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영객잔]
[신 전영객잔] 또 한번, 이렇게 생이 깨어나다
2013-03-14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꿈으로 현실에 부닥쳐보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처음 본 날, 홍상수의 영화가 20대 여인에게 온전한 시선을 돌렸다는 사실보다 영화 내내 맴돌던 어떤 이상한 기운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영화의 모든 부분이 그 어디에도 붙지 않고 표면을 부유하고 있다는 인상, 그리고 표면이 어떤 기운으로 잠식되거나 포화되고 있는데, 동시에 그 표면에서 뭔가 지워지고 있거나 빠져나가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무언가가 희미하지만 절박하게 드러나고자 애쓰고 있다는 느낌을 잊기 어려웠다. 어딘지 무척 슬프고 외로우며 불안하다, 고 생각했다. 마치 영화 속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정은채)의 처지처럼. 그간 홍상수의 영화를 반복, 차이, 대구, 옴니버스 등과 같은 구조를 빌려 붙잡으려 했다면, 어쩐지 이 영화만큼은 구조와는 다르거나 구조를 넘어서는 방식을 통해서 말해야 하지 않을까, 짐작할 따름이었다.

먼저, 영화의 순서대로 이야기를 살피기

두 번째 볼 때에야 이 영화는 배열에 감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홍상수의 영화에서 배열이 중요하지 않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 대해서 만큼은 배열은 있으나 구조는 여기 없다, 고 말하고 싶어진다. 배열의 합으로서의 구조가 불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구조로 포괄될 수 없는 무언가가 이 배열에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에 근거한 말이지만, 이 배열이 영화 속 세계에 안정된 틀로서의 구조를 정착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 이 영화에서 그 배열은 현실과 꿈의 관계이기도 하고 꿈 자체에서의 활동이기도 하며 꿈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꿈이 이상한 것이다. 꿈 그 자체는 과잉이지만, 그 과잉의 활동이 영화 속 세계에서 무언가를 쳐낸다는 인상이 있고, 이 상반된 감흥의 공존으로 해원의 세계에는 깊은 파토스와 메마른 두려움이 함께 작용하는 것 같다. 그 치열한 과정을 겪으면 결국 무엇이 남는 걸까. 그 끝에서 우리는 무엇을 본 것일까.

언제나 꿈을 소중히 여겨온 홍상수이지만, 해원의 꿈은 그래서 유독 튼튼하면서도 애처롭다. 이를테면 <다른나라에서>에서 안느가 꾸는 꿈, 그리고 안느와 안전요원의 꿈결 같은 순간들은 활동으로 펼쳐지며 미지의 어딘가로 열리는 자유로움을 안긴다. 그 꿈은 청명했다. 하지만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세계는 어쩐지 꿈으로 말려들어가는 것 같거나 꿈과 현실이 서로를 결박하고 있는 것 같다. 직관을 사랑하는 감독의 영화이므로 직관에 근거해서 이렇게 풀어놓고 보니 어수선하고 수수께끼 같은 말들이 되어버렸다. 여하튼 억압된 무의식의 구조 혹은 현실과 분리된 판타지 혹은 현실의 이면으로서의 꿈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 어딘가에 걸려 있으나 현실과 동등한 표면으로서 현실과 기어코 대화하려는 꿈, 그래서 (해원의 말을 빌리자면) “외롭고 슬프다가 무서운” 꿈이 여기 있는데, 신기하게도 그 꿈이 20대 여인 해원을 버티게 한다.

