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당신은, 뭘 어쩌겠다고 살고 있소? <매그놀리아>
2002-02-06

영화를 참 좋아했다. 대학생 때는 영화서클도 만들고 작지만 영화적 운치가 있었던 8mm필름으로 단편영화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굳이 구하기 어렵다는, 이른바 컬트영화 비디오들을 모으기도 했다. 그리고 내 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울렁임들이 동요했던 많은 영화들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몇년 새 나는 점점 영화가 재미없어지고 있다. 기껏해야 킬링타임용으로 ‘극장개봉 화제작’ 비디오나 대여하고 있다. 그리고 “저 이거 제가 본 건지 확인 좀 해주실래요?” 하고 점원에게 조회를 부탁하기 일쑤이다. 그나마도 끝까지 못보고 대체로 잠들어버리거나 설령 끝까지 본 영화도 가슴에 남긴커녕 단 하루만 지나도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피곤하다. 보잘것없는 내 삶일지라도 그것이 현실인 이상 그 어떤 영화보다도 치열하다. 영화란 게 어차피 픽션인데 리얼리티를 주장하는 편이나 정말 가당치도 않게 예술이랍시고 똥을 된장이라고 우기며 먹이려드는 영화는 더욱더 머리와 가슴을 피곤하게 한다. 그래서 점점 영화가 재미없고 기억하지도 못하나보다.

대부분의 인생은 고단하고 지리멸렬하다. 영화는 사건-발단-전개-결말로 이루어지지만 인생이란 결말이 없다. 사건과 갈등이 끊임없이 얽히고 꼬이다가 필름이 끊어지듯 갑자기 끝나버리는 것이 인생이다. 이것을 운명이라고 해야 할지 인간의 한계라고 해야 할지 내 인생의 스토리는 도무지 뜻대로 흘러가주지 않는다. 어떻게든 자신이 설정한 시나리오대로 스토리를 끌고 가보려고 애쓰지만, 상영시간 70년에 달하는 인생극장 대하드라마는 정전사고처럼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다.

당신은 원하는 만큼 사랑하였는가? 돈은 이제 다 벌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청춘에 가졌던 꿈은 정말로 다 잊었는가? 행복한가? 해피엔딩이란 무엇인가? 당신은 왜 사는가? 왜 그렇게 사는가? 원한다면, 이런 유의 질문은 200개 정도 더 해줄 수도 있다. 삶이란 게 회환과 난처함과 갈등과 난데없음의 짬뽕반죽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보라. 이 난처한 질문들이 당신을 다그치는 사이- 기적인지, 재앙인지, 해답인지, 화두인지 대체 원인도, 의도도 모른 채 개구리우박이 쏟아진다. 하늘에서 황소개구리가 우박처럼 쏟아진단 말이다. 왜? 질문은 이미 너무 많았다. <매그놀리아>에서는 고맙게도 개구리우박이 쏟아지는 장면을 한참 보여준다. 슬로모션으로도 보여주고 다각도로 앵글을 잡아 보여준다. 주의깊게 보면 개구리들의 표정도 관찰할 수 있다. 죽어 나자빠지는 것도 저마다 운명에 따라 가지각색이다.

나는 <매그놀리아>로 내 인생 가장 리얼한 영화를 만났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 역력한 개구리들이 너무나 많이 떨어진다. 자세히 보니 거기에는 교수님도 있고 국회의원도 있고 아랫집 밥집아줌마도 있고 오래된 동창생들도 있다. 떨어지고 있다. 던져지고 있다. 내팽개쳐지고 있다. 날고 있다. 죽어가고 있다. 그 밑도 끝도 없는 ‘던져진 상황’ 속에 온갖 인종들과 함께 나도, 내 아내도, 우리 부모님도, 처음 보는 아저씨도, 정수기 외판원도 내 던져지는데 그 풍경은 눈물나게 경이롭다.

인생이란 게 얼마나 지리멸렬한 것인가를 갓 눈치채기 시작해서 대부분 영화의 상투적 드라마가 시시껄렁해질 때쯤엔 이런 영화가 최고로 인상에 남을 수도 있다. 영화 <매그놀리아>는 허구가 하나도 없다. 가장 거짓말 같은 순간이 가장 사실적이기 때문이다. 그 현실감은 속상하고 가슴아프고 후련하고 통쾌하다. 탁월하다.

‘영화를 그런 식으로 끝내서 대체 뭘 어쩌겠다는 것이냐’라고 묻고 싶다면 당신은 대체 뭘 어쩌겠다고 살고 있는지 먼저 대답해보시라.

글: 김형태/ 황신혜밴드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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