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태엽 감는 영화
2013-04-26
글 : 김혜리

▲<씨네21>이 창간한 해. 아무것도 모르고 취재하러 간 칸영화제에서 정신을 추스르려 책방에 들어갔다가, 칸에 관한 로저 에버트의 에세이 <한낮의 태양 아래서 2주일>(Two Weeks in the Midday Sun)을 집었다. 저자 사인회라도 했는지 친필서명도 있다. 에버트는 이 책의 삽화도 직접 그렸는데, 당시 평론가들 사이에 유행했던 조명 들어오는 펜을 향한 울화통이 정겹다.

3/12

부모님 결혼기념일에 공교롭게도 <안나 카레니나> 시사를 놓치고 <호프 스프링즈> 시사에 출석했다는 사실에 의미를 부여해볼까 했으나, 역시 억지스러워서 그만두기로 한다. 세 자녀를 다 키워 독립시킨 결혼 30년차 케이(메릴 스트립)는 결혼의 낭만을 회복하고자 시도하지만 남편 아놀드(토미 리 존스)의 반응은 한마디로 “이 여편네가 뭘 새삼스럽게!”다. 케이는 온화하지만 결코 물렁한 여자가 아니다. 극히 비협조적인 남편을 한사코 카운슬링 여행에 끌고 가는 그녀에게 결혼 재활 프로젝트는 무료함을 죽이려는 가벼운 변덕이 아니라 인생의 성패를 건 마지막 기회다. “아이가 태어나면 달라지겠거니, 그러다 애들이 다 자라고 나면 달라지겠거니 계속 기다렸어. 그런데 이젠 뭘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어. 난 아직도 행복을 원하는데… 이게 전부는 아니라고 말해줘.” 케이는 절박하고, 메릴 스트립이 자칫 푸념으로 들릴 그 절박함을 우리에게 설득한다.

연기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호프 스프링즈>는 한 모금씩 아껴서 음미하고 싶은 듀엣이다. 데이비드 프랭클 감독은 거울 앞에서 밤 화장을 하며 주저하는 메릴 스트립의 모습으로 영화를 시작하는데, 대사가 없는 몇분의 무언극만으로 관객은 그녀가 지금 무엇을 바라고 두려워하는지부터 영화의 주제와 톤까지 파악할 수 있다. 장면은 이미 오래 각방을 써온 남편과 아내의 어색한 대화로 옮겨간다. “왜? 뭐 잘못됐어?” “아니, 난 그냥…” 같은 짤막한 대사 1할과 9할의 머뭇거림으로 구성된 간단한 신에 네댓 차례 웃음이 터지고 두어번 찡하다. <호프 스프링즈>는 결코 대사가 적은 영화가 아닌데도, 토미 리 존스와 메릴 스트립의 보디랭귀지는 대사보다 2배쯤 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두 배우는 30년을 한지붕 아래서 산 남녀가, 자기들끼리 있는 공간에서, 또는 남들 앞에 섰을 경우에 어떤 몸짓으로 감정을 드러내거나 감추는지 꿰뚫고 있다. 말보다 말 사이의 쉼표가 중요하다. 결혼 카운슬러(스티브 카렐)의 사무실 소파에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자세와 미세하게 변하는 간격, 억지로라도 잠자리에서 일단 포옹을 해보라는 지시를 받고 어색하게 팔을 얽는 엇박자를 보고 있으면 ‘무용’이라는 표현이 차라리 적절해 보인다. 이 자연스런 호흡의 2인무에 감상적인 음악이 돕는답시고 끼어들 때 나도 모르게 “쉿!” 하고 구박할 뻔했다. 이래서 배우는 부러운 직업이다. 그들은 여타 직업군처럼 그저 같은 일에 원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이 먹음으로써 젊은 시절 못 가본 새로운 땅으로 전진할 수 있다.

3/13

영화에서는 예상이 빗나가 터지는 웃음이 있는가 하면 현실에서 익숙한 상황이 너무 생생히 재연돼 파안대소하는 경우가 있다. 코미디로서 <호프 스프링즈>는 후자다. 20년쯤 부모의 결혼생활을 지켜보아온 자녀들이라면 이 영화의 몇 장면에 기시감을 느낄 것이다. 노년에 접어든 주인공 부부의 현실은 윤택한 중산층이지만 그러기까지 긴 세월 절약하며 살았다. 그래서 여유를 부리는 데에 익숙지 않다. 아내의 생일에 가전제품을 선물하고, 밖에선 점잔을 빼다가 부부끼리 외식만 하면 이것도 저것도 바가지라고 트집을 잡는 아놀드는 어디서 많이 본 남자다. 아놀드와 케이는 여행지 물가가 부담스러워 급기야 슈퍼마켓에서 장을 봐서 모텔에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데 이 광경이 재미있다. 모텔 방에서도 남편은 소파에 앉아 TV에 몰두하고 아내는 등 뒤에서 TV를 힐끗거리며 샌드위치를 만든다. 배경만 바뀌었지 집에서의 구도와 똑같다! 30년을 산 커플은 싸움하는 호흡도 다르다. 상담자 앞에서 남편과 첨예한 신경전을 벌이던 케이는, 아놀드가 귀에 못이 박힌 논리와 말투로 고집을 피우자, 격앙된 와중에도 피식 웃어버린다. 그것은 상대를 무시하는 냉소가 아니라 “아이고 쟤 또 저런다!” 하는 순수한 실소인데, 이처럼 갈등의 본론으로부터 떨어져 남아도는 몇몇 순간이 <호프 스프링즈>를 다른 로맨틱코미디와 차별화한다.

