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정은채] 나를 연기하고 얻은 용기
2013-03-04
글 : 김성훈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정은채

정은채는 영화 속 해원과 비슷한 옷차림을 한 채로 스튜디오에 들어왔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코트를 걸치고, 청바지를 입은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해원이었다.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앉아 난로를 쬐며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낯선 공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듯 곧장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날 촬영은 정은채의 <씨네21> 첫 표지 촬영이다. 데뷔작 <초능력자>(2010)로 ‘후아유’ 지면에 처음 소개된 뒤 두 번째 출연작 <플레이>(2011)로 ‘액터 앤 액트리스’에 나와 자신의 배우론을 이야기하더니, 네 번째 출연작인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으로 표지까지 점령한 것이다. 표지 촬영이 훌륭한 배우를 가늠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데뷔한 뒤 이토록 짧은 시간 안에 표지를 찍은 건 최근에 그 말고 또 없을 것이다. “첫 표지인 거 알고 왔어요. 사실 예상도 못했던 일이죠.”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 해원 역을 맡은 정은채에게 홍상수 감독과의 첫 번째 여행은 소풍이었을까, 고행이었을까.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보고 해원(정은채)을 안아주고 싶었다. 캐나다로 떠나는 엄마(김자옥)를 붙잡고 싶어 하지만 놓아줄 수밖에 없었으며, 친구들 앞에서 선생님 성준(이선균)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술 먹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다. 형식적이라도 격려 한마디, 작은 관심 한번이 절실했던 해원에게 말이다. 이런 내용의 대화를 한참 나누다 정은채에게 “해원과 다르다면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라고 묻자 그는 잠깐 생각하더니 힘주어 대답한다. “저는 좀더 용기있는 편이에요.”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이 그랬듯이, 정은채 역시 홍상수 감독에게 걸려온 한통의 전화를 받고 나섰다. 원래 정은채는 홍상수 감독의 모든 출연작과 인터뷰 기사를 챙겨볼 정도로 그의 팬이었다고 한다(모든 작품을 좋아하지만 그중 <밤과낮>을 가장 좋아한단다). 압구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홍상수 감독의 첫인상은 아직도 생생하다. “외모와 체구에 비해 너무 다정하고 따뜻했어요.”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면서 어렴풋이 느낀 건 홍상수 감독이 자신과 마음이 잘 통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저보다 훨씬 어른인데도 제 이야기를 잘 들어주셨어요. 영화 작업을 떠나 좋은 사람을 만났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이심전심이라고 했던가. 얼마 지나지 않아 홍상수 감독은 그에게 “시간을 내달라”고 출연 제의를 했고, 그는 곧바로 수락했다. “목표라고 하기엔 거창한 말일지도 몰라요. 언젠가 나이가 들면 홍상수 감독님과 함께 작업하고 싶다는 마음이 언제나 있었어요. 다만, 그 기회가 빨리 왔을 뿐이에요. 결단을 내리는 게 아니라 너무나 감사하게 출연 제안을 받아들인 거예요.”

출연을 결정한 뒤 크랭크인까지 2, 3개월 동안 정은채는 홍상수 감독이 내준 숙제 비슷한 것을 해내야 했다. 숙제라고 해야 거창한 건 아니었다. 홍상수 감독을 자주 만나 술과 커피를 마시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 글을 써서 보내달라는 홍상수 감독의 요청에 일기 같은 글도 써서 보냈다. 그림도 직접 그려 보냈다. 자신의 많은 것들이 영화에, 그리고 해원에 담기겠구나 싶었다. 캐릭터에 대한 설명도, 영화 줄거리도, 별도의 지시도 없었지만 정은채는 홍상수 감독이 해준 말 한마디를 촬영에 임하는 마음가짐으로 삼았다고 한다. “감독님께서 그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좋은 마음으로 건강하게 잘 만나자.” 홍상수 감독과의 작업을 처음 경험하는 그에게 그 말은 신뢰였고, 위로였고, 약속이었다.

촬영현장 역시 그에게 생소함 그 자체였다. 매일 아침 현장에서 대본을 나눠주는 홍상수 감독의 작업 스타일도 처음 겪었다. “정말 따끈따끈한 대본이더라고요. 현장에서 바로 프린트하니까. 조그마한 식당에 앉아 대본을 읽으면서 배우들과 맞춰봤는데 글이 너무 좋았어요. 쏙쏙 들어와요. 이런 글이라면 별도의 준비 없이 현장에서 부딪혀도 되겠구나 하는 자신감도 생겼어요.” 그러나 말로만 듣던 홍상수 감독의 현장을 직접 겪었을 때 처음에는 적응할 수 있는 예열 시간이 필요했다. “첫날은 확신이 없었어요. 어떤 식으로 말과 행동을 해야 할지. 첫 촬영 끝난 뒤 집에 왔는데, 잠이 안 와 밤을 꼬박 샜어요. 그리고 다음날 엄마와 한정식집에서 붙는 신이었는데, 훨씬 여유가 생기더라고요. 이틀째 촬영이 끝난 뒤 감독님에게 잘했다고 칭찬받았어요.” 회차가 거듭될수록 마음이 편해지고, 연기에 대한 부담감이 없어지면서, 정은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용기 또한 쑥쑥 자라나기 시작했다.

