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의 스토리-텔링]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필사적으로 무죄추정의 원칙 고수하기
2013-03-13
글 : 신형철
<더 헌트>에서 기소, 변론, 선고의 순간들

덴마크에서 만들어진 이 지독한 영화를 본 날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아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한줌의 덴마크에 대해 생각했다. 나에게 이 나라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쓴 철학자 키르케고르와 <바베트의 만찬>을 쓴 소설가 이자크 디네센(본명은 카렌 블릭센)의 나라다. 17세기 이래 이 지역에 경건주의(pietism)라 불리는 종파가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 루터 정통파의 교조주의와 관료주의에 반발해 소규모 공동체의 형태로 금욕주의를 고수하고 실천윤리에 헌신하는 것이 그 종파의 지향이라는 것 등은 최근에 새로 알게 됐다. (영화 <바베트의 만찬>(가브리엘 악셀, 1987)을 보면 이 종파가 어떤 무늬의 공동체를 만드는지 얼핏이나마 엿볼 수 있다.) <더 헌트>의 배경이 되는 곳을 저 옛날식 경건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토박이들로 이루어진 이 소규모 마을 공동체는 현대 대도시의 집단적 삶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가족적 유대감과 도덕적 신실함으로 결합돼 있다. 문제는 이것이다. 어디서건 열릴 수 있는 지옥의 문이 하필 그런 곳에서 열릴 때 그 지옥은 가장 끔찍해진다는 것. 이 영화에서 그 문은 기소, 변론, 선고의 단계를 차례로 거치고 난 뒤에도 끝내 닫히지 않는다.

기소-합리적으로 부조리한

이 마을의 평화로운 한때를 보여주는 도입부 장면에서 남자들은 알몸으로 강물에 뛰어든다. 이 지역 공동체의 중심인물인 브룬(늘 모자와 안경을 쓴다), 단순하고 다혈질인 요한(얼굴이 희고 덩치가 크다), 그리고 테오와 루카스. (브룬의 집에 걸려 있는 그들의 유년 시절 사진이 알려주듯이) 그들은 이 마을에서 함께 나고 자랐다. 죽마고우여서 서로의 알몸에 거리낌이 없고, 수없이 뛰어든 강이어서 수심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 중에서 테오와 루카스는 특히 막역한 사이여서 서로 숨길 것도 없고 숨길 수도 없다. 전처와의 관계가 원만하다고 둘러대는 루카스에게 테오는 말한다. “거짓말 티 나. 거짓말을 할 때마다 네 눈이 씰룩거리거든.” (이 대사는 중요한데, 후반부에 나오듯이, 누명을 쓴 루카스가 테오에게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눈밖에 없기 때문이다.) 클라라는 테오의 딸이다.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평을 받고 있고, 경미한 강박증이 있어서 바닥에 그어진 선을 밟지 않고 걸으며, 불편한 상황에서는 입을 씰룩이며 말하는 이 소녀가 하필 아빠의 친구이자 유치원 선생님인 루카스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끼게 되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클라라가 루카스에게 아이답지 않은 애정을 표하자 루카스는 그 소녀를 부드럽게 거절한다. 상처를 입은 이 예민한 소녀는 유치원 원장 선생님에게 루카스가 싫다고 투정을 부리는 와중에 (며칠 전에 그녀의 오빠 친구가 보여준 성인 남성의 성기 사진을 떠올리며) 루카스의 성기를 보았다고 말한다. 이 즉흥적인 거짓말은 이제 마을 전체를 혼란에 빠뜨릴 것이다. 루카스가 클라라를 성추행했다고 판단한 원장은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일련의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다. 아동심리전문가를 불러 클라라를 인터뷰하고, 루카스에게 출근 정지 명령을 내리고, 학부모 회의를 열어 추가 범죄 여부를 조사한다.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마치 ‘거짓기억증후군’(false memory syndrome)의 경우에서처럼, 유치원의 다른 아이들이 자신도 유사한 일을 겪었노라고 제 부모에게 고백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필 멀런의 <프로이트와 거짓기억증후군>에 따르면, 정신치료나 상담을 받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어린 시절의 성추행을 ‘기억’해내는 이 기이한 증상은 1990년대 초반부터 보고되기 시작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루카스가 유치원 원장에게 뒤늦게 항의하지만 누구도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루카스는 이미 아동성범죄자로 확정되었으니 이제는 그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이 영화에 대해 말하는 이들이 흔히 그렇게 하듯이 이것을 그냥 ‘마녀사냥’이라고 부르면 되는 것일까? 아닌 게 아니라 이 영화의 제목은 ‘사냥’이니까 말이다. 루카스는 자기를 믿지 못하는 연인 나디아에게 자신이 “변태”로 보이냐고 묻는다. 그렇다면 이 마을에서 벌어진 일은 ‘변태사냥’인 것인가. 이 두 종류의 사냥에 확실히 공통점이 있기는 하다. 중세 마녀사냥에서 가장 어리석은 것 중의 하나는 그 엉터리 해석학이다. ‘그녀를 불과 물로 테스트해보라. 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은 저 여자가 마녀인지 아닌지를 알려주는 신의 메시지다. 그것을 해석하면 된다.’ 메시지가 불확실하면 해석의 단계에서 많은 것이 결정된다. 신의 메시지는 불확실하므로 해석자인 사제의 권력은 그만큼 막강하다. 비슷한 일이 이 영화에서도 벌어진다. 아이(신)의 메시지는 불분명하므로 그것을 해석할 줄 안다고 간주되는 전문가(사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 아동심리전문가로 짐작되는 남자는 유도 질문(loaded question)을 던지고 클라라의 예스를 끈기있게 유도해낸다. “클라라, 고마워. 지금 내 질문에 아주 잘 대답해주고 있단다.”

