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조(매튜 매커너헤이)는 경찰이지만 부업으로 청부살인을 한다. 크리스(에밀 허시)는 여동생 도티(주노 템플)와 아버지 안셀, 그리고 새어머니 샬라와 살고 있다. 빚 독촉에 시달리던 크리스는 친어머니가 보험에 든 사실을 알게 되고 친어머니가 죽게 되면 여동생 도티에게 보험금이 지급된다는 얘기를 듣는다. 크리스는 아버지 안셀을 찾아가 그 사실을 얘기한다. 둘은 보험금을 나누기로 합의하고 킬러조에게 살인을 청부한다. 하지만 선불을 요구하는 킬러조에게 줄 돈이 없자 크리스는 일이 끝나면 돈을 주기로 하고 대신 킬러조는 도티를 담보로 삼는다. 도티를 담보로 삼은 킬러조는 도티와 지속적으로 성관계를 가진다.
영화는 상황 설정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아버지와 아들은 돈 때문에 자신의 부인이자 어머니를 죽이고 오빠는 돈 때문에 어린 여동생을 살인청부업자한테 넘긴다. 법을 수호해야 할 경찰은 돈 때문에 청부살인을 부업으로 하고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맺는다. 또 부인은 남편의 전 부인의 애인과 지속적으로 성관계를 가진다. 그들은 법적으로만 가족이지 가족간의 사랑은 발견할 수 없고 아예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도리와 예의마저도 찾아보기 힘들다.
상황 설정이야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문제는 인물들이 그러한 선택과 행동을 하는 데 캐릭터의 고민이나 갈등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친어머니를 죽이거나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가지는 데 대해 죄책감이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인물들은 큰 심리적인 갈등 없이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 어린 도티도 킬러조가 자신의 어머니를 죽일 것을 알면서도 큰 거리낌 없이 성관계를 갖는다. 그들에게는 돈이 중요하지 윤리적인 갈등이나 후회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 중 하나는 그러한 무서움이다. 자본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 대한 무서움. 이 사회는 인간을 어디까지 몰아가고 또 인간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인간은 저러한 ‘동물’인가?
영화는 이러한 화두를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또 영화는 인간 욕망의 모습을 날것으로 그냥 보여주려 한다. 샬라는 성기를 드러낸 채 크리스를 맞이하고, 킬러조는 치킨 다리를 샬라의 입에 넣고 성행위를 흉내낸다. 샬라를 흠씬 두들겨팬 킬러조는 태연하게 가족끼리 식사를 하자며 식탁에 앉고 샬라는 그렇게 맞고도 피를 그냥 물로 씻어내고 식사를 준비한다. 가족은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하고, 킬러조는 도티를 사랑하고 있으며 도티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한다. 체계와 가치에 대한 감독의 이 지독한 반어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이며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를 때론 불편하게, 때론 섬뜩하고 무섭게 캐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