우리는 해원이 쓴 세편의 일기를 보고 있다. 첫날 캐나다로 떠나는 엄마(김자옥)를 기다리다가 해원은 꿈을 꾼다. 그 꿈에 제인 버킨이 등장해서 그녀의 딸을 동경한다는 해원을 다정하고 따뜻하게 안아준다. 꿈에서 깬 해원 앞에 진짜 엄마가 등장하는데, 엄마는 미래의 자유를 생각하며 들떠 있고, 해원은 그런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쓸쓸해하는 것 같다. 그녀는 엄마에 대한 어떤 감정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엄마는 그런 딸이 대견하고 예쁘지만, 둘 사이에는 낯설고 어려운 거리가 느껴진다. 꿈에서 제인 버킨의 딸을 좋아한다고 했지만 실은 제인 버킨과 그녀의 딸의 관계 같은 이상적인 모녀상에 대한 동경이 해원에게 있는 것 같고, 자신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슬픔이 이 꿈을 둘러싸고 있다. 그렇게 엄마가 떠나고 해원은 한때 사귀었던 유부남 교수 성준(이선균)을 만난다. 남자는 여전히 해원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고 해원은 그런 남자의 태도가 서운하다. 둘쨋날, 성준의 연락을 받고 그와 남한산성에 오른 해원은 성준의 못난 질투심 때문에 싸우고 헤어지는데, 그녀가 떠난 다음 성준은 벤치에 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낀다. 이 장면은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날씨의 우연과 남자가 자기가 튼 카세트의 음악 안에서 우는 뒷모습, 그러니까 어딘지 세팅된 상황과 기막히게도 그 순간 지는 노을과 깃발을 펄럭이는 바람, 거기 공존하는 인위와 우연이 이상한 조화를 이루며 일으키는 휘몰아치는 정념 때문에 기묘하고 아득한 꿈결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셋쨋날, 해원은 도서관에 갔다가 친구를 만나 성준과의 관계를 다 털어놓는 꿈을 꾸다 깨서 “미친년”이라고 말하고 엄마와 갔던 서촌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미국에서 교수를 한다는 남자를 만난다. 그 남자는 <북촌방향>에 나왔던 배우 김의성이며, 그는 <북촌방향>에서 여자들에게 했듯, 해원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말해준다. 남자와 헤어지고 해원은 다시 남한산성에 가서 친한 언니 커플을 만나는데, 이들은 놀랍게도 <하하하>에서 커플로 나왔던 연주(예지원)와 유부남 중식(유준상)이다. 때마침 성준이 해원을 만나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오지만, 이들은 또다시 싸우고 남자는 둘쨋날 일기에 등장했던 벤치에 앉아 뒷모습으로 운다. 이번에는 해원이 등장해서 옆에 앉고 둘은 함께 슬퍼하는데, 우리는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명징함과 모호함이 함께 작용하던 셋쨋날의 일기가 모두 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해원의 꿈과 해원의 일기

그러므로 세날의 일기 안에 두번의 꿈(세 번째 일기에 등장하는 도서관에서 깬 장면은 감독의 말에 따르자면 “꿈에서 깬 꿈을 꾼 것”이다)이 있다. 아니, 중요한 것은 꿈이 몇번 나오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 꿈들은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묻는 일이다. 이 꿈들은 현실의 시간으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라, 현실의 직선적 시간을 꿈으로 다시 구부려서 반복하고 변주하고 있다. 해원은, 혹은 영화는 해원의 힘들고 답답하고 외로운 현실을 그렇게 꿈으로 구부리고 압축해서 재감각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꿈들은, 특히 후반부 전체가 할애되는 꿈들은 다시 현재로 빠져나오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 같다.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주는 기이한 기운 때문이기도 하고, 꿈의 장면들이 정한석의 말대로 “꿈이라고 인식할 여지가 없이 현실의 톤과 크게 다르지 않기”(<씨네21> 893호)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현실을 재감각하기 위해 기어코 구부러지는 시공간으로서의 꿈, 그러나 현실로 다시 빠져나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만 같은 꿈, 그러나 현실에 달라붙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꿈. 그래서 이 꿈은 위로가 되는 동시에 두려움을 안긴다. 영화 전체에서 해원이 가장 평화로워 보일 때는 그녀가 엎드려 잠들어 있을 때이지만, 동시에 그 모습은 흡사 영혼이 빠져나간 창백한 존재의 형상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꿈에 더 들어가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건 영화 속 여인의 시간이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여인은 시간축이고 시간의 단일성을 만들어낸다고 클레어 드니는 이미 날카롭게 지적한 적이 있다(<씨네21> 752호). 그리고 허문영은 홍상수의 영화에서 여자는 남자와 달리 시공간의 반복에 갇히지 않는다고 말하며 “남자들의 맴도는 시간, 여자들의 흐르는 시간은 갈수록 뚜렷해지는 홍상수 영화의 또 다른 대구”(<문예중앙> 132호)라고 통찰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해원에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표면적으로 여기서 일기를 쓰며 시간의 흐름을 알리는 자는 해원이므로 그녀가 영화 속 시간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일기 안으로 꿈이 들어와 그 흐르는 시간이 꿈으로 반복되고 있을 때,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새로움은 홍상수가 20대 여자를 이야기 전면에 내세워서가 아니라, 실은 이 여인에게 시간의 흐름과 반복의 자리를 모두 주었다는 데 있는 것 같다. 일기라는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앞으로 나아가는 열린 시간과 그 시간을 접어 만든 반복이라는 폐쇄성이 해원에게 공존한다는 점, 그녀가 일기를 쓰면서 꿈도 꾸는 자라는 점이 그녀를 기이한 존재로 느껴지게 하는 것이다.

