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판타스틱 Mr.앤더슨
2013-02-05
글 : 김지미 (영화평론가)
<문라이즈 킹덤>으로 돌아온 웨스 앤더슨의 세계 속으로
<문라이즈 킹덤> 촬영현장에서의 웨스 앤더슨 감독.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은 심미안을 가진 어른들을 위해 꼼꼼하게 만든 수공예 장난감 같다. 2012년 칸영화제 개막작으로 선택된 <문라이즈 킹덤>은 1960년대 패션, 건축, 소품으로 견고하게 축조된 세팅 위에 십대의 사랑의 도피행각을 풀어놓았다. 보는 재미와 듣는 즐거움이 가득 찬 화면에는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스타들이 능청스럽게 유머를 풀어놓는다. <문라이즈 킹덤>으로 돌아온 앤더슨 왕국의 특징을 그 시작부터 찬찬히 살펴보자.

웨스 앤더슨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늘 세상으로부터 비스듬히 비켜나 있다. 어른들은 철이 없고 이 철없는 어른들 때문에 아이들은 웃자란다. 앤더슨의 장편 데뷔작 <바틀 로켓>(1996)부터 이런 캐릭터들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수상스키를 탈지 선탠을 할지?’를 물어보는 여자친구를 보며 더이상 그런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도,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의 곁에 있고 싶지도 않다는 생각으로 문득 사막으로 떠나버린 앤소니는 제 발로 정신요양소로 들어간다. 그의 절친 디그넌은 입소와 퇴소가 자유로운 그 요양소로 거창한 탈출 계획을 짜서 찾아간다. 앤소니와 디그넌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들은 시종일관 진지하지만 방식의 진지함에 비해 목적은 터무니없이 허황되어 보는 이를 실소하게 한다. 따분하고 지루한 어른들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으려는 몸부림과 뭔가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며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선에서 끊임없이 일탈을 추구하는 수컷들의 세계는 이후 앤더슨 영화의 근간을 이룬다.

어른/아이 모두 장난꾸러기들

앤더슨의 영화 속 주인공들이 벌이는 소동은 정상성의 범주에서는 벗어나지만 범죄라고 하기에는 너무 순수하다. 좀 많이 심한 ‘장난’이라고 불러야 정확할 듯하다. 그의 주인공들은 어른, 아이를 가리지 않고 장난꾸러기들이다. 맥스 피셔와 허먼 블룸(<맥스군 사랑에 빠지다>)이 여선생을 두고 벌이는 전쟁이나 로얄 테넌바움의 거짓말과 사기 그리고 자식들 마음을 산산조각 내는 부주의한 언행들(<로얄 테넌바움>과 오직 ‘판타스틱 Mr. 폭스’라고 불리고 싶은 마음에서 전 마을을 초토화하게 된 전쟁의 도화선을 그은 Mr. 폭스의 행적들(<판타스틱 Mr. 폭스>)이 모두 그렇다.

십대 소년에서부터 중년 남성 그리고 심지어 여우에 이르기까지 웨스 앤더슨 영화 속 남자 캐릭터들은 너무나 철딱서니가 없어서 여자들을 못 견디게 한다. 그렇지만 진심으로 미워할 수는 없다. 그들은 문명사회에 잘못 던져진 수컷들 같다. Mr. 폭스는 자신의 철없는 행동을 자신이 본질적으로 “야생 동물”이기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로얄 테넌바움이 처자식에 대한 부양의 의무를 던져버리고 떠난 것도 아마 유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들은 사회가 부과해놓은 책무나 규범들을 깨뜨리는 데에서 존재감을 확인한다. 이런 철없는 아버지들 덕분에 아들들은 서둘러 자라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이 유일하게 인정받고 싶은 대상이 바로 그 ‘철없는’ 아버지들이라는 데서 상황적인 모순이 발생한다. 앤더슨의 세계에서 유일한 아버지는 온 힘을 다해 이 세상이 어른에게 부과해놓은 규범들에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버지들이 완벽하게 순수한 동물성을 지향하는 존재들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야생으로 귀환하기에는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취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러쉬모어 사립학교에 다니는 맥스군은 펜싱부, 펜글씨부 등을 비롯한 고급 취미를 추구하는 수십개의 동호회를 창시했으며, 학교 이사장인 허먼은 맥스의 허황된 기획들에 깊이 공감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게다가 허먼은 어찌보면 더 야생적이라 할 수 있는 자기의 친아들들(그들은 뒤에 군사학교에 완벽하게 적응한다)을 늘 경멸한다. 로얄 테넌바움은 20년간 최고급 호텔에 머물면서 변호사를 하며 번 돈을 모조리 탕진했고, Mr. 폭스는 여우동굴에 사는 게 구질구질하다며 쾌적한 주거환경을 위해 널찍한 나무집으로 이사했다.