첫 촬영이 유독 기억에 남는 건 현장 분위기가 생소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촬영 첫날 북촌의 ‘다정’이라는 식당에서 꾼 해원의 꿈속에서 그가 제인 버킨에게 그녀의 딸인 샬롯 갱스부르처럼 될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겠다고 외치는 장면을 찍었다. 알려진 대로 정은채는 샬롯 갱스부르의 열렬한 팬이다. “그 신은 꿈만 같았어요. 제인 버킨과 정신없이 촬영하다보니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더라고요. 누군가를 안고 난리쳤던 것 같은데. (웃음)” 그 장면은 자신의 애정을 고백할 수 있었던 정은채에게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지만, 영화에서 배우가 또 다른 배우에게 애정을 고백한다는 점에서 관객에게도 무척 흥미로운 장면이다.

자신을 벗고 캐릭터를 입어야 하는 전작들과 달리 자신의 실제 모습이 흥미롭게 반영된다는 점에서 이번 영화는 확실히 달랐다. 그래서 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영화는 제가 다른 인물이 되는 게 아니라 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연기를 해야 했기 때문에 정말 집중해서 연기를 했던 것 같아요.” 자신을 온전히 드러낸다는 게 어떤 면에서는 편할지 모르겠으나 또 어떤 면에서는 낯설고 어색하고 부끄러울 수 있는 작업이다. 그러나 정은채는 그런 작업 방식을 통해 외려 “해방감을 느꼈다”. “너무 좋았어요. 찍으면서도 어떤 군더더기 같은 것들이 하나씩 벗겨지는 느낌이었어요. 가령 엄마와 대화하다가 갑자기 뛰면서 소리지르는 신이 있잖아요. 그걸 하고 돌아오는데 눈물이 확 터졌어요. 감독님께서 그 장면을 쓰진 않았지만 아! 하고 외칠 때 가슴 밑에서 무언가가 올라와서 터지더라고요. 어쩌면 그 감정이야말로 해원의 진짜 감정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약 2주에 걸친 총 7회차의 촬영 기간 동안 정은채는 해원이 되어 서촌의 여기저기를 걸어다녔고, 남한산성도 올랐다. 늘 새로운 공간에 가서 그 공간을 받아들였던 전작과 달리 이번에는 같은 공간이라도 다른 공간에 온 것처럼 달랐다고 한다. “남한산성 신 찍을 때 희한하게 어떤 날은 화창하고, 또 어떤 날은 안개가 자욱했어요. 근데 그 날씨가 해원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어요.” 말로 설명하기 힘든 현장의 마법 같은 순간을 겪은 셈이다. “너무 신기했어요. 성준과 다정히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에는 따스한 햇살이 비쳤어요. 반면 해원이 힘들어하는 순간에는 비가 내렸어요. 저는 많은 것을 이용할 수 있으니까 감사했죠. 자연 상태를 있는 그대로 느끼면 되니까.”

그 점에서 정은채에게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자신과 가장 맞닿아 있는 작품”이다. “나중에 다른 작품을 하게 되더라도 이번 영화처럼 내가 정말 나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시간이 지난 뒤 되돌아보면 이 영화가 일기처럼 ‘그때는 내가 저랬었지’ 하는 생각이 들 것 같아서 기억에 많이 남아요.” 그런 마음이 앞으로 작품을 선택할 때 어떤 영향을 끼칠까. “글쎄요. 이제는 슬슬 다 털어내야죠. 늘 꿈꿀 수는 없어요. 그건 저도 알고 있고. 그냥 이렇게 한편으로 묻어둬야죠. 분명한 건 이 작품을 통해 조금 더, 조금 더 전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전보다는.” 얘기를 들어보니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정은채에게 배우로서 크나큰 용기를 준 작품임이 분명하다. 덕분에 우리는 또 한명의 씩씩한 여배우를 얻었다.

스타일리스트 이지영/어시스턴트 김세희/의상협찬 에잇세컨즈, 랩, 블랙뮤즈, 나인웨스트, 르샵, 제이티아라, 질스튜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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