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19일 안타까운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고 박철수 감독의 유작 <생생활활>은 <녹색의자>(2003) 이후 저예산 디지털영화로 맥을 이어온, 성(性)과 영화의 엄숙주의로부터 탈피를 주장했던 박철수 영화들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현대판 <데카메론>’이라는 카피답게 100여분의 상영시간 동안 자그마치 스무개의 에피소드를 선보이는 이 영화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간호사 이야기, 성매매 방지 특별법에 대한 토론, 페티시 산업 종사자와의 인터뷰, 성에 대한 학제간 논의 등을 통해 오늘날 성에 관련된 고정관념과 제도들이 어떻게 비틀리고 억압된 성의식을 창출하는지를 다양한 시각에서 조망한다. <붉은 바캉스 검은 웨딩>에 출연했던 오인혜가 배역을 바꿔가며 때로는 감독의 시선에서, 때로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시선에서 이 천태만상의 이야기 속을 유람한다.
<생생활활>은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어떠한 구심점이나 일관된 맥락 없이 자유분방하게 연결되기 때문에 감독이 오랫동안 천착해온 성 담론에 대한 일종의 ‘소개용 팸플릿’ 같은 느낌을 준다. 은유나 비유를 배제하고 뜻이 명확하게 전달되는 직설화법을 택한 것도 이러한 느낌을 더 강화한다. 매끄러운 이음매나 전체적인 만듦새보다도 기존 성 담론의 허위를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에서 선택한 전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간단명료한 방식이 문제를 깊이있게 생각해보고자 하는 관객에게는 다소 기운 빠지는 겉핥기식 구성처럼 여겨진다. 주변의 평가에 개의치 않고 꿋꿋이 의지를 관철한 감독의 유작이라 가슴 뭉클한 한편, 이제는 영원한 가능성으로만 남겨질 한 영화세계의 진경을 다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