3/15

픽사에서 근무했던 스토리보드 아티스트 에마 코츠가, 전 직장의 ‘스토리텔링 22개 법칙’을 공개했다. 내용을 접한 <뉴요커>의 평론가 리처드 브로디는 ‘제조된 스토리에 관한 불평’(The Problem with Processed Storytelling)이라는 비판적 칼럼을 썼다. 브로디가 편 논지와는 별개로, 픽사에서 통용된다는 22개 규칙 중 하나가 솔깃했다. “당신이 싫어하는 영화의 요소들을 분리한 다음, 마음에 드는 구조물로 재조립해봐라.” 오, 그럴듯하다. 어디 시험해볼까? 예컨대 <300>을 해체해보자. 그러니까 ‘스파르타!’를 외치는 근육질 사나이라든가, 사나이라든가, 사나이라든가…. 안되겠다. 나야말로 뇌가 아닌 근육으로 이 영화를 봤나보다. 재조립하려면 복습부터 해야겠다.

3/22

<홀리모터스>의 첫 시퀀스는, 침대에서 스르륵 일어나 벽처럼 보이는 문을 열어젖히는 레오스 카락스 감독 본인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문은 영화관으로 통하는데 객석은 유령처럼 얼어붙은 관객으로 가득 차 있다. 살아 움직이는 것은 카락스와 스크린의 이미지뿐이다. 그리고 영화는 오스카(드니 라방)의 하루로 넘어간다. 오스카는 정체불명의 점조직에서 활동하는 일종의 배우다. 그는 24시간 동안 파리 시내를 돌아다니며 아홉명의 인물이 되어 (영화적) 장면을 연기한다. 모든 정황이 가리키듯, <홀리모터스>는 영화와 연기의 본성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영화에 관한 영화는 아주 많았고, 배우의 본성을 탐색한 영화도 적지 않았지만 <홀리모터스>는 장르까지 순회한다. 가족드라마, 한국영화 스타일의 복수극, <셸부르의 우산>풍의 뮤지컬, <노틀담의 꼽추>, 모션 캡처 CG 판타지 등을 돌아 급기야 픽사의 <카>까지 건드리는 걸 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장편영화를 연출하지 못했던 13년 동안 쌓인 갈증을 한번에 해소라도 하듯 레오스 카락스는 휘몰아친다. 벌컥벌컥 영화를 마시고 다시 토해놓는다. <홀리모터스>의 카락스는 난생처음 메가폰을 쥔 신인, 아니면 죽을 날을 통보받고 유작을 찍는 노장 같다.

그래서일까? 이 위풍당당하게 아름다운 영화가 남기는 감정은 뜻밖에도 애잔함이다. <홀리모터스>는 죽음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극중에서 관계자로부터 “당신의 능력을 이젠 못 믿겠다”는 말을 듣자 오스카는 좀 뜬금없이 대꾸한다. “예전에는 카메라가 육중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머리통보다 작아지더니 이제는 보이지도 않는다.” 반면 오스카는 영화에서 자신을 살해하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난다. 영화는 쇠약해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세계는 강고하고 우리의 수명은 질기다. 그리하여, 레오스 카락스가 몸을 의탁하는 것은 세계가 곧 시네마라는 명제다. ‘홀리모터스’(holy motors)는 세속을 누비는 자동차/무비인 동시에, 세계를 태엽 감는 내연기관이라고 그는 결론짓는다. 이것은 아전인수가 아니라 한 호모 시네마쿠스의 통찰이다. 그리고 그 통찰은 필사적이다. <홀리모터스>는 너무나 의미심장한 나머지, 절박하고 고단한 영화다. 그래서 마지막에 이르면, 무릎에 머리를 누이고 자장가를 불러주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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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블리비언>의 드론

<오블리비언>이 잘 디자인된 SF라는 데엔 큰 이견이 없을 터다. 주인공의 직업과 프로덕션 디자인에는 <월·Ⓔ>의 그림자도 스친다. ‘드론’은 그중에서도 인상적 외양과 활약을 보이는 순찰 로봇이다. 구체의 몸통과 데굴거리는 안구가 귀엽다. 포로처럼 사지(?)가 묶인 장면에서는 딱한 마음도 든다. 위협적 존재인데도 ‘동글이’라고 만만하게 부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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