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개봉을 앞두고 배우 계륜미가 한국을 찾았다. 계륜미가 주인공으로 연기한 양야체 감독의 영화 <여친남친>은 지난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예매 시작 7초 만에 매진되는 진기록을 세워 새삼 한국의 ‘계륜미 팬덤’을 실감케 했었다. 하지만 아직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의 그 신비로운 소녀를 생각하는 팬이 있다면, 이번 영화를 관람하기 전에 충분히 놀랄 준비를 하는 것이 좋다. 국민당 정부하의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청춘을 보낸 한 여자의 삶을 통해, 계륜미는 수줍은 듯 당돌한 얼굴 속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가 스크린 속의 가녀린 소녀만을 떠올리고 있을 때, 연기경력 12년차를 맞은 그녀는 어느새 불쑥 성장하여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늦었지만 금마장 여우주연상 수상을 축하한다. 처음 배우 일을 시작할 때 가족, 특히 아버지의 반대가 컸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대스타가 된 데다 큰 상도 받았는데 요즘은 어떤가.
=아버지께선 항상 여자는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안정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배우 일이라는 게 수입이며 생활이며 모든 것이 고정적이지 않다. 그래서 초반에 걱정을 많이 하셨다. 하지만 12년 동안 배우 일을 하면서 이 일에 열정을 가지게 되었고, 게다가 지난해에 상을 받은 것 때문에 이제는 아버님도 나를 신뢰하고 지지해주신다.
-역시 부모님의 반응이 바뀌는 코스는 만국공통인 것 같다.
=맞다. 정말 그렇다. (웃음)
-<여친남친>은 대만 민주화 운동의 열기가 거셌던 80년대에 청춘을 보낸 세 남녀의 삶을 그려낸다.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 느낌이 어땠나.
=처음에 작품을 읽었을 때는 작품 속의 이야기와 주제의식에 매료됐다. 하지만 단번에 출연을 결정하기는 역시 망설여졌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는데, 이 시대에 관한 이야기는 다소 민감한 주제이기도 하거니와 내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의 학생들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떻게 자유를 쟁취했는지를 잘 알지 못한다. 촬영할 때에도 감독과 주로 이런 부분에 대해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결국 출연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뭐였나.
=고민 끝에 스스로 찾아낸 결론은, 대만에서 나고 자란 연예인으로서 일종의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그 시대의 삶 전부를 표현해낼 수는 없겠지만, 당시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젊은이들의 삶을 최대한 잘 그려냄으로써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가 과거의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얻어낸 것인지를 깨달았으면 했다. 이런 것이 연예인이 가져야 할 책임감이라고 생각했다.
-<여친남친>은 결국 무엇에 관한 영화인가.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갈등과 좌절, 그리고 슬픔을 겪게 된다. 하지만 힘든 시간들을 지나 보낸 뒤에 되돌아보면, 그래도 행복했던 일들 역시 많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뒤늦게 아주 작고 평범한 행복을 위해 우리가 일생을 바쳐 노력해왔다는 점을 깨닫는다. 아주 크고 거창한 성과는 아니지만, 일상적인 작은 행복들. 그런 것들이 중요하다는 내용의 영화다.
-보기 전에는 몰랐는데, 동성애에 관련된 내용이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사랑에는 경계가 없다. 우리가 관객에게 전달하고픈 메시지도 이러한 지점이다. 법률, 전통, 도덕 등 많은 외부적인 요인들이 사랑에 한계를 짓는데 우리는 이런 것들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동성애, 미혼모,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선입견과 차별 등은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조금만 마음을 열고 개방적으로 생각하면, 그러한 차이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당신이 연기한 메이바오는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인이며, 셋이 함께 지냈던 아름다운 과거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메이바오는 기본적으로 과거를 버릴 수 없는, 주어진 운명에 쉽게 휘둘리는 여자다. 얼핏 보기에는 두려운 것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 모든 일들은 그 결과가 정해져 있고, 출생 이후로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운명을 떠안고 과거를 품에 안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녀의 눈에는 미래가 잘 보이지 않고 뿌연 안개 속처럼 보일 뿐이다. 하지만 영화 속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그녀는 변한다. 서서히 문제를 직시하기 시작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결국 메이바오는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를 낳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 결정 자체가 운명을 극복하려는 시도이자, 더이상 무엇엔가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지라고 생각한다.
-극 후반에서 변화를 겪지만, 전반부의 메이바오는 기존에 갖고 있던 왈가닥 소녀의 이미지와 비슷하다.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은 배역은 없나.
=많이 받는 질문이다. (웃음) 나는 원래 개방적이라 어떤 역할을 맡든 잘 소화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또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러저러한 배역을 해보고 싶다’라는 말로 나의 가능성을 가둬놓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굳이 한 가지를 뽑으라면 한 사람의 일생을 그린 전기영화에 도전해보고 싶다. 예를 들면 에디트 피아프의 삶을 그린 <라비앙 로즈> 같은 작품 말이다. 배우로서 큰 도전이 될 것 같다.
-이야기 전개상 두 남자배우(장효전, 봉소악)와의 앙상블이 중요했을 것 같다. 어땠나.
=나로선 <여친남친>의 두 남자배우와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운이었다.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는 서로 의견이 충돌하는 일이 많지만, 일단은 서로 탁구를 치듯이 원활하게 주고받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상대를 철저하게 믿고 나의 전부를 내던져야 한다. 우리는 모두 머릿속에 오직 이 역할을 잘해내겠다는 생각만 있었다. 돈을 벌겠다느니 뭐 이런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양야체 감독과는 <남색대문>(이때는 조감독) 이후 두 번째 만남이다.
=<여친남친>으로 근 10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 예전보다 더 발전되고 성숙한 모습이었다. 평소에 생각하는 것들을 이전처럼 충동적으로 드러내는 데 급급하지 않고 작품에서 녹여내려는 모습이 보였다.
-함께 작업해보고 싶은 한국의 감독이나 배우는 누구인가.
=최근에 본 <마더> <밀양> <숨>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 일해보고 싶은 감독은 봉준호와 김기덕, 그리고 배우를 꼽자면 전도연이다.
-김기덕은 좀 의외다.
=나는 그동안 꽤 한정적인 장르의 영화들, 대부분 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에 많이 출연해왔다. 때문에 언제나 다른 것들을 시도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 김기덕 감독은 인간의 어두운 면을 통해서 내면 깊숙한 곳의 본성과 감정을 잘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 같다. 배우로서 계속 작업을 해나가려면 스스로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펼치고 모르는 것도 이해해보려는 시도와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김기덕 감독과 작업을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