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맨살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설인>
2013-03-13
글 : 김지미 (영화평론가)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낳는 일은 자연스런 삶의 과정이라기보다 전 인생을 건 실존적 결단이다. 아이를 낳는 순간 포기해야 하는 기회비용은 산더미고 지출비용은 급증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포기하고 자신의 삶을 선택한다. 그러나 재생산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존재의 지속을 일정 부분 포기하는 것과 같다. 포기로 인해 삶은 풍요로워질 수 있지만 이것이 무엇을 위한 풍요인가라는 회의가 밀려오기도 한다.

<설인>은 아이들과 가족을 둘러싸고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은유적으로 내포한 스릴러물이다. 아내 뱃속의 아이가 달갑지 않은 연수(김태훈)는 실직한 뒤 강원도 산속으로 도망친다. 그곳에서 그는 대학 시절 친구와 함께했던 여행의 기억과 절박한 상황에서 내밀었던 친구의 손을 뿌리쳤던 자신의 과거와 조우한다. 친구는 실종되었고 그 친구와 묵었던 방에는 친구의 딸처럼 보이는 어린 소녀 안나(지우)가 묵고 있다. 같은 층에 투숙한 두명의 젊은 친구 박(아용주)과 조(김종엽)는 수상쩍은 행동으로 연수의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이 넷의 관계는 먹이사슬처럼 얽혀 있다. 자신의 아이를 거부할 수밖에 없는 연수는 친구의 딸(처럼 보이는 안나)을 구함으로써 자신의 선택을 용서받으려 하고 박과 조를 보며 자신과 친구를 상기한다.

이 작품에는 미하일 하네케의 <퍼니 게임>과 코언 형제의 스릴러들을 환기하는 요소들이 많이 눈에 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스토리와 절묘한 타이밍으로 끼어드는 위협이 공포감을 극대화한다. 영화의 주된 배경인 모텔 역시 <샤이닝>의 산장처럼 을씨년스럽고 비현실적인 공포의 풍경을 효과적으로 제공한다. 설산은 신비로울 만치 아름답지만 다리가 푹푹 빠지는 눈길은 몇구의 시신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감출 수 있을 만큼 잔인하게 능청스러워 보인다. 영화는 이러한 공간적 특징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면서 인물과 상황 설정을 최소화한 뒤 상황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데 집중한다. 인물들이 자행하는 폭력은 현실사회로부터 유리된 듯한 공간에서 벌어지지만 그들이 산속으로 도피하게 된 원인은 그 폭력에 사회적 기의들을 덧입힌다.

‘설인’의 부름을 받아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맨살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며 울고 치유받는다는 ‘설인의 시간’ 모티브는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열쇠다. 분절적인 몇 마디의 대사와 불현듯 틈입하는 플래시백을 통해서도 연수의 죄의식과 혼란, 안나의 상실감과 환상 그리고 박의 절망과 분노를 이해하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오프닝 시퀀스에서 제시된 ‘설인’의 상징적 의미다. 전체적으로 배우들의 앙상블이 매우 뛰어난데 특히 감정이 메말라버린 듯하면서도 상대에 대한 조롱과 경멸이 묻어나는 박의 대사톤이 뇌리에 남는다. 그는 아마 올해 가장 인상적인 악역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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