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버라 스탠윅은 ‘나쁜 여자’다. 빌리 와일더의 <이중배상>(1944)에서 보인 독한 여성의 이미지가 워낙 강렬했다. 돈을 위해 남편과 애인을 이중으로 배신하는 금발의 요부로 나와 남자들의 순진한 환상을 무참하게 깼다. 나이 많고 돈 많은 남편이 집을 비웠을 때, 젊은 안주인과의 스릴있는 모험이라는 남성의 백일몽은 결과적으로 목숨을 요구하는 메두사의 공포였다. 스탠윅이 연기한 필리스라는 여성은 방금 전 샤워한 젖은 금발에, 몸에 끼는 치마를 입고, 발찌 낀 다리를 까닥거리며 처음 본 세일즈맨을 유혹하는 태도로, 필름 누아르 시대의 못된 요부의 전형으로 각인됐다.
‘나쁜 여자’를 누가 발명했나
‘못된 여성’ 스탠윅의 이미지는 프랭크 카프라의 발명품이다. 사운드 시대의 도래를 맞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배우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스탠윅은 브로드웨이의 댄스걸 경력밖에 없었지만 발성을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선배 배우들의 빈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스탠윅의 허스키한 목소리에서 관능과 타락을, 그리고 금발에 가는 눈매를 가진 인상에서 강인함을 읽고, 주연으로까지 발탁한 감독이 카프라다.
첫 주연작 <한가한 여성들>(Ladies of Leisure, 1930)부터 스탠윅은 나빴다. 파티걸(부자들의 파티에서 춤추는 여성)로 나오는 스탠윅은 제멋대로 살아온 처녀의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카프라의 계몽주의적 드라마들이 늘 그렇듯, 이런 못된 여성의 마음엔 사실 누구보다 맑은 양심이 숨어 있다. 카프라는 도덕적 타락을 개인의 책임으로 묻기보다는 공황 같은 시대적 상황에서 찾는 사회파다. 못된 여성도 어쩔 수 없이 양심을 잊었다고 믿는다. 결국 그녀는 구원되는데, 구원자는 남성이며, 그는 양심을 잃지 않은 정직한 남자라는 건 카프라 드라마의 공식이다. 카프라와의 협업으로 스탠윅은 이중적인 스타 이미지를 갖게 됐다. 곧 겉보기에는 못된 여성이지만, 내부에는 더없이 맑은 양심이 숨어 있는 인물이다. 그래야 남자들 마음이 편한 것 아닌가.
카프라는 스탠윅과 작업하며 컬럼비아영화사의 독보적인 감독이 된다. 상대적으로 소규모였던 컬럼비아는 당시에 B급영화들을 주로 제작했는데, 카프라의 작품을 통해 메이저 스튜디오로 도약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한편 컬럼비아처럼 소규모 스튜디오였던 워너브러더스는 더욱 과감한 제작으로 관객의 주목을 끌고자 했다. 곧 ‘섹스와 폭력’이었고, 이때 동원된 배우도 바버라 스탠윅이었다. 스탠윅의 요부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운 감독은 <공공의 적>(The Public Enemy, 1931)으로 갱스터 장르의 전환점을 가져왔던 윌리엄 웰먼이다. 워너브러더스의 범죄영화 시리즈의 포문을 연 <야간 간호사>(Night Nurse, 1931)에 스탠윅을 주연으로 발탁했다.
당시는 아직 자체 검열제도인 제작규약(Production Code)이 만들어지기 전이고, 속칭 ‘Pre-Code 시기’(규약 이전 시기)에 워너브러더스는 범죄영화와 여배우의 관능을 내세워 스튜디오의 브랜드를 세워나갔다. 지금 제목을 보면 무슨 포르노영화 같은 것들, 예를 들어 <야간 간호사>, <아주 큰!>(So Big!, 1932), <아기 얼굴>(Baby Face, 1933), <그들이 수군대는 여자들>(Ladies They Talk About, 1933) 같은 ‘못된’ 영화들을 연이어 쏟아냈다. 여기서의 주인공은 단연 바버라 스탠윅이다. 웰먼 감독의 <야간 간호사>에서 스탠윅은 알몸이 거의 다 드러나는 속옷을 입고 등장하여 단번에 관객의 주목을 끌었다. <아기 얼굴>에선 성공과 부를 위해 거리낌없이 섹스를 이용하는 뻔뻔한 여성을 연기했고, 결국 이 작품의 영향으로 제작규정이 1934년에 예정보다 빨리 만들어졌다. <그들이 수군대는 여자들>의 광고 카피는 스탠윅의 스타 이미지를 정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남자들은 아름답다(Beautiful)고, 여성들은 나쁘다(Bad)고, 경찰들은 위험하다(Dangerous)고 말한다. 당신은 멋있다(Wonderful)고 말할 것이다.”
나쁜 여자에서 독립 여성으로
스탠윅은 훗날 거장이 되는 카프라와 웰먼이라는 두 감독을 만나며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카프라가 악녀와 성녀라는 이중성을 이용하며, 구원자 남성을 통해 미국의 전통적인 가치를 옹호했다면, 웰먼은 스탠윅의 공격적이고 성적으로 방종한 이미지를 노골적으로 우려먹은 셈이다. 순결의식을 무시하는, 그래서 종종 헤픈 이미지의 스탠윅은 남성 관객에겐 은밀한 판타지의 대상이었다. 결과적으로 범죄와 관련된 여성의 이미지가 강한 탓에 스탠윅의 사적인 삶에 대한 팬들의 관심도 증폭됐는데, 스튜디오가 방어한 전략은 ‘현모양처’였다. 스크린에선 악녀이지만, 실제로는 전통적인 여성이라는 것이다.
여성 스타에 대한 사회적 억압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인데, 스탠윅도 “가족과 함께 집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말을 수시로 해야 했다. 그런데 제작규정이 만들어진 뒤, 다시 말해 ‘섹스, 폭력, 마약’에 대한 특별한 감시가 시작된 뒤, 스탠윅의 악녀 이미지는 역설적으로 더 큰 인기를 끌었다. 외부의 검열이 있자, 오히려 제도 검열을 위협하는 이미지를 가진 스탠윅은 더 사랑받았다. 이유는 나쁜 여자이기보다는 제도에 반항적인, 혹은 남자들을 압도하는 새로운 여성으로 수용됐기 때문이다. 스탠윅 자신도 더이상 현모양처인 척하지 않고, 아버지뻘 되는 첫 남편과 이혼한 뒤, 특히 여성들에게 “사랑을 위해 경력을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활기차게 전달했다.
바버라 스탠윅은 결국 악녀이기보다는 독립적이고 강한 여성의 전형으로 수용됐다. 남자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으니 악녀 이미지가 강해 보였다는 것이다. 이미지의 변화가 있은 뒤, 스탠윅은 킹 비더의 <스텔라 댈러스>(Stella Dallas, 1937), 하워드 혹스의 <교수와 미녀>(Ball of Fire, 1941), 프랭크 카프라의 <존 도를 만나요>(Meet John Doe, 1941) 같은 독립적인 여성 이미지가 강조된 작품들로 영화사에 남게 됐다. <이중배상>의 필리스는 할리우드 최고의 악녀인데,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스탠윅이 스타덤에 머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시대를 대변하는 독립적인 여성이라는 새로운 이미지 덕분이었다. 게다가 남성들은 더욱 독해진 그녀의 위험한 유혹에 여전히 스릴을 느꼈다. 결과적으로 남성들은 그녀와의 나쁜 로맨스를, 여성들은 그녀처럼 위험한 여성을 꿈꿨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