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곱씹을수록 여운이 남는 작품 <부도리의 꿈>
2013-01-30
글 : 장영엽 (편집장)

“캄파넬라. 이제 우리 둘만 남았어. 우리는 이 세상 끝까지 함께 가자.” 하늘을 달리는 은하철도 안에서 두명의 친구는 영원한 우정을 맹세하지만, 그중 한명은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심연으로 사라져간다.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모티브가 된 소설 <은하철도의 밤>은 일본의 근대 소설가 미야자와 겐지의 대표작이었다. 맑은 심성의 주인공과 환상적인 모험, 자연에 대한 애정과 인간의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삶에 대한 애잔함. <은하철도의 밤>은 미야자와 겐지의 작품을 대변하는 핵심적인 요소들을 가장 유려하게 풀어낸 작품이었다. 1985년 이 소설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던 일본의 아니메 거장 스기이 기사부로의 연출력이 다시 한번 미야자와 겐지의 작품과 만났다. <부도리의 꿈>은 미야자와 겐지의 가장 자전적인 소설로 평가받는 <구스코 부도리의 전기>를 원작으로 삼은 애니메이션이다.

고양이 구스코 부도리의 삶은 행복했다. 추위와 기근이 모든 것을 앗아가기 전에는. 식량을 구하러 숲에 나갔던 부모가 돌아오지 않자 부도리는 동생 네리를 보듬으며 숲속 오두막에서 살아간다. 어느 날 정체불명의 고양이가 기근을 해결해주겠다며 찾아와서는 네리를 데리고 사라져버린다. 그의 뒤를 쫓으며 부도리의 기나긴 여정도 시작된다.

엔터테인먼트로 충만한 21세기 애니메이션들이 스타카토의 속도감으로 관객을 공략하는 반면, <부도리의 꿈>은 아다지오처럼 느리고 차분하게 흘러가는 영화다. 재미를 위해 디테일을 포기하려는 꼼수는 이 작품이 지향하는 바가 아니다. 가족을 잃고 외톨이가 된 부도리가 다양한 장소에서 선인들에게 도움을 받고, 그 선행을 어떤 방식으로든 되돌려주는 ‘상생’의 테마가 깊이 자리잡은 <부도리의 꿈>은 미야자와 겐지의 원작이 그렇듯 타인과 도움을 주고받고 땀흘려 얻는 노동의 과정들을 공들여 묘사한다. 자칫 지루한 일상의 풍경들로 흘러갈 수 있었을 영화에 숨통을 틔어주는 건 꿈속 세상의 모습이다. 고단한 삶에서 부도리는 끊임없이 꿈을 꾼다. 빛나는 공을 엮어 그물을 만드는 고양이들과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나비들 사이를 거닐고,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듯한 도시를 헤매며 부도리는 끊임없이 동생의 모습을 찾지만 어둠 속으로 홀연히 사라져갔던 <은하철도의 밤>의 캄파넬라처럼, 동생 네리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사실 <부도리의 꿈>은 여러모로 스기이 기사부로 감독의 20여년 전 작품 <은하철도의 밤>을 떠올리게 하는 애니메이션이다. 같은 작가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은하철도의 밤>의 주인공 조반니의 외모를 쏙 빼어닮은 부도리의 모습, 하드보일드한 인생의 단면을 환상적인 작화를 통해 보다 부드럽게 전달하는 방식이 마치 이란성 쌍둥이 형제를 보는 듯 닮아 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도 가능할 것 같다. 과거의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부도리의 꿈>을 21세기에 만들며 스기이 기사부로 감독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수많은 잘못을 나도 했듯이/ 사랑하는 이 나라도 되돌릴 수 없어/ 그 사람이 그때마다 용서해줬던 것처럼/ 나는 이 나라의 내일을 다시 생각하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엔딩곡이 어쩌면 그 대답이 될 수 있을 듯하다. 3.11 대지진과 원전사고로 황폐화된 조국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부도리의 꿈>은 어쩌면 2011년 이후 모든 일본 영화인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을 질문에 대한 애니메이션 노장의 대답 같은 작품이다. ‘이타적인 한명의 부도리가 이 세상에 살아갈 수많은 다른 부도리들의 삶을 구원할 수 있다’는 메시지는 지나치게 착하게 다가오지만, 그 말을 작품으로 풀어낸 이의 고민과 연륜은 결코 가볍지 않다. 오랜만에 곱씹을수록 여운이 남는 잘 지은 밥 같은 작품을 만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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