이 기이함을 놀라운 감흥으로 전달하는 몇몇 장면들이 있다. 첫 번째 일기 속 해원이 친구들과 성준과의 어색한 술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눈물을 참으며 엄마가 떠나서 슬프다고 말하고 홀로 떠날 때,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이 흐른다. <밤과낮>의 성남(김영호)이 파리의 거리를 쓸쓸하게 그리고 최선을 다해 걸어갈 때 흐르며 성남의 세속적인 우주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행시켰던 바로 그 음악이 해원의 가장 슬픈 이 순간을 적신다. 이 장면이 감동적인 이유는 슬픔을 참으면서도 정직해지려는 해원의 투명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밤과낮>의 그 음악(베토벤 교향곡 7번이 아니라, <밤과낮>의 그 음악으로 부르고 싶다)이 해원의 몸으로 이행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기도 하다. 그 순간은 흐르는 시간의 지표였던 홍상수의 여인이 시간의 축의 자리를 떠나는 순간, 말하자면 몽상하고 방랑하는 여자 산책자의 등장을 알리는 순간이 아닐까, 묻고 싶게 만든다. 또 다른 장면도 있다. 엄마와 함께 공원에 갔다가 엄마 앞에서 미스코리아 걸음걸이를 선보이던 해원이 느닷없이 공원 한쪽에 자리한 거대한 동상 주위를 뛰어 돌면서 “아!” 하고 소리친다. 그 동상은 엄마가 학교에 다닐 때부터 그 자리에 줄곧 그렇게 있었던 불변하는, 그러나 누적된 시간의 형상이다. 그 주위를 뛰어 도는 해원의 행위는 아마도 엄마에 대한 해소되지 않는 어떤 감정의 분출이겠지만, 이 이상한 행위를 보면서 나는 그녀가 시간의 축을 자유롭게 뱅뱅 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두 장면은 무언가를 참고 견디려는 행위에서 나온 것이지만, 여기에는 신기하게도 홍상수의 기존의 여인들의 역할을 벗어던지는 것 같은 해방감이 있다. 남자가 그녀의 집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녀는 기다리지 않고 집을 나서 거리를 걷는다.