그래서 앤더슨의 주인공들을 보면 ‘팬시’한 취향의 ‘야생’ 동물 혹은 ‘의욕 넘치는’ ‘홀든 콜필드’(<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같은 형용모순의 단어 조합들이 떠오른다. 그들은 자신 앞에 던져진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산스럽게 계획을 세운다. 그러고는 곧 그 계획들이 실제 삶의 법칙들을 이겨내기에는 휴지 조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에 빠진다. 하지만 자신의 계획에 있어 중요한 것은 목적의 달성이 아니라 계획을 세우며 호들갑을 떠는 것 자체 혹은 그것에 동참하는 동지나 형제간의 애정을 확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것이 그들의 삶을 굴러가게 하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그래서 그들은 또다시 플랜 A, 플랜 B를 외치며 리스트를 만들기 시작한다. 앤더슨 제국에서는 갑상샘 호르몬 이상처럼 보이는 에너지 과잉 상태가 오히려 정상이다.

<바틀 로켓>(1996)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1998)

늘 누군가와 함께 성장한다

웨스 앤더슨은 여덟살 때 겪은 부모의 이혼을 ‘자신과 자기 형제들의 성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꼽는다. <로얄 테넌바움>(2001)과 <다즐링 주식회사>(2007)에는 이같은 그의 가족사가 잘 반영되어 있다. 부모의 이혼은 아이들에게 상처를 남기고 그 이후의 그들의 삶을 지배한다. 왜 아버지/어머니는 우리를 버렸는가?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자기 옆의 형제/누이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웨스 앤더슨의 주인공은 결코 혼자 성장하지 않는다. 늘 누군가와 함께 자란다. 아이들끼리 단단하게 뭉쳐서 자라거나 철들기를 끝내 거부했던 어른과 그 어른 덕에 서둘러 철들어야 했던 아이가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앤더슨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 스스로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내 영화들에서 나는 끊임없이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그러려고 노력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나는 매우 개인적이지만 관객에게는 흥미로운 영화를 만들고 싶다.” 이번에 우리를 찾아온 <문라이즈 킹덤> 역시 그런 그의 소신이 잘 반영되어 있다. 영화는 이전에 우리가 쭉 보아왔던 앤더슨 ‘킹덤’과 새로운 방식으로 닮아 있기 때문이다. <스티븐 지소와의 해저생활>(2004)과 <다즐링 주식회사>를 함께 집필하고 제작했던 로만 코폴라와 함께 각본을 썼고 음악, 미술, 촬영도 모두 그와 여러 번 작업해왔던 감독들에게 맡겼다. 그래서 이야기의 전개와 화면의 대체적인 만듦새는 전형적인 앤더슨 스타일이다. 데뷔작부터 출연뿐 아니라 각본과 제작까지 함께했던 오언, 루크 윌슨 형제를 볼 수 없는 것이 좀 아쉽지만 빌 머레이와 제이슨 슈워츠먼 같은 단골 배우들도 만날 수 있다. 게다가 에드워드 노튼, 브루스 윌리스, 틸다 스윈튼, 프랜시스 맥도먼드 같은 연기파 스타배우들이 대거 왕국의 주민으로 초청되었다.

<로얄 테넌바움>(2001)
<다즐링 주식회사>(2007)

응답하라 1965, <문라이즈 킹덤>에서의 변화

이 영화의 새로움은 이전까지 앤더슨의 영화가 별로 개의치 않았던 구체적인 시공간에서 비롯된다. 미술감독인 제랄드 설리번은 “평소 앤더슨 감독의 대부분의 작품이 가까운 과거이거나 특별한 영화적 시제를 밝히지 않았던 반면에 <문라이즈 킹덤>은 1965년 뉴펜잔스 섬에서 일어났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데서 미술감독의 고민이 시작되었다”고 고백했다. 이 영화의 모든 디테일은 철저한 고증을 통해 구축되었고 미술팀은 전국의 골동품점들을 뒤지거나 지인들의 소품까지 총동원하여 앤더슨의 요구를 맞춰나갔다. 덕분에 이 영화는 등대를 개조해서 만든 비숍의 집이나 보안관 샤프의 트레일러 하우스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빈티지 소품들부터 캐릭터들의 성격을 단숨에 드러내는 복고풍 의상까지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뿐만 아니라 미스터리한 해설자를 통해 소개되는 뉴펜잔스의 명소들 역시 사랑스럽다. 그렇지만 실화도 사극도 아닌 픽션에 이토록 열정을 다해 고증 작업을 펼친 이 영화의 프로덕션 자체가 웨스 앤더슨답다.