해석의 단계에서만큼은 저 두 종류의 사냥이 유사해지기는 하지만 이 공통점이 차이점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중세의 마녀사냥이 ‘광기’의 산물이라면 이 영화의 그것은 ‘이성’의 결과라는 것. 중세의 사제를 비난할 수는 있어도 이 영화의 전문가를 비난할 수는 없다. 후자의 행동은 아동성범죄라는 끔찍한 범죄로부터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아이들에게 또다시 상처를 주는 일을 막기 위해서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최상의 선의와 최선의 지혜를 발휘해 만들어놓은 매뉴얼을 따른 것일 뿐이다. 다른 사건에서라면 이 매뉴얼은 우리의 시행착오를 막아줄 나침반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항의하는 루카스에게 유치원 원장은 말한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자신이 거짓말을 했음을 뒤늦게 실토하는 클라라에게 그녀의 엄마는 말한다. “끔찍했던 기억을 네 무의식이 차단한 거야.” 이런 믿음에는 어떠한 악의도 포함돼 있지 않다. 모두가 차분하게 자신의 이성을 사용한다. 그런데 누구도 잘못하고 있지 않은데, 모든 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 영화에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성의 역설이다. 이 역설을 ‘합리적 부조리’라고 불러야 할까.

변론-자신을 입증하는 진실

그러니까 이것은 광기의 지옥이 아니라 이성의 지옥이다. 이 상황을 그저 마녀사냥이라고만 하면 이 영화가 진정으로 끔찍한 이유를 놓치게 된다. 마녀사냥을 개탄하며 비난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지금은 중세가 아니며 우리에게는 이성이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현대판 마녀사냥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이성을 사용할 줄 모르는 이들의 무지와 몽매를 답답해하며 조롱할 수 있었다. 한 연예인의 학력을 집요하게 문제 삼은 극소수의 네티즌들에게 그랬고, 정치계/문화계 인사들에게 ‘종북’(從北)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다니느라 목하 분주한 우리 시대의 매카시들에게도 그러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우리가 마음껏 비난하고 조롱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명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복장이 터지는’ 종류의 답답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인간들의 집합적 이성이 상황을 최악으로 몰고 가는 ‘합리적 부조리’의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바닥없는 벼랑을 바라보는 막막함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이성은 때로 방황할지언정 끝내 빛의 출구를 찾을 것이라는 신뢰가 무너지고, 그 자리에는, 이성의 오작동은 언제 어느 곳에서든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을 막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는 깨달음이 들어선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궁금해지는 것은 이것이다. 광기의 창궐로 열린 지옥의 문은 이성으로 닫을 수 있지만, 이성의 집단적 사용이 자체의 한계 때문에 열어버린 지옥의 문은 무엇으로 닫을 수 있을 것인가. 루카스는 침착함을 잃지 않으면서 법을 통해 진실을 밝히는 길을 선택한다. 이성의 지옥에 맞설 수 있는 권능도 일단은 이성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자넨 너무 참아서 탈이야.” 루카스를 믿고 돕는 브룬이 이렇게 힐난을 하지만, 루카스로서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버지를 대신해서 아들 마커스가 아버지의 친구들과 클라라를 만나보지만 소용이 없다. “아버지의 죗값을 네가 대신 치를 필요는 없어.” 이 차분한 충고가 알려주고 있듯이,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사건을 처리하는 중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경찰 조사 결과 아이들의 어떤 공통된 진술 중 하나가 사실무근임이 밝혀지면서 루카스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었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이성적 판단으로는 법원의 판결을 납득할 수가 없다. 그래서 돌을 던져 유리창을 박살내고, 가족과도 같은 개를 살해하고, 마트에서는 린치를 가하는 식으로 비로소 비이성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법적 이성의 판단을 신뢰하지 않는 이들을 이제는 무엇으로 설득해야 하나.

