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살아 있는 전설, 스기이 기사부로 감독이 돌아왔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여명기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스승 데즈카 오사무와 함께 작업한 끝에 불후의 명작 <우주소년 아톰>의 원화를 그린 이가 다름 아닌 이 사람이다. 또한 일본의 국민동화작가 미야자와 겐지의 원작을 바탕으로 그린 <은하철도의 밤>은 <은하철도 999>의 전신이 되었으며, 이후로도 <터치> <폭풍우 치는 밤> 등의 작품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 그가 다시 한번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들고 돌아왔다. 올해로 72살, 아니메 마에스트로 스기이 기사부로 감독의 입을 통해 신작 <부도리의 꿈>을 미리 만나보자.
-<구스코 부도리 전기>는 1994년에 한 차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알고 있었지만 보진 못했다. 미야자와 겐지는 오래된 작가이고 <구스코 부도리 전기>는 고전이다. 워낙 좋은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이므로 전작에 대해 특별히 신경 쓰이는 부분은 없다. 사람들마다 고전을 읽는 방법이 다르고 <구스코 부도리 전기>는 여러 형태로 만들어져도 좋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작품은 <은하철도의 밤> 스탭들이 다시 모여 5년간 제작한 걸로 화제가 되었다. 데즈카 프로덕션이 제작을 담당한 것도 그렇고, ‘거장들의 귀환’이라는 느낌이다.
=데즈카 프로덕션은 나의 스승인 데즈카 오사무 선생의 프로덕션이다. 예전에 데즈카 선생님과 함께 작품을 만들기도 했지만 스튜디오가 나뉘면서 같이 일할 기회가 없었다. 오랜만에 데즈카 선생님의 프로덕션에서 만들게 되어 솔직히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예전에 살던 집에 돌아온 기분이랄까.
-<펜넨넨넨넨 네네무 전기>와 <구스코 부도리 전기> 두편으로 구성된 미야자와 겐지의 원작 중 굳이 <구스코 부도리 전기>를 영화로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은 겐지의 동화만을 놓고 보자면 <펜넨넨넨넨 네네무 전기>가 더 재미있다. 실제로 겐지 역시 <펜넨넨넨넨 네네무 전기>를 먼저 쓰고 그것을 다시 <구스코 부도리 전기>로 바꿔 썼다. 이번 영화는 <구스코 부도리 전기>를 원작으로 삼고 있지만 그 근원은 <펜넨넨넨넨 네네무 전기>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작품 모두 의식하며 각색했다. <구스코 부도리 전기>밖에 모르는 이가 보면 원작과 다르다고 말하겠지만 <펜넨넨넨넨 네네무 전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보면 이 영화가 <펜넨넨넨넨 네네무 전기>에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을 인간 아이에서 고양이로 바꾼 이유는.
=자주 받는 질문이다. 예전부터 미야자와 겐지의 작품 중 최소한 세편 정도는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싶었다. 결과적으론 첫 번째였던 <은하철도의 밤>에 이어 이번에도 인물들을 고양이로 만들었다. 이유는 뭐랄까, 겐지의 동화는 뭔가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웃음) 그의 작품 속 자연의 이미지는 인간이 본 풍경과는 조금 다르다. 바람의 소리를 듣거나 생명의 경이를 직접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투명함이랄까. 그런 것들을 인간의 캐릭터로 만들면 전달이 어렵다고 생각했다. 고양이 캐릭터는 그런 상상력을 돕기 위한 나름의 요령이었다.
-<은하철도의 밤>도 그렇고 미야자와 겐지의 원작을 계속 영화화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겐지 동화의 가장 큰 매력은 생명력이다. 살아 움직이는 듯 생명력이 넘친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들 던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생명들을 필요로 한다. 단 하나의 생명이란 건 없다. 모든 생명은 연결되어 있고 겐지는 그 모든 것을 포함해서 생명이라고 말한다. 인간뿐 아니라 벌레 등 자연의 모든 것이 연결된 상태를 생명으로 바라보는 그 생각이 바로 겐지 동화의 매력이다. 굳이 말하자면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그곳에 또 한번 생명을 불어넣고 싶었다.