마지막 장면의 강렬한 신비로움

흐르는 시간과 반복되는 시간 모두를 붙잡는 여인이 등장했다는 사실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이라는 단어가 내뱉어지고 있다는 점도 지나치기 어려운 변화다. 해원의 엄마가 “사는 건 죽어가는 거야”라고 단정한 어투로 자연스럽게 말을 할 때도 그랬지만, 죽으면 자식, 영화, 기억이 남을 거라는 성준에게 해원이 던지는 말은 조금 무섭다. 나는 아무것도 안 남길 거야. 죽으면 다 끝나, 죽으면 다 돼. 그녀가 도서관에서 잠을 잘 때 곁에 둔 책의 제목은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다. 그 말들의 의미를 곧이곧대로 믿고 듣는 건 홍상수의 영화를 경험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에서 죽음이 이렇게 단호하게 노골적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그의 영화가 삶의 충만함에 이르고자 할 때, 그 충만함을 껴안기 위해서는 어쩔 도리 없이 죽음의 기운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가 죽음이라는 거대한 관념을 이 젊은 여인의 입을 통해 망설임 없이 토해낼 때, 한명의 평자로서 이 영화의 슬프고 불길한 정조를 죽음과 연관해서 읽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런 생각을 전제로 이 영화를 다시 떠올려보면 죽음의 기운이라고 부를 만한 장면들이 있을 것이다. 남한산성이라는 장소에 켜켜이 밴 역사, 같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동상의 응시, 노을과 안개의 불길한 정조, 무엇보다 <하하하>의 연주와 중식이 안개 낀 남한산성에 다시 등장하는 순간. <하하하>의 마지막이 현실로 돌아가지 않고 연주와 중식의 충만한 ‘지금’으로 끝났을 때, 그 순간의 시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과거인지, 현재인지, 미래인지의 문제보다 중요했던 건 그 순간이 바로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한다는 영화적 선택이었고, 그것이 아름다웠다. 그런데 이들이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 해원을 위로하기 위해 같은 이름으로 다시 돌아오자, 영화는 이들의 만남이 7년간 지속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아무리 해원의 꿈에 나온 것일지라도, 그간 홍상수 영화에서는 잘 느끼지 못했던 현실이 묻어나는 시간, 그러니까 퇴색되어가는 시간이 이 커플 위로 내려앉는다. 혹은 그들은 마치 오래전에 죽었다가 유령처럼 해원의 꿈으로, 남한산성의 안개 낀 시간으로 돌아와 부유하고 있는 것 같다. 마음만 먹으면 많은 장면들을 죽음에 닿은 이미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홍상수는 나이가 들었으니 죽음도 생각하게 되는 게 아닐까, 심드렁하게 말했지만, 나는 그 심드렁함 앞에서 문득 망설여졌다. 여기가 아닌 저기 어딘가의 응시, 목소리, 시공간을 대면할 때마다 왜 우리는 고작 죽음이라는 추상에 기댈 수밖에 없을까.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정말 죽음에 기울어진 세계일까. 우리는 그 유혹을 다시 응시하며, 다시 물어야 한다.

남자들의 반복되는 시공간에 시간의 축이 되거나 흐르는 시간으로 등장했던 여인이 이 영화에서 시간의 끝, 죽음, 무(無)를 말할 때, 그러니까 그녀가 그 시간의 축을 무화하거나 흐르는 시간의 더이상 흐르지 않는 지점을 말할 때, 무언가 우리를 충격에 빠뜨리거나 불안하게 만든다면, 그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죽음이라는 관념의 무게 때문은 아닐 것이다. 해원이 두려움을 감추며 단호하게 그렇게 말할 때, 홍상수의 새로운 여인은 그의 영화들이 여인들에게 부여했던 기존의 역할에 저항하고 있거나 혹은 아예 극단적으로 그 시간의 흐름을 쭉 밀고나가 끝을 보는 것 같고, 이 과격함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여인은 죽음을 말하면서까지 왜 새로운 시간의 형식이 되려고 하는 것일까.

여기 한 장면이 있다. 해원의 세 번째 일기의 꿈에서 성준은 다친 얼굴로 해원을 만나러 남한산성에 가지만 해원과 다투고 만다. 그는 두 번째 일기 속의 현실에서처럼 벤치에 앉아 카세트를 틀고 운다. 현실에서는 노을이 지고 있었지만, 꿈에서는 안개로 앞이 꽉 막혀 있다. 현실에서는 해원이 없었지만, 꿈에서는 그곳을 지나가던 해원이 그를 발견하고 옆에 앉는다. 남자는 왜 우리는 사랑하면 안되는 거냐고 서럽게 울다가 “가기 싫어”라고 말한다. 해원은 남자를 다독이며 “조금만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라고 말한다. 이 꿈장면은 앞에서 언급한 현실의 장면을 반복하지만, 날씨의 우연한 차이와 해원의 등장으로 인해 앞 장면과 묘하게 마주 보며 더없이 시네마틱한 리듬의 감흥을 자아낸다. 성준이 울며 “가기 싫어”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이 ‘깨기 싫어’로 들렸고, 그건 달리 말해 ‘반복하고 싶어’의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해원이 그런 성준에게 “조금만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라고 말할 때, 나는 ‘죽으면 다 끝나니까 괜찮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해원의 꿈이기는 하지만, 다른 꿈들에 비해 이 장면만큼은 해원과 남자가 함께 꾸는 꿈처럼 느껴지고, 홍상수의 남자와 여자에게 꿈이라는 것이 다르다면, 어떻게 그러한지를 이 장면 하나로 감각하게 해주는 것 같다.