크리스마스이브에 루카스는 자신의 집에서 피를 흘리며 앉아 있다. 세상의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가 태어난 날이지만 지금 여기에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루카스는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기로 결심하는데, 그것은 가짜 진실에 포박돼 있는 마을 사람들을 구원하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성탄 예배가 진행되고 있는 마을 교회로 갈 때 루카스는 망가진 안경을 그럭저럭 손봐서 쓰고 가지 않고 그냥 간다. 클라라의 입에서 시작된 거짓말이 수많은 사람들의 입을 거쳐 가짜 진실이 되었고, 루카스가 이에 맞서서 자신을 변론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은 그의 눈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동의할 테지만 루카스가 눈물을 흘리며 테오를 바라보는 장면은 이 영화의 절정이다. 루카스가 테오를 세번 바라보았을 때 시력이 나쁜 루카스의 눈에 테오의 눈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루카스는 테오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테오에게 자신의 눈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내 눈을 봐. 내 눈을 보라고. 뭐가 보여? 뭐가 보이기나 해? 없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그만 괴롭혀.” 루카스의 눈에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진실이 있었다. 다행히 테오는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

신이 아닌 인간의 이성이 과연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던 이 영화는 이제 다른 가능성 하나를 제시한 것처럼 보인다. 진실은 스스로 자신을 증명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 그 능력은 때로 이성의 영역을 뛰어넘어 발현될 수 있다는 것. 그를 통해 인간은 서로를 구원할 수도 있다는 것. 일단은 그렇게 된 것처럼 보인다. 그날 밤 클라라와 테오가 비로소 이런 말을 주고받게 되니까 말이다.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 일어났어요.” “세상은 무수한 악으로 가득하지만 힘을 합쳐 막으면 물리칠 수 있단다.” (사실 이 대사들은 좀 기이하게 들린다. 클라라의 말은 아이답지 않은 문형이어서 마치 다른 누군가가 이 소녀의 입을 빌려 말하는 것 같거니와, 테오의 말도 이 시점에서 적절해 보이지는 않는데, 루카스가 ‘악’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고 해서 이제 와 마을 사람들이 ‘악’으로 지탄받는 것도 자연스럽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석연치 않은 느낌들이 어떤 의도의 산물인지 아니면 번역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생겨난 것인지는 판단하지 못하겠다.) 이 대화 이후 테오는 결심한 듯 루카스를 찾아가 침묵의 화해를 한다. 이제 이 고통스러운 재판은 끝난 것인가.

선고-유죄추정의 원칙

아직 끝나지 않았다. 루카스는 자신을 기소한 클라라를 한번은 다시 만나야 하고, 법원과 무관하게 판결을 내린 이 세계 전체와도 한번은 대면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기회는 루카스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진 그 크리스마스이브로부터 열달이 지난 이듬해 10월14일에 온다. 루카스의 아들 마커스가 사냥허가증을 발급받게 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브룬의 저택에 모두가 모였을 때, 루카스와 클라라는 복도에서 재회한다. 복도에는 촘촘한 선이 그어져 있어서, 언제고 선을 밟지 않고 걸어야만 하는 클라라는 걸음을 떼지 못하고 망연히 서 있다. “난이도가 높구나. 선이 얽히고설켜 있네.” 클라라에게뿐만 아니라 루카스에게도 이것은 ‘난이도가 높은’ 순간이다. 클라라가 그 복도를 지나갈 수 있도록 그녀를 안아 올려도 되는 것일까. 이것은 그 소녀가 자신의 삶의 한 고비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이기도 하고, 루카스가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거쳐야 할 통과의례이기도 할 것이다. 이 쉽지 않은 일을 그는 해낸다. 이제 테오와 클라라와 루카스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듯 보인다. 그러나 세계도 그러할까?