-말씀대로 미야자와 겐지의 원작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겐지의 모든 동화는 읽은 이에게 “당신은 이 동화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영화에 대한 메시지 역시 내가 보여주는 게 아니라 영화를 본 뒤 관객이 스스로 이야기하게 되길 바란다. ‘수수께끼의 고양이는 무슨 의미일까?’ ‘왜 부도리는 모두를 위해서 화산에 가도 좋다고 생각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할 시대라고 생각한다. 애니메이션이지만 <부도리의 꿈>을 보는 모든 분들이 작품을 넘어 자연이나 가족, 그리고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다.
-<부도리의 꿈>의 재난 상황인 화산 분화, 냉해는 일본의 현재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겐지의 동화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겐지가 살았던 일본 동북지역을 소재로 하면서 일본 아이들의 이름을 주인공으로 했던 동화, 다른 하나는 ‘조반니’, ‘캄파넬라’, ‘부도리’, ‘네리’ 등 이름이 가타카나(외국어를 일본어로 표기할 때는 가타카나로 표기한다-편집자)로 된 주인공의 동화다. 겐지는 자신의 메시지를 전세계 사람들에게, 즉 국가를 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이름을 가타카나로 썼다고 한다. <부도리의 꿈>이 지금 현재의 일본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동화가 전하는 테마는 일본만이 아니라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한다. 한마디로 하자면 “자연 안에서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이다.
-결말이 다소 급작스럽다는 평이 있는데.
=그것도 많이 들은 평이다. (웃음) 사실은 결말 앞에서 한 장면을 잘랐는데 화산국의 경보가 일제히 울리는 장면이었다. 화산이 분화했다는 것도 알려주고 부도리가 없어진 것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장면이었지만 만들던 도중 일본 동북지역에 쓰나미가 일어났다. 영화를 완성했을 때 정말로 동북의 피해를 입은(쓰나미를 경험한) 아이들이 볼 것을 생각하니, 아이들이 몸으로 기억한 경보음을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화의 흐름이 원작에 더 가까워져 산뜻하게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한다. 원작 역시 마지막 부분은 간단하게 서술하고 있다. 독자가 또는 관객이 각자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고 할까.
-얼마 전 이시오카 마사토 감독의 <아니메 마에스트로 스기이 기사부로>라는 영화를 봤다. 감독님은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전설이다. 노장 감독의 활동을 좀처럼 볼 수 없는 한국 입장에서는 감독님 같은 거장이 아직까지 왕성한 활동을 유지하는 것이 부러울 따름이다.
=사실 한국의 애니메이션 역사도 굉장히 오래되었고, 사람들의 손재주도 뛰어나다. 지금 일본 애니메이션의 절반은 한국 사람들이 만들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도리의 꿈> 또한 뒷부분 마무리는 한국인들이 맡았다. 단지 안타까운 건 한국은 연출, 미술, 기획 등 사람을 관리하는 총체적인 밑그림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각각의 스탭을 육성할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명배우 100명이 있다고 영화를 찍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한국 애니메이터들은 매우 훌륭하다. 개인적으로 일본 애니메이터보다 훨씬 나은 친구들도 많이 알고 있다. 좋은 애니메이터를 키우는 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니만큼 부디 이 훌륭한 자원들을 잘 활용하길 바란다.
-최근의 애니메이션 경향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고 늘 같은 호흡으로 작품을 만든다는 인상이다.
=애니메이션도 엔터테인먼트다. 액션, SF, 드라마 등 여러 가지 다양한 장르와 방식이 있을수록 좋다. 다만 지금 유행하는 패션이나 소위 팔리는 만화의 경향은 젊은 사람들이 연출하거나 만드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나는 50년이나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왔고 젊은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는 소재를 애니메이션화하는 게 긴 시간 이 분야에 발을 담가온 내 역할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렇다고 <원피스> 같은 작품을 절대 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다. (웃음) 재미있고 의미있는 작품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최근에 가장 감명 깊게 본 애니메이션은 무엇인가.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늑대아이>를 보고 울 뻔했다. 두번이나. (웃음) 잘 만들어진 영화인 데다가 환상적인 지점이 무척 만족스러웠다. 사람과 늑대 사이에서 생겨난 아이들을 기른다는 판타지를 정말로 그런 사연을 만나본 것인 양 생생하게 그려냈다. 같은 애니메이터로서 대단히 감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