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했다. 베테랑 프로듀서이자 현 한국영화아카데미 교수인 사람이 무엇이 아쉬워서 영화를 찍는 걸까. 4월18일 개봉하는 영화 <공정사회>로 연출 신고식을 치르는 이지승 감독은 일종의 ‘갑갑함’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성범죄자들의 인권은 보장되지만 피해자의 고통과 상실감은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는 이 기묘한 상황. 누군가는 나서서 그 응어리를 해소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지승 감독은 사비를 털어 마련한 총제작비 5천만원으로 9일 동안 장편영화 한편을 찍어냈다.
-많은 작품에서 프로듀서로 활약했고, 현재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제작총괄 책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영화를 찍는다고 했을 때 주변의 영화인들이 많이 도와주었을 것 같은데.
=알다시피 9일 만에 촬영을 끝냈다. 지인들이 도와주려야 도와줄 새가 없이 뚝딱 완성된 거지. (웃음) 물론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시나리오를 검토할 때 평소 친분있는 영화감독들이 많이 도와줬다.
-그렇게 빡빡한 일정으로 찍으면 분명 무리가 있었을 것 같은데.
=하루에 러닝타임의 8분 정도의 분량을 찍었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보자면 말이 안되는 속도다. 게다가 9회로 장편영화 분량을 찍어내려면 같은 로케이션 장소에 두번 갈 수가 없다. 그래서 같은 배경이 등장하는 영화 속 장면들은 전부 하루 만에 찍었다. 주연을 맡은 장영남이 엄청나게 고생했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잘 나오지 못했을 거다. 물론 스탭들 고생이야 이루 말할 것도 없고.
-9일 동안 5천만원으로 찍었다고 보기에는 화면과 편집에 어색한 이음매가 없다.
=황기석 촬영감독 덕택이다. 황 감독과 나는 뉴욕대(NYU) 동문이고, <통증> 때부터 함께 작업했다. 처음부터 기술적인 부분은 그에게 전부 일임했다. EX3 카메라를 제안한 것도 황 감독이었다. 그 카메라 두대로 황 감독과 윤주완 촬영감독이 동시에 촬영을 진행했다. 명확한 콘티를 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 배우들이 자연스럽게 연기를 하면 카메라 두대가 이를 따라가는 방식이었다. 모든 야외촬영은 핸드헬드와 무조명으로 갔다. 어떤 장면에서는 뒤쪽에 자리한 편의점 불빛을 빌리기도 했다.
-영어 제목이 ‘Azooma’다. 그리고 영화는 아줌마(장영남)가 남자에게 뭔가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에서 시작한다.
=잘 들어보면 ‘아줌마’라는 단어에는 중년 여성을 비하하는 태도가 담겨 있다. 우리가 ‘아줌마’라는 단어를 통해 떠올리는 것들, 유난스럽고 악착같은 중년 여성의 이미지에 대한 선입견을 공격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누가 보더라도 ‘극성스런 대한민국 아줌마’처럼 보이게끔 찍었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그 남자가 딸을 강간한 범인이다.
-법과 제도가 아줌마의 호소에 침묵하자, 흥신소를 통한 납치와 사적인 폭력을 통해 이를 해결한다.
=개인을 외면하는 법과 제도에 직면했을 때,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마침내 범인을 묶어놓고 복수를 하기 전에 아줌마도 그런 말을 한다. “이렇게 쉽게 이 자리에 모일 줄 어떻게 알았겠니.” 그 말에는 ‘뭣하러 그토록 간절하게 법과 제도에 호소했을까. 그냥 흥신소를 이용했으면 됐을걸’ 하는 묘한 뉘앙스가 깔려 있다.
-사회의 부조리를 다룬 영화들이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애초에 이 영화를 통해 겨냥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술에 취해 있었다는 이유로 혹은 정신이상자라는 이유 등으로 성폭행범들에게 말도 안되게 적은 형량이 떨어진다. 개인의 인권도 중요하지만, 피해자들의 고통과 울분은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피해자와 유가족들이 혹시나 이 영화를 본다면 억눌러왔던 감정의 응어리를 풀고 잠시나마 통쾌해 했으면 좋겠다.
-한국영화의 큰 어른인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대표가 아버지다. 아버지가 영화를 보고 뭐라고 하던가.
=자기 자식이 찍은 영화가 아니었다면 분명 한소리 하셨을 것 같은데, 굉장히 덤덤하게 “너 다음 영화도 찍을 수 있겠다”고 하시더라. 시간이 뒤죽박죽인 영화라 이해 못하실까봐 걱정했는데, 역시 전부 다 소화하시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