그렇지 않다는 말을 마지막 장면에서 한발의 총성이 대신한다. 사냥터인 숲속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루카스를 겨냥해 총을 쏘았다. (총을 쏜 사람은 누구일까? 물론 이것은 쓸데없는 질문이지만, 이 질문에 굳이 답을 해야 한다면 나는 요한이라고 말할 것이다. 도입부 물놀이 장면에서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친구를 루카스가 도와준다. 그가 요한이다. 루카스가 구해준 요한이 오히려 루카스를 쏘았다는 식으로 생각해보는 것은 이 서사에 아이러니를 부여하기 때문에 해볼 만한 일이다. 또 루카스가 유치원 원장에게 항의하러 갔을 때 그곳에서 원장과 상의를 하고 있다가 루카스를 완력으로 제지하는 것도 요한이고, 루카스의 아들 마커스가 테오의 집을 방문했을 때 마커스와 주먹다짐을 벌인 이도 요한이다. 그는 단순하고 정의롭고 저돌적이다. 테오와 브룬을 제외하면 루카스의 친구들 중에서 이 정도만큼이나 성격을 부여받은 인물은 요한뿐이다. 좋은 이야기는 어떤 인물에게 성격을 부여하느라 투자한 노력을 대개는 회수한다.) 이 총성은 그 총이 발사되기 전까지 이 서사가 쌓아온 일말의 긍정적인 전언마저 모두 날려버릴 만큼 절망적이다. 어째서 그런가.

마을 사람들은 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최후 변론을 통해 사건의 진실은 이제 완전히 밝혀졌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도 저 총성은 아직 재판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제 진실이 무엇인지는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진실 자체가 아무런 힘이 없다는 사실이다. 진실로도 설득할 수 없는 것을 무슨 수로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타인들과 더불어 사는 인간의 삶에서 이것보다 더 절망적인 결론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네가 누구건, 무엇이 진실이건, 그것은 우리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네가 유죄라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어쩔 수 없이 또 카프카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었던가. 인간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기소되기도 한다는 것.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그 재판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면 이것은 시작되는 순간 반드시 질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재판이라는 것. 이것이 그야말로 부조리한 전언들인 이유는 무엇인가. 이 카프카적 세계에는 진실이라는 가치가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도 그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이 영화의 마지막 총성이 알려준다.

무엇을 할 수밖에 없는가

진실이 무력한 세계에서 우리가 피고인의 자리에 서게 되는 비극을 용케 피해간다 하더라도, 자신도 모르게 배심원의 자리에 서서 무고한 자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남는다. 진실에 도달하는 이성의 능력에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면 저 불행한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세상은 무수한 악으로 가득하지만 힘을 합쳐 막으면 물리칠 수 있다.” 테오의 이 말은 그가 루카스의 진실을 알기 이전에 마을 사람들과 모인 자리에서 했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말이다. 그래서 김혜리의 다음과 같은 질문은 정곡을 아프게 찌른다. “이 영화의 관객은 루카스의 아동성추행 혐의가 누명이라는 사실을 안다. (중략) 하지만 만약 소녀와 루카스 사이의 진실을 보여주는 신들을 가리고 영화를 본다면? 우리는 여전히 주민들보다 우월한 자리에 서서 무죄추정의 원칙을 지킬 수 있을까.”(<씨네21> 893호) 어디선가 한 말이지만,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쉽게 ‘유죄추정의 원칙’에 몸을 싣는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라는 속담은 유죄추정의 원칙이 대체로 옳다고 우리를 오도한다는 점에서 혐오스럽다.

비록 이 영화가 비관적이기는 하지만 비관적 결론이 거절하는 것은 낙관이지 희망이 아닐 것이다. 낙관의 논리는 ‘언제나 가능하다’는 것이고 희망의 논리는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진실에 도달하는 일이 언제나 가능하지는 않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 불가능하지 않으므로, 필사적으로 무죄추정의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나는 다시 서사의 힘에 대해 생각한다. 좋은 서사는 언제나 한 인간을 이해하게 만들고, 모든 진정한 이해는 성급한 유죄추정의 원칙을 부끄럽게 만든다. 예컨대 <롤리타>라는 소설을 읽지 않아도 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지만, 그 말은 한 인간을 이해하는 말이 아니라 오해하는 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사내를 이해하는 길은 오로지 그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방법밖에 없다. 제대로 읽기만 한다면 우리는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말을 집어던질 수 있게 될 것이고, 무죄추정의 원칙을 새삼 되새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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