그에 대해 더 말하기에 앞서, 이 꿈장면에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의 강렬한 신비로움에 대해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에서는 마지막 장면이 바로 그 자리에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전체 영화의 감흥이 달라진다. 마지막의 ‘그’ 장면은 서사적인 필요에 의해, 즉 이야기를 마치기 위해 거기 있는 게 아니라, 영화 전반의 감흥을 확 열어버리거나, 그 감흥과 충돌하며 다른 차원의 감흥으로 전환하기 위해 거기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후자에 가깝다. 우리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야 앞의 장면들이 꿈이었음을 알게 되는데, 그 모든 게 꿈이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더 큰 충격이 있다. 책상에 여전히 엎드린 채 창백한 밀랍인형처럼 잠들어 있는 해원의 정지된 이미지 위로 그녀의 목소리가 날아든다. “꿈에 본 아저씨는 착한 아저씨 같았다.”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이미지와 잠에서 깬 목소리의 충돌,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의 차이, 시제를 알 수 없는 불길한 목소리 때문에 처음에는 해원이 유체이탈을 해서 마치 죽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 장면을 다시 볼 때, 이 단호하고 명징한 목소리와 그 목소리가 말하는 조금은 난데없는 내용에는 앞선 꿈장면의 흔들리는 파토스를 단칼에 잘라내는 차가움이 있고, 그 차가움은 성숙하며, 성준과 불안하게 부유하던 꿈의 순간들을 고마운 아저씨와의 좋은 기억으로 당당하게 응시하려는 씩씩함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꿈이 해원이라는 음악을 지휘하고 있었을지도

그러니 나는 이 마지막 장면에 도달해서야 이 새로운 여인이 시간의 끝을 말하는 것, 죽으면 다 끝나니까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미래를 말하기 위한 것도, 죽음을 말하기 위한 것도 아니라 현재적 감각을 어떻게든 끌어안기 위한 것이라고 느낀다. 성준이 죽어서도 남게 될 자식, 기억, 영화를 이야기할 때나 엄마가 우리 앞날에는 좋은 일만 있을 거라고 해원을 위로할 때, 해원이 외롭게 보인 건 그녀가 붙잡고 싶은 현재의 충만함을 그들은 지금, 그녀와 함께 찾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때, 기쁜 일보다 힘든 일이 더 많은 현실의 흐르는 시간을 반복해서라도 재감각하려는 용감하고 간절한 안간힘이 해원이 꾸는 꿈이다. 하지만 홍상수의 인물들은 늘 꿈을 꾸고 특히 <밤과낮>의 성남도 그랬으니 이 꿈이 뭐가 다른가,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해원의 꿈은 다르다, 고 대답하고 싶다. 성남도, 그리고 이 영화의 성준도, 그러니까 홍상수의 남자들의 꿈은 욕망으로 반복하지만, 해원의 꿈은 소망으로 반복한다. 홍상수와 인터뷰를 하던 중, 그는 이 영화의 꿈이 그녀의 “소망”을 압축해서 보여준다고 말했는데, 나는 그가 욕망이라고 하지 않고 소망이라는 단어를 쓴 게 이상하게도 뭉클하다고 생각했다. 소망과 욕망을 말한다고 해서, 내가 여기서 프로이트와 라캉의 그 복잡한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욕망의 사전적 정의가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이라면 소망은 “어떤 일을 바라는 마음”이라는 차이를 보려고 한다. 만족을 거부하고 장애가 있어야만 그 쾌감이 지속되며, 그래서 좌절과 반복의 운명을 타고난 것이 그들의 욕망이라면, 충만감에 도달하는 데 실패한 순간들을 반복을 통해 다시 느끼고 소중히 품고 싶어 하는 마음이 해원의 소망이다. 어느 쪽이 더 가치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만, 영화가 해원에게 새로운 시간의 모험을 시도하게 하며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은 욕망이 실패하는 과정이 아니라, 소망에의 의지를 탐구하는 과정인 것 같다.

