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의 날씨]
[영하의 날씨] 그녀처럼 나도 매혹당하고 싶었으나
2013-05-03
글 : 김영하 (소설가)
일러스트레이션 : 김현영 (일러스트레이션)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보며 소설과 영화를 생각하다

작가들은 <안나 카레니나>를 좋아한다. 과거에도 그랬겠지만 요즘 들어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워싱턴 포스트>가 2007년 미국 작가들을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안나 카레니나>가 1위였다. 2위는 <마담 보바리>, <롤리타>가 4위였다. 3위 역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라는 것을 감안하면 확실히 러시아 문학이 강세고 그중에서도 톨스토이가 단연 선두에 있다.

가장 최근에 나왔다고 볼 수 있는 문학동네판 세계문학전집은 <안나 카레니나>로 시리즈를 시작한다. 90년대에 발간을 시작한 민음사판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즉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시작하고 80년대의 학원사판은 셰익스피어 희곡집이 1권이었다.

오르한 파묵은 2009년 10월에 하버드대학의 노튼 강좌를 맡았다. T. S. 엘리엇,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이탈로 칼비노 등이 이 강좌를 거쳐간 선배들이다. 파묵은 첫 강의를 <안나 카레니나>의 기차장면으로 시작했다. 어떤 기차장면? 안나가 모스크바역에서 처음 브론스키와 조우하는 장면? 그녀가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장면? 흥미롭게도 파묵은 안나가 브론스키를 알게 된 뒤 남편과 아들이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는 기차장면을 골랐다. 안나는 객실 안에서 소설에 집중하려 애를 써보지만 그게 잘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안나가 모스크바에서 경험한 ‘현실’이 독서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 다시 말해 브론스키라는 ‘실제’ 인물이 안나를 사로잡고 있다.

“안나 아르카예브나는 책을 읽었고 이해도 했지만 읽는다는 것, 즉 책에 씌어진 타 인의 생활을 뒤따라간다는 것이 불쾌했다. 그녀는 무엇이든 직접 체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파묵은 이 대목을 길게 인용하면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풍경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소설은 ‘심리적 3차원’의 세계라고 천명한다. 파묵의 이 언급은 폴 오스터가 영화와 소설을 각각 2차원과 3차원에 비유했던 아네트 인스도르프와의 인터뷰를 연상시킨다. 오스터는 “영화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말해 컬럼비아대학교 영화학과장인 인터뷰어를 도발한다. 무슨 문제가 있냐니까, 영화는 “무엇보다도, 2차원”이라고 대답한다.

“사람들은 영화를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벽에 비쳐지는 평범한 그림인 영화는 현실의 환영이지 실재하는 물건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이건 이미지의 문제가 된다. 대개 처음에는 영화를 수동적으로 보게 된다. 그렇지만 영화가 끝날 무렵이 되면 우리는 영화 속에 흠뻑 빠지고 만다. 2시간 동안 매혹당하고, 속임수에 넘어가고 즐거워하다가 극장 밖으로 걸어 나오면 우리는 그동안 본 것을 거의 잊어버리고 만다. 소설은 전혀 다르다. 책을 읽을 때에는 단어들이 말하는 것에 대해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노력해야 하고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 그런 다음 상상력이 활짝 열리면 그때는 책 안의 세계가 우리 자신의 인생인 듯 느끼고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냄새를 맡고, 물건들을 만져보고, 복합적인 사고와 통찰력을 갖게 되고, 자신이 3차원의 세계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된다.”

안나는 브론스키와의 ‘현실’에 머물고 싶고, ‘무엇이든 직접 체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소설에 몰입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 안나는 소설을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있다. 소설은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세상을 보는 것이고 그 세상은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세상이다. 최근에 개봉한 <안나 카레니나>에서 조 라이트 감독도 이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기차의 소음이 마치 타악기의 비트 혹은 심장의 박동처럼 규칙적으로 울리는 가운데 책 속으로 도저히 빠져들지 못하고 있는 안나가 보인다. 사랑에 빠진 안나의 심경은 어지러운 교차편집으로 절묘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톨스토이는 이 장면을 마치 후대의 연출가에게 지시를 내리는 극작가의 지문처럼 상세하게 적어놓았다.

“이윽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에는 그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다음에는 왼쪽의 창문을 두드리며 창틀에 쌓여가는 눈송이, 방한구에 싸인 몸뚱이의 한쪽에 눈이 덮인 채 옆을 지나가는 차장의 모습, 지금 밖엔 사나운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러한 것들이 그녀의 주의를 산만하게 했다. 그러나 그다음부터는 줄곧 똑같은 것의 연속이었다. 무엇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를 내는 기차의 진동, 한결같이 창문에 내리치는 눈, 식었다 뜨거워졌다 하는 증기열의 급격한 변동, 어두컴컴한 속에서 어른거리는 똑같은 얼굴들, 그리고 똑같은 목소리들.”

그러나 이런 방해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소설을 읽기 시작하고 마침내 빠져든다. “소설의 여주인공이 환자를 간호하고 있는 부분을 읽을 때는 자기도 키발을 하고 병실 안을 걷고 싶은 욕구에 시달”린다. 그 순간의 안나는 이미 폴 오스터가 말한 3차원의 세계로 들어가 있다. 브론스키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안나의 욕망은 ‘무엇이든 직접 체험하고 싶은 마음’으로 변형되어 있지만 그 자신은 아직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유부녀라는 안나의 현실’ 대 ‘브론스키라는 매혹의 대상’도 ‘기차의 소음’ 대 ‘소설의 내용’으로 교묘하게 치환되어 있다. 안나는 읽고 있는 소설의 내용과 자기가 경험한 현실을 동시에 받아들인다. 파묵은 말한다. “꿈을 꿀 때는 그 꿈이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소설도 진짜라고 생각하며 읽습니다. 하지만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모순되는 상황은 소설의 본질에서 옵니다. 소설 예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을 동시에 믿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바탕을 둡니다.”

영화 <안나 카레니나>를 보러 간 날. 영화의 전당 중극장에는 관객이 반쯤 차 있었다. 상영 중간에 휴대폰을 확인하거나 대놓고 문자메시지를 줄기차게 주고받는 사람들이 많았다. 부스럭거리며 뭔가를 끝없이 먹어대는 관객까지 내 옆에 앉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를 보는 마음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는 안나의 마음과는 비슷하면서 달랐다. 그녀는 소설에 빠져들기를 거부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었던 반면 나는 영화에 빠져들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폴 오스터의 말마따나 영화는 이미지로 저 멀리에 있고 팝콘 씹는 소리와 휴대폰의 푸른 빛기둥들은 현실로 가까이 있어 끝까지 서로 섞여들지 않았다. 책을 든 안나는 ‘무엇이든 직접 체험하고 싶은 마음’에 시달렸지만 나는 아무런 방해없이 영화에 몰입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언제든 멈출 수 있는 책과는 달리 영화는 어쩐지 한번 지나가면 돌이킬 수 없는 현실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마치 모스크바행 기차처럼 무지막지하게 달려온다.

10년 만에 <씨네21>로 다시 돌아왔다. 그때도 소설가였고 지금도 (다행히) 소설가다. 소설가로서 영화잡지에 글을 쓴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소설과 영화는 어떻게 다른 걸까. 오랜만에 다시 그런 문제들을 고민하고 있다. 모쪼록 이 연재가 나 자신에게도, 독자들에게도 흥미로운 모험이 되기를 기원해본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