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제시카 채스테인] 미지와의 조우
2013-04-04
글 : 장영엽 (편집장)
<제로 다크 서티> <테이크 쉘터>의 제시카 채스테인

빨간 머리 여배우가 할리우드를 사로잡았다. 두번의 오스카 후보 지명, 한번의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 지난 2년간 10여편의 주목할 만한 영화에 출연…. 그녀의 정체는 <제로 다크 서티>의 히로인, 제시카 채스테인이다. 그녀는 요즘 들어 할리우드에서 가장 자주 들려오는 이름치곤 아직 한국 관객에게 생소한 존재다. 올 3월 개봉한 <제로 다크 서티>, 4월18일 개봉을 앞둔 <테이크 쉘터>를 통해 제시카 채스테인의 매력을 짚어봤다.

유명하지 않은 유명인. 이 어불성설 같은 말이 제시카 채스테인을 설명할 때 필요하다. <제로 다크 서티>의 마야 역으로 올해의 가장 강력한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로 거론되던 그녀에게 무슨 실례냐고? 솔직히 말해보자. <트리 오브 라이프>의 자애로운 어머니, <헬프>의 푼수 새댁, <제로 다크 서티>의 CIA 여성 요원으로부터 제시카 채스테인의 이름을 곧바로 떠올리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들 영화의 후광이 할리우드에서 그녀가 입지를 다지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할 만하다. 오랜 은둔 생활을 마치고 <트리 오브 라이프>로 복귀한 테렌스 맬릭이 선택한 여배우. <헬프>로 2012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라 주목받았고, 바로 그 다음해 캐스린 비글로의 <제로 다크 서티>로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단숨에 미국 영화계의 중심부에 진입한 배우…. 제시카 채스테인에겐 아직 그녀의 존재감을 뒷받침할 다양한 수식어들이 필요하다. 심지어 그녀 스스로도 이렇게 말할 정도다. “사람들은 말할 거다. ‘우린 그녀의 이름도 모르는데, 그녀는 어딜 가나 보여!’”

외모? 여성성? 카리스마?

제시카 채스테인은 어떻게 유명세를 얻기도 전에 유명해졌나. 그보다도, 채스테인의 어떤 매력이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인상적으로 만들었는지가 가장 궁금한 점이다. 외모? 한번 보고 기억할 만한 얼굴은 아니다. 여성성? 로맨틱코미디의 여주인공들처럼 사랑스러운 타입은 절대 아니다. 카리스마? 그녀의 전작들을 보건대 제시카 채스테인은 메릴 스트립처럼 관객을 단번에 휘어잡는 배우는 아니다. 그러나 할리우드에서 여배우 캐스팅의 잣대로 삼는 이러한 기준들에 하나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이 오히려 제시카 채스테인의 장점이다. “그녀는 매 순간 자연스러우며 아름다웠고, 진짜 세계에 딱 들어맞는 배우처럼 보였다. 그건 예쁘기만 한 배우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다. 제시카는 두 세계를 오갈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그건 정말 특별한 능력이다. 잡지 <보그>의 화보 속 그녀는 차가운 스타 여배우 같다. 칸영화제에서 본 그녀도 멋졌다. 하지만 그녀를 오하이오주에 데려다놓아도 멋지게 어울리더라. (중략) ‘미지와의 조우’라고 할까. 그녀는 나에게 그런 느낌으로 다가온다.” <테이크 쉘터>에 그녀를 캐스팅한 감독 제프 니콜스의 말처럼, 제시카 채스테인은 유럽 여배우들이 지녔을 법한 자연스러움으로 어떤 장르의 영화이든 무리없이 자신을 그 안에 녹여낼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니콜스가 채스테인의 그런 장점을 두고 ‘미지와의 조우’라고 표현한 이유는, 아마 그것이야말로 동세대 미국 여배우들이 갖지 못한 어떤 지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할리우드에는 ‘제2의 메릴 스트립’을 꿈꾸는 여배우들이 넘쳐난다. 다시 말해 캐릭터를 뛰어넘어 배우 그 자신의 브랜드로 인지될 만큼 독보적인 연기력을 선보이고자 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시카 채스테인이 걷고 있는 노선은 좀 다르다. 그녀는 캐릭터를 자신만의 것으로 소화해내기보다 자신을 캐릭터에 완전히 흡수시키는 편에 가깝다. 언젠가 배우를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묻는 질문에 채스테인은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나는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때문에 배우로 살아가게 됐다. (중략) 배우로서 나는 살면서 만나보지 못한 수많은 여자들과 교감을 맺어왔다. <언피니시드>의 60년대 모사드 요원 레이첼로 출연하며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한 여자들의 이야기를 읽었고, 나는 이미 그녀들과 이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헬프>의 셀리아 풋은 나에게 삶의 기쁨을 알려줬다. 영화를 마칠 때마다 나는 이 사람들에 대해 더이상 알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 슬프다.”

