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수는 그동안 왜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을까. 15년 만에 출연하는 영화인데 왜 좀더 개성있는 캐릭터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첫사랑과 결혼해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삶은 어떨까. 40대 여배우로서의 고민은 뭘까. 꾸준히 드라마로 만나온 배우였기에 신비감보다는 익숙함이 앞섰다. 그런데 정작 오연수는 미지의 이름이었다. 그녀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았다. <남쪽으로 튀어>에서 최해갑의 아내 안봉희 역을 맡은 오연수를 만났다. 다섯 가지 키워드로 배우 오연수를 탐구해보았다.
15년 만의 외출
“예전에 영화할 때는 스포츠지 두세 군데 인터뷰하면 끝이었는데 매체가 이렇게 많아진 것도 놀랍고, 이런 일대일 인터뷰도 새삼스럽다. 마지막으로 영화한 게 98년이었으니까.” 오연수는 장진 감독의 <기막힌 사내들>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 일부러 영화와 담을 쌓은 건 아니었다. 그저 “TV드라마 스케줄 때문에 시간이 맞지 않아”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남쪽으로 튀어>는 이런저런 조건이 잘 맞았다. “최해갑을 서포트하는 인물”인 안봉희는 큰 부담 갖지 않고 영화에 복귀하기에 적절한 캐릭터였다. “김윤석씨에게 슬쩍 묻어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웃음) 오랜만에 하는 영화인데 내가 모든 걸 이끌어가는 건 부담스러우니까. 그런 무리수는 두고 싶지 않았다.” 15년이라는 시간은 오연수가 한때 촉망받는 ‘영화배우’였다는 사실까지 잊게 만들 만큼 길었다. 박중훈과 함께 출연한 <게임의 법칙>에서 오연수는 깡패를 사랑한 죄로 기구한 운명을 살게 되는 태숙을 연기한다. 드라마 <춤추는 가얏고>의 단아한 오연수가 야한 옷을 입고 야한 화장을 한 채 누아르의 세계에 던져졌으니 그야말로 파격 변신이었다. <게임의 법칙>은 오연수에게도 특별한 작품으로 기억된다. “그때 처음 영화의 매력을 느꼈다. 나도 뭔가 좀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슬쩍 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영화라고 하면 <게임의 법칙> 때의 감정이 생각난다.”
합숙
“부대껴도 부대껴도 이렇게 부대낄 수 있을까! (웃음)” <남쪽으로 튀어>의 촬영은 섬에서 세달 가까이 진행됐다.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서로의 얼굴이 확인 가능한 작은 섬”에서 장기간 합숙하며 영화를 찍는 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어딘가 갇혀 있다는 데서 오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있었다. (육지로)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고, 먹고 싶은데 먹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차라리 외국이라면 체념이라도 할 텐데 그러지도 못하고.” 그래도 인간의 뛰어난 적응력을 새삼 확인하며 오연수는 얼굴 찡그리지 않고 ‘부대낌’을 견뎠다. 임순례 감독은 “여배우의 진짜 모습은 보통 분장팀과 의상팀 스탭이 가장 잘 아는데, <남쪽으로 튀어>의 모든 스탭들이 오연수의 털털한 성격에 반했다”고 말했다. “공동작업이지 않나. 섬에서 다 같이 합숙하는데 힘들다고 얼굴 붉히고 있어봤자 서로 피곤한 거고. 여배우 대우받고 싶어 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내가 뭔가 요구한다고 뚝딱 나올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일에 있어선 예민한 편인데 같이 일하는 스탭들, 사람들한테는 관대한 편이다.”
