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재라는 배우를 아십니까?
2003년 <생산적 활동>(오점균)을 시작으로 <여름, 위를 걷다>(김이다), <동백꽃-떠다니는 섬>(소준문) 등 수십편의 독립 장/단편영화와 상업영화에 조/단역으로 출연하며 독립영화 감독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배우 이응재가 지난 3월15일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항상 따스한 미소와 온화한 성격으로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며 착하게 살았던 그이기에,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온 수십명의 영화계 친구들이 뇌사상태에서 힘겹게 싸우고 있던 그를 응원하기 위해 중환자실 앞을 1주일 동안 밤낮으로 지켰지만 그는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향년 38살로 떠났지만 그가 남긴 따스하고 착한 기운은 그와 함께했던 모든 영화 스탭들에게 결코 잊혀지지 않을 기억으로 고스란히 남을 겁니다.
이응재는 지난해부터 ‘S.O.L. Film’이라는 배우 모임을 만들고, 배우 스스로 연기와 연출을 직접 해보는 의미있는 작업을 하던 중이었고, 죽기 직전까지 한 노동자 가족의 가족사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 속의 노동문제를 조명하는 장편 시나리오를 집필하던 중이었습니다. 10년을 넘게 알고 지냈지만 화내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 없고 허리디스크 외에 지병이 없었던 까닭에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결국 스트레스 이외에는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몇년 전 한 시나리오작가의 죽음으로 인해 영화스탭들의 처우개선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응재가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를 아는 영화동료들은 하나같이 이건 또 하나의 사회적 살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영화 일을 10년 넘게 해도 영화 일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도 없고, 경제적 자립성을 획득할 수 없는 현실을 그저 개인의 능력 부족 문제로만 치부해선 안된다고 생각됩니다. 연기를 하면서도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생계 자체가 불가능한 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자극적인 캐릭터와 사건들이 나오지 않는 독립영화는 상업적인 가치가 없어 투자사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고, 영화진흥위원회나 지역 영상위원회의 독립영화제작 지원제도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제작비는 고스란히 감독 개인이 부담하거나 지인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제대로 된 출연료를 주거나 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수십편의 독립 장/단편영화와 상업영화에서 조/단역으로 출연했지만 그가 영화를 통해 얻은 경제적 수입은 최저임금 수준의 아르바이트로 벌었던 돈의 10분의 1도 안될 겁니다.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조/단역 배우와 스탭들의 노동조건에 대해 영화진흥위원회와 노동부에서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배우 이응재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것은 사실이겠지만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영화를 돈벌이 수단으로밖에 보지 않는 상업영화와는 애초에 잘 어울리지 않는 그였기에. 영화를 통해 본인이 말하고 싶은 메시지가 분명히 있는 영화동지이자 배우였던 그였기에. 그의 영화적 꿈을 아는 지인들은 슬픕니다. 그의 못다 한 꿈을 공유했던 친구들이 아직 건재해 작업하고 있습니다. 그를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에 그를 떠나보내고 나서 없어졌던 불면증이 스멀스멀 살아납니다. 악몽으로 끝내지 않으려면 이제 그와 함께 꿈꿨던 착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의 영화동료들과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가보려 합니다.
배우 이응재의 추모영화제가 4월23일 인디스페이스 극장에서 열립니다(상영시간표는 150쪽 참조-편집자). 그가 출연했거나 연출했던 영화가 상영되고 이후 간단한 추모행사가 있을 예정입니다. 왜 항상 착한 사람들이 먼저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악인들은 승승장구하고, 선인들은 박해받고 고통받는 현실이 너무 가슴 아픕니다. 응재를 보내고 나서 주변의 착해빠진 친구들에게 말합니다. 제발 안에 담아두지만 말고 화 좀 내고 살라고. 당신들은 충분히 화낼 권리가 있다고.
응재야. 지켜주지 못해 형이 참 미안하다. 49재 때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