<제로 다크 서티>

어머니 vs 괴물 vs 암사자

매 작품을 “마스터클래스 듣는 심정으로” 참여하며, 마치 좋아하는 책의 주인공을 대하는 독자의 마음처럼 자신을 지우고 캐릭터에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제시카 채스테인의 백지장 같은 매력은 특히 자신만의 스타일이 확고한 감독들과의 작업에서 빛을 발했다. 이를테면 테렌스 맬릭, 캐스린 비글로 같은 감독들. 제시카 채스테인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대중에게 각인시킨 테렌스 맬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 그녀는 성모 마리아처럼 자애로운 3형제의 어머니, 오브라이언 부인을 연기한다. 배역을 준비하기 위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앉아 몇 시간 동안이나 라파엘의 <마돈나>를 바라보았다는 채스테인은 그야말로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우아하고 시적인 모습으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홀린다. 반면 캐스린 비글로의 영화 <제로 다크 서티>의 ‘빈 라덴 킬러’ 마야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시한폭탄처럼 예민하고 날카롭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국의 엘리트 마초들이 모여 있는 CIA에 합류한 마야는 “이런 일(빈 라덴 암살작전)을 맡기에는 너무 어리지 않아?”라는 남자 상사들의 의혹을 한몸에 받으며 ‘빈 라덴은 거기에 있다’는 자신의 확신을 사수하기 위한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다. 세상의 모든 미덕을 합쳐놓은 것 같은 여자(<트리 오브 라이프>)와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여자(<제로 다크 서티>). 양극단에 위치한 이들 캐릭터를 특유의 예민함과 섬세함으로 조율해나가는 제시카 채스테인의 솜씨는 놀라웠다. 그런 그녀의 개성은 현란한 솜씨의 피아노 독주자 같은 메릴 스트립보다는 현악기 연주자처럼 미세한 진폭까지 잡아낼 줄 아는 배우 줄리언 무어에 더 가까워 보인다(제시카 채스테인이 가장 존경하는 여배우 목록에는 언제나 줄리언 무어가 포함되어 있다. 나머지 배우들은 누구냐고? 이자벨 위페르와 틸다 스윈튼이다).

<테이크 쉘터>

예민함과 섬세함으로

2011년 선댄스와 칸영화제에서 주목받았으나 국내에서는 뒤늦게 소개되는 제프 니콜스의 <테이크 쉘터>에서도 제시카 채스테인은 주연을 맡은 마이클 섀넌 못지않은 연기력을 선보인다. 사실 세계가 멸망할 거란 생각에 사로잡혀 점점 미쳐가는 남자 커티스 (마이클 섀넌)의 아내를 연기한다는 건 배우로서 보여줄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다. “이 영화의 모든 장면에서 내 역할이란 ‘커티스가 왜 저런 이상한 행동을 할까?’라는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장면마다 감정의 수위를 다르게 설정해서 연기해야 했다.” 망상과 환각에 시달리는 남편, 청각장애를 가진 딸과 함께 살아가는 <테이크 쉘터>의 사만다는 채스테인이 역시 아내와 어머니로 분했던 <트리 오브 라이프>의 오브라이언 부인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사만다를 준비하며 채스테인이 떠올렸던 건 ‘암사자’였다. 가부장적인 남편이 자식에게 위협을 가해도 울분을 토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는 <트리 오브 라이프>의 자애로운 어머니와 달리 <테이크 쉘터>의 사만다는 묵시록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방공호를 짓느라 딸의 청각장애 치료비도 날려버린 남편 커티스의 행동을 단호하게 비난한다.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벌일 듯한, 강인한 암사자 같은 채스테인의 엄마 연기가 감독 제프 니콜스의 기분을 흐뭇하게 했음은 물론이다. “그녀는 매우 연약한 존재이면서도 때때로 예민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감정을 잘 다루지 못한다. 하지만 제시카는 다르더라.”

돌이켜보면 제시카 채스테인은 관객보다 감독들이 먼저 그 재능을 알아본 배우였다. 2006년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의 영화화를 준비하며 여배우를 찾던 배우이자 연출가 알 파치노가 가장 먼저 그녀의 재능을 알아봤고, 그가 채스테인을 테렌스 맬릭에게 추천했다. 이후 <테이크 쉘터>를 준비하던 제프 니콜스는 미팅 자리에서 만난 테렌스 맬릭의 “끊이지 않는” 배우 칭찬이 무명의 배우 채스테인을 캐스팅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털어놨다. “세상이 그녀를 낚아채기 전에 내가 먼저 그녀를 캐스팅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알 파치노의 말대로, 이제는 유수의 영화사들이 그녀를 캐스팅하기 위해 안달이 났다. 하지만 할리우드 A급 캐스팅 목록에 올랐다고 해서 채스테인이 지향하고자 하는 연기 노선이 쉽게 바뀔 것 같진 않다. <제로 다크 서티>에 출연하기 위해 <아이언맨3>의 캐스팅을 마다했던 제시카 채스테인의 차기작은 스트린드베리의 희곡을 영화화한 <미스 줄리>다. 그녀가 존경한다던 빨간 머리 여배우들의 뒤를 쫓아, 제시카 채스테인은 반짝이는 스타보다는 품격있는 배우의 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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