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바다를 표류하는 한 남자가 있다. 기름이 떨어진 어선을 타고 대책없이 갑판에 누워 있는 그를 발견한 해경이 소리쳐 묻는다. “당신 대체 누군데 죽은 사람마냥 거기에 누워 있냐”고. 그의 이름은 해갑(海甲)이다. 원래는 독립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감독이었는데 사상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두명의 국정원 요원들에게 감시당하고 있다. 그가 만든 영화 <주민등록증을 찢어라>처럼 해갑은 자신의 주민증을 찢어 없앤 지 오래이며, 지문 날인을 거부해서 경찰서에 억류되기 일쑤고, 강압적 수신료 징수에 반기를 들어서 거실에 있던 TV조차 길바닥에 던져버린 자다. 이 아나키하고 괴팍스런 캐릭터의 옷을 배우 김윤석이 입었다. 그리하여 나긋나긋한 저음의 목소리로 그의 해갑은 이야기한다. ‘배우지도 가지지도 말자’를 가훈으로 삼고, 국가로부터 자신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가장이라 불리기엔 너무나 자유로운 이 남자를 중심으로 5명의 가족이 벌이는 별난 모험기가 이렇게 시작된다. 우아한 외모를 가졌지만 누구보다 의협심 넘치는 아내 봉희(오연수)와 사랑스런 두딸 민주(한예리)와 나래(박사랑), 그리고 똘똘한 아들 나라(백승환)까지 누구 하나 평범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행복하다. 결국 세간을 모두 차압당하고 자급자족이 가능한 남도의 작은 섬으로 떠나기로 결정할 때도 이는 마찬가지다. 그렇게 큰딸을 제외한 네 식구가 남쪽으로 이사를 떠나며 영화는 본격적인 모험담에 돌입한다.
임순례 감독의 여섯 번째 장편 연출작 <남쪽으로 튀어>는 나오키상 수상작가 오쿠다 히데오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김윤석을 포함한 시나리오작가 4명이 각색에 참여했으며, 원작의 배경과 상황 등은 한국 설정에 맞춰 적절하게 변형됐다. 과거 운동권 출신이며 국가의 제도나 관심을 거부하는 아빠 캐릭터 등의 설정은 원작과 흡사하며, 주인공의 시점이나 개개인의 사연 등은 과감히 바뀌거나 생략됐다. 거기에 직접적으로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더해진 것이 이번 각색의 특징이다. 감독의 이전작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처럼 드라마틱한 스토리보다는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에서 느꼈던 인물간 하모니가 빚는 정서적 충동에서 즐거움이 발생되는 풍의 작품이다. 김윤석의 필모그래피 중에선 <완득이>의 동주 선생이 자주 떠오른다. 특유의 느슨하지만 카리스마 있는 연기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만족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언뜻 다른 빛깔일 수 있는 두 개성이 어떻게 조합할 것인가에 따라 관객의 호불호가 갈릴 가능성은 있다.
<남쪽으로 튀어>는 설정에서부터 비극을 전제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끝까지 희극적으로만 마무리되기에 아이러니한 극이다. 사회에 대한 우려감만 표출할 뿐, 좌파지식인으로 설정된 주인공의 캐릭터가 지니는 빈틈도 발견된다. 주민증을 찢거나 경찰에 반항하는 소일 등을 제외하면 레종다지르(행동하는 이성)로서의 자각을 주인공은 잊은 듯 보인다. 그러니 왜 그의 직업을 감독으로 정했는지, 왜 민간인 사찰을 자행하는 요원들이 그를 따라다니는지도 코믹적 요소 외에는 찾기 힘들다. 큰딸을 중심으로 한 에피소드 역시 개연성이 떨어진다. 그러니 아리스토텔레스적 우화를 상상하고 객석에 앉는다면 흡족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디를 살펴도 서스펜스 상태의 비극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해갑이 우리에게 내민 실천이라곤 땅파기의 행위뿐이라고 한다면 너무 박한 평가가 될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부동의 비극이 부재하는, 이상의 우화로만 살핀다면 영화는 충분히 감동적이다. 따뜻한 남쪽의 섬, 그곳에는 형광등이 아닌 촛불이 켜진 방에 네 식구가 다정하게 잠들어 있다. 약간 극단적이지만 절대 비겁하지 않은 이 인물들의 인생은 인간적이면서도 충분히 정의로워 보여서 관객을 행복하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