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의 나이를 계속 염두에 두고 영화를 보는 게 정당한 감상법일까?”
극장에서 우디 앨런의 <로마 위드 러브>를 보며 옆자리의 태일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물론. 특히 그 감독이 직접 영화에 등장할 때는 더욱.”
용산역과 연결된 쇼핑몰 안의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밖으로 나오자 오후의 햇살 아래 광활한 공사현장들이 보인다. 이곳에 미래도시를 세우려던 공격적인 계획은 허망하게 백지화되었다. 앞으로 얼마 동안 이 상태로 방치될까. 담배에 불을 붙이며 태일이 말을 건넨다.
“로마 가봤냐?” “아니.” “로마도 못 가봤어? 하긴 넌 한류가 아니지.” “….” “뭐 나도 못 가봤다. 그나저나 저런 영화 찍으면 로마 관광청에서 돈 좀 받나?” “설마.” “<미드나잇 인 파리> 찍을 때도 꽤 받았다던데?” “진짜? 웬만한 광고보다 