이 영화의 30초 예고편은 90여분간 우리가 본 해원의 세계가 모두 압축되어 있다고 할 만큼 생기롭고 인상적이다. 첫 번째 일기 속의 해원이 공원의 문을 과감하게 열고 들어가자, 성준이 “들어가면 안될 것 같은데”라고 말하며 따라 들어간 다음, 실제 영화에서는 세 번째 일기에 해당하는 해원의 꿈장면이 바로 붙여진다. 김의성이 뭔가에 홀린 듯 열린 그 문으로 들어가면, 공원 구석에 해원이 쭈그리고 앉아 초봄의 추위를 뚫고 피어난 들꽃을 쳐다보고 있고, 그 예쁜 모습을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바라본다. 현실과 꿈이 마술처럼 접촉하는 이 예고편에서 해원은 꿈으로 향하는 문을 과감하게 열고 성큼 들어가는 자이며, 그런 해원의 행위, 그리고 그녀가 작은 꽃 한 포기에 보내는 응시가 바로 이 젊은 여인의 소망이라고 나는 느낀다. 그 소망에는 거짓이 없고 요란함이 없다. 해원을 쳐다보던 그 남자는 해원이 스스로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아파도 끊임없이 부닥치는 용감한 여자라고 일러주었다. 그렇게 부닥치기 위해서는 과한 무언가를 통과해야 하고 부닥치고 나면 쓸데없는 껍데기들이 떨어져나갈 것이다. 이 영화에서 그 과한 무엇이란 꿈인 것 같다. 이렇게 표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해원이 스스로에게 하듯, 지금 꿈으로 현실에 부닥쳐보고 있다. 혹은 반복되는 시간으로 흐르는 시간에 부닥쳐보고 있다. 그러니 마지막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 해원의 목소리가 깨어났으나 그녀의 모습이 여전히 깨어나지 않은 채 영화가 끝날 때 꿈도, 현실도, 삶도, 죽음도 아닌 어느 계에 막혀 있는 것 같은 이 장면은, 해원이 꿈을 꾸는 게 아니라 꿈이 해원을 꾼다는 이상한 표현에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혹은 여기서 우리는 해원이 그녀의 꿈이라는 음악을 지휘하고 있는 줄 알았으나, 어쩌면 꿈이 해원이라는 음악을 지휘하고 있었던 건지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는 기쁨

이 영화를 다시 보고 마지막 장면에 대해 생각에 잠겨 있던 어느 날 저녁, 누군가에게서 시집 한권을 선물받았다. 지금 나는 하필이면 그날, 내 삶에 찾아온 흥미로운 우연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중이다. 별 생각 없이 책장을 들추자, 노년의 작가가 시인의 말에 쓴 문장은 이러했다. “죽어서도 꿈꾸고 싶다.” 해원의 꿈과 거기 깃든 어쩔 수 없는 어둠과 불안한 기운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이 간결하고 단단한 문장 하나가 그녀의 꿈을 다시 느끼게 했다. 그러고보니 이 시집의 표지는 해원의 마지막 장면이 불현듯 끝나고 나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화면을 채우던, 너무 선명해서 무서운 주홍빛과 꼭 같은 색이 아니던가. 죽어서도 꿈꾸겠다는 소망. 물론 죽어본 적 없는 우리에게 이 말은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이 지시하고 있는 방향이 죽음이 아닌 삶이며, 삶의 생기를 시간의 끝이 올 때까지 붙잡고 싶다는 소망이고, 그 소망을 지켜내는 일은 실은 죽음의 두려움과 삶의 고독을 응시하는 일이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다. 그러니 해원의 그 마지막 장면은 죽은 자신을 바라보는 꿈, 혹은 죽어서 꾸는 체념의 꿈이 아니라, 죽어서도 꿈을 꾸겠다는, 그만큼 삶을 껴안고 알고 싶어 하는 젊은 여인의 절실한 소망과 의지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날 저녁, 영화 곁에 온 이 시집의 신기한 우연을 나는 믿기로 한다. 시집의 제목은 <사는 기쁨>(황동규 지음)이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외롭고 슬프다가 무서워지는 시간을 견디고 반복하고 다시 감각하기 위해 애쓰고, 그런 자신을 끈질기게 응시하는 동안 홀로 외롭고 슬프고 무서웠으나, 적어도 죽음에 지지 않았다. 한없이 서글프지만 결국은 죽음에 지지 않는 영화. 홍상수의 열네 번째 영화는 그렇게 또 한번, 또 다르게 생을 깨어나게 한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