<문라이즈 킹덤>은 12살짜리 소년 샘과 소녀 수지가 자신들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캠프장 탈출과 가출을 감행하여 겪는 모험담을 다루고 있다. 까마귀 분장을 한 수지에게 한눈에 반한 샘과 가족과 학교에서 마음 붙일 곳이 없었던 소녀 수지는 편지를 교환하며 사랑의 도피를 기획한다. 부모를 잃고 위탁 가정을 전전하던 샘은 여름방학에 보내진 카키 스카우트에서 캠핑장비를 꼼꼼히 챙겨 도주하고 수지는 동생의 레코드 플레이어와 자신의 ‘완소’ 동화책들을 챙겨 몰래 집을 빠져나온다. 세상에서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둘뿐이라고 믿는 이 어린 커플은 무모하게 치밀하다. 그들의 도주는 각자의 가정에서 아이들이 겪던 소외감과 꼭꼭 숨겨왔던 어른들의 부조리함을 동시에 폭로하는 계기가 된다. 샘이 캠프에 보내진 것은 여름방학 이벤트가 아니라 위탁 가정의 부모들이 그를 버리기 위해 꾸민 일이며 수지의 엄마는 수지와 샘을 수색 중인 보안관과 불륜에 빠져 있다. 카키 스카우트의 대장은 자신을 곤경에 빠뜨린 샘을 비난하기 앞서 샘에게 닥친 미래의 불행에 마음이 아파 안절부절못하고 보안관 샤프와 비숍 부부는 자신들의 관계를 되돌아보게 된다.

웨스 앤더슨 영화의 서사는 큰 줄기보다 잔가지들이 더 매력적이다. 그것은 그의 영화의 서사적 추인이 대체로 ‘동정’(同情)을 계기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며, 치밀하기보다는 충동적이다. 동정심은 단순히 타자를 자기보다 안됐다고 느끼는 게 아니라 타자가 자아와 다르지 않음을 이해하는 데서 온다. 웨스 앤더슨의 주인공들이 불통하다가 소통하게 되는 계기는 모두 타자에 대한 동정 때문이다. 타자의 ‘그럴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그들의 바보스러운 기획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된다.

<판타스틱 Mr. 폭스>(2009)

그리고 타자와 통(通)하다

<문라이즈 킹덤>의 샘과 수지의 모험도 둘의 서로에 대한 동정에서 시작되었다. 부모가 있든 없든 우리는 너무 외로운 존재들이고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통’(通)하게 했다. 그들을 맹렬하게 뒤쫓던 카키 스카우트 대원들이 적극적인 조력자를 자처하게 된 것도 샘이 ‘머리를 까고 뇌를 자를 만큼’ 미운 녀석은 아니며 ‘불쌍한 고아로 자랐다면 좀 밉상일 수도 있지 않은가’라는 데 합의하면서부터이다. 어른들 역시 그들의 사랑을 지켜보며 자신들의 불쌍한 처지- 짝사랑 끝에 홀로 남은 노총각, 끊임없이 상처만 주고받았던 부부관계, 대원 장악력이 제로에 가까운 무능력한 지도자- 를 투사하게 된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외롭고 불쌍한 존재가 아니던가?

앤더슨의 데뷔작 <바틀 로켓>의 주인공 디그넌은 말한다. “세상은 몽상가를 필요로 해.” 어쩌면 이 대사야말로 앤더슨이 자신의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과 스스로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달이 지고 나면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 ‘문라이즈 킹덤’일지라도, 그곳을 꿈꾸고 그 꿈을 단 하룻밤이라도 겪어본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꿈을 꾸지 않는다면 도대체 이 지루하고 단조로운 현실을 무엇으로 견딘단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웨스 앤더슨의 장인 정신으로 꼼꼼하게 기획된 <문라이즈 킹덤>의 허황함은 어떤 현실보다 더 강한 삶의 에너지를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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