌아왔다. 디지털 액션 시대에 뛰어든 프랜차이즈의 4번째 작품 <다이하드 4.0>(2007) 이후 5년 만이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스케일이 커지는 법칙은 이번 시리즈인 <다이하드: 굿 데이 투 다이>(2월7일 개봉)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일단 무대가 러시아다. LA(<다이하드>), 워싱턴 DC(<다이하드2>(1990)), 뉴욕(<다이하드3>(1995)), 뉴저지, 버지니아, 워싱턴 DC(<다이하드 4.0>) 등 그간 미국을 누벼온 시리즈의 전작을 떠올려보면 존 맥클레인의 발놀림은 더욱 분주해졌다. 그를 러시아로 향하게 한 건 아들 잭(제이 코트니)이다. 잭이 알 수 없는 사건에 휘말렸다는 소식을 들은 뉴욕 경찰 존 맥클레인은 러시아로 간다. 잭을 만나러 가던 중 그는 눈앞에서 대형 폭탄 테러를 목격하게 되고, 아수라장이 된 사고 현장에서 겨우 아들을 만난다. 아들이 모스크바에서 작전 수행 중인 CIA 요원이라는 사실도 그때 알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존 맥클레인은 잭과 함께 테러단에 맞선다.
브루스 윌리스의 <다이하드> 시리즈 귀환이 반가운 이유는 시리즈의 전작에 비해 스케일이 커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네는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형 형사야”라는 <다이하드 4.0>의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시리즈가 가진 특유의 쾌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테러 현장에 휘말리게 되고, 그때부터 상부의 지시 없이 혈혈단신으로 적과 맞서고, 제이슨 본처럼 적을 단숨에 제압하진 못하지만 특유의 맷집으로 끝내 쓰러뜨리고야 마는 아날로그 형사 잭 맥클레인 말이다. 그의 헤어스타일이 근사한 대머리로 바뀐 것 말고는 잭 맥클레인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나는 나이가 ‘약간’ 들었을 뿐이다
솔직해지자. 쉰이 넘는 브루스 윌리스가 러시아에서 뜀박질하며 고생할 풍경을 그려보면 든든함보다 안쓰러움이 앞선다(이번 시리즈에서 아들을 설정한 것도 브루스 윌리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한 목적일 것이다). “영웅이 돼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다…”로 시작되는 그의 일장 연설 역시 젊은 관객에게는 엄숙함보다 ‘꼰대’처럼 들릴 게 뻔하다. 젊은 시절의 브루스 윌리스가 그랬듯 지금은 새파란 배우들이 첩보원이 되어 유럽 전역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적을 단번에 제압하는 시대가 아니던가. 아니면 슈퍼히어로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고 최첨단 무기를 이용해 적과 자웅을 겨루는 시대가 아니던가. 브루스 윌리스 역시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얼마나 빨리 달릴 수 있냐고? 얼마나 잘 싸울 수 있냐고? 그게 내게 도전이었다. 그런 도전이야말로 즐거운 일이다.” 쉴새없이 뛰고, 달리고, 적이 날린 주먹을 견뎌야 하는 <다이하드: 굿 데이 투 다이>는 그에게 도전이나 마찬가지였다. “개인적인 도전이었다. 존 맥클레인이 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그건 어떤 혼란감도 주지 않는다. 물론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나 나이가 ‘약간’ 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브루스 윌리스의 말과 달리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자신의 몸에서 잭 맥클레인의 옷을 벗어던지기 위해 몸부림친 건 사실이다. <마지막 보이스카웃>(1991), <스트라이킹 디스턴스>(1993), <라스트맨 스탠딩>(1996) 등의 블록버스터에 출연하다가도 코미디(<허드슨 호크>(1991)), 갱스터(<빌리 배스게이트>(1991)), 멜로드라마(<컬러 오브 나이트>(1994))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펄프픽션>(1994)에서 얼떨결에 보스의 오른팔을 죽이는 복서는 어떤가. “가장 좋아하는 출연작”이라는 <위험한 상상>(1991)의 불한당 같은 건달은 또 어떤가. 두편 모두 여러 의미에서 꽤 근사했다. 17년 전 그가 “액션 장르가 재발견되기까지 당분간 액션영화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도 어쩌면 맥클레인을 뛰어넘어 다양한 역할을 하기 위한 욕심에서 내린 결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영화를 찍는 일은 여전히 두렵다
필모그래피가 70편 가까이 쌓이는 동안 그의 행보는 무척 자유로워진 것 같다. “같은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조셉 고든 레빗과 붙어다니며” 찍기도 하고(<루퍼>(2012)), “아이들이 주인공인 까닭에 출연 비중은 다소 적지만 어른다운 어른을 맡기”도 했다(<문라이즈 킹덤>(2012)). 때로는 액션 블록버스터에서 구축된 자신의 이미지를 재활용하는 과감한 선택도 했다(<익스펜더블> 시리즈. 하긴 과거 페이크 다큐멘터리 <그 정도면 적절해>(1989)에서 자신을 패러디하기도 했고, <플레이어>(1992)에서는 액션 영웅으로서의 자신의 이미지를 조롱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다. <오션스 트웰브>(2004)에서는 암스테르담 박물관에서 줄리아 로버츠로 위장한 줄리아 로버츠와 마주하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매 작품 새로운 모험을 하고 있는 그가 여전히 두려워하는 게 있다. “영화를 찍는 일이다.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매일 두렵다. 카메라 앞에서 누군가가 던진 공을 다시 받아내야 하는 건 언제나 긴장된다. 물론 딸을 키우는 게 훨씬 더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노련해진 카우보이의 생각이다. 어쨌거나 이제 극장에서 “이피카이예이 머더퍼커”(잭 맥클레인이 악당을 해치울 때 외치는 소리. 시리즈 4편 모두 등장한 대사다)를 함께 외칠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