자연미
“영화든 드라마든 예쁘게 나와야 할 때는 정말 예쁘게 차려입고, 재벌집 딸로 나올 땐 정말 화려하게 꾸민다. 하지만 아줌마로 나올 땐, 굳이 예뻐 보여야 할 필요가 없을 땐 모든 걸 내려놓는다.” <남쪽으로 튀어>의 안봉희는 당연히 후자다. 한때 운동권이었고 현재는 세 자녀를 둔 주부 안봉희에겐 명품가방보다는 면가방이, 풀메이크업보다는 노메이크업이 어울릴 거라 생각했다. “오연수가 아닌 안봉희로 보이길 원했다. 내가 못나게 나오는 건 상관없었다. 그래서 화장하지 말자, 머리도 하지 말자, 옷도 안봉희스럽게 입자, 했던 거다.” 오연수는 <남쪽으로 튀어>를 준비하며 살도 찌웠다. 아무도 살을 찌우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다만 “말라깽이 안봉희보다는 적당히 살집 있는 안봉희가 더 푸근하고 현실에 가까운 사람” 같아 보일 거란 생각에 8kg을 찌웠다. “아름답다는 소리는 늘 듣고 싶다. 그런데 예쁘다, 동안이다라는 말은 솔직히 듣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런 수식어는 부담스럽다.” 모든 사람은 공평하게 나이를 먹는다. 그것이 “순리”이기 때문에 오연수는 나이보다 어려 보이려고 애쓰지 않는다. 많은 동료 배우들이 맨 얼굴이 아름다운 배우로 오연수를 꼽는 건 그래서일 거다. 수묵화 같은 오연수의 얼굴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윽해지고 있다.
결혼
“20대 때는 연기에 대한 욕심이 하나도 없었다. 첫 주연작이었던 드라마 <춤추는 가얏고> 때도 오디션에 합격한 뒤에 안 한다고, 못한다고, 자신없다고 도망다녔다. 다들 연기가 하고 싶어 안달인데, 난 좀 이상한 애였다.” 대학 진학을 위해 “MBC 공채 탤런트라는 타이틀을 땄고”, 연기자가 되고 나서는 정작 “연기로 대성해야지, 하는 꿈이 없었다”는 오연수에게 결혼은 일종의 터닝포인트였다. 오연수는 90년대 청춘스타였던 손지창과 6년을 비밀연애한 뒤 1998년에 결혼한다. 스물여덟살 때의 일이다. “남편이 뭘 하든 밥은 안 굶기겠다는 생각에 (결혼)했다. (웃음) 빨리 결혼해서 한 남자의 아내로 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일에서 좀 벗어나고 싶었다. 20대 때는 하루도 안 쉬고 일을 했으니까. 그땐 현장이 즐겁지 않았다. 연기를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했지 연기를 어떻게 해야겠다고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한살 한살 나이를 먹으면서 연기가 재밌어졌다.” 현장의 즐거움과 일을 하는 것에 대한 고마움도 결혼 뒤에 알게 됐다. 연기가 그 무엇의 수단이 되지 않자 온전히 연기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40대
“스무살 때는 내가 마흔이 넘어서까지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때 마흔은 상상도 못할 나이였다.” 스무살의 청춘스타가 어느덧 40대가 되었다. 오연수는 자신의 지난 시간에 책임을 져야 할 때가 됐음을 느낀다고 했다. “나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치가 있을 거잖나. 기대에 못 미치면 안된다는 중압감이 크다. 그래서 새로운 작품 들어갈 때, 첫신 찍을 때까지가 정말 떨린다. 신인 때보다 더 떨린다. 연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연기를 언제까지 하게 될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다만 “스스로 자신감이 떨어졌다고 느낄 땐 연기를 그만두지 않겠냐”고 조심스레 말했다. “나이가 들수록 작품에서의 비중은 줄어들 거다. 역할도 한정될 테고. 하지만 그런 것들에 크게 불만 갖지 않는다.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2월에 방송되는 드라마 <아이리스2>에서도 사실 내 분량은 많지 않다.” 오연수에게 중요한 건 타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아니다. 오연수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은 자기 안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반평생을 배우로 살아오는 동안 그녀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거나 세태에 휩쓸리지 않았던 건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며 순리대로 살아가고자 한 덕분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