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4월8일 밤, CGV대학로에서 진행된 영화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이하 <지슬>)의 시네마톡은 오묘한 감정을 채 걷어내지 못한 채로 시작됐다. 삽입곡 <이어도사나>의 구슬픈 가락이 흩어지는 가운데 관객의 표정도 한없이 복잡했다. 이화정 기자가 <지슬>의 관객수를 알리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부산에서 딱 한편만 봐야 한다면 <지슬>을 보라’는 얘기가 있었다. <지슬>을 본 관객이 곧 10만명이 된다. 영화는 먹먹하지만 기분 좋은 결과다.” 부산을 언급한 이유는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프로그래머를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김영진 평론가를 대신해 남동철 프로그래머가 앞으로 시네마톡을 이끌게 됐다.
<지슬>은 1948년 제주에서 일어난 4.3 사건을 다룬 영화다. 제주 도민들은 군인들의 학살을 피해 산속으로 숨는다. 무구한 주민들과 잔혹한 군인들이 대치하는 가운데 평화로운 삶을 관통하는 학살을 비추며 영화는 대범한 방식으로 영적 기운을 전달한다. 영화의 기묘한 분위기에 대해 남동철 프로그래머는 “무시무시한 한편, 굉장히 웃긴 영화라는 점이 뛰어나다”면서 “웃긴 장면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핸드헬드로 길게 진행되는 학살장면이 느닷없다. 실제로 4.3 사건 자체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갑작스러운 일이지 않나. 어쩌면 감독이 그런 해석을 의도한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고 평했다. 이화정 기자가 “장르적인 컨벤션을 따르지 않고, 툭툭 던지는 감정을 조율하지 않는 점도 특이하다”고 하자, 남동철 프로그래머는 “영화 자체가 가진 독특한 리듬이라고 할 수 있겠다”는 말로 이를 정리했다. “상황만 제시할 뿐 사건에 관한 감독의 가치판단이 보이지 않는” 것이 <지슬>의 독창적인 부분이라고 이화정 기자는 덧붙였다.
오멸 감독의 작품에서 배우는 단순한 등장인물을 넘어 그의 세계를 완성하는 강력한 도구로도 기능한다. “인물들이 모두 각각의 역사를 가진다. 물 항아리를 이고 다니는 신병 주정길 역은 여자 스탭이 연기했는데, 현실 속 인물이 아니라 신화에서 나온 것 같다.” 이화정 기자는 “그 배우의 비장한 표정이 무서웠다. 끝에 가서 한건 하겠거니 했는데 역시 중차대한 역할을 맡았더라.” 인물을 말하자니 자파리 필름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제주 고유어로 자파리는 ‘쓸모없는 짓거리’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오멸 감독이 차린 영화제작사 자파리 필름의 식구들은 역할 구분 없이 연출부와 연기를 겸한다. “동고동락하면서 만들어낸 연기여서인지” 리얼한 표현을 보여줬다는 남동철 프로그래머의 말에 이화정 기자는 “실제로 48년 당대의 사람같이 보인다”고 맞장구를 쳤다.
해외 영화제 일정으로 오멸 감독으로부터 상세한 제작기는 들을 수 없었지만, <지슬>에 관한 다양한 의견을 청취할 수 있는 자리였다는 점에서 알찬 시간이었다. 첫 시네마톡을 마친 남동철 프로그래머의 소감을 들으며 자리는 정리됐다. “좋은 영화를 보면 영화가 말을 걸어온다. 그 말을 나누고 싶어서 시네마톡 행사를 갖는 것 같다. <지슬>은 할 얘기가 더 많은 영화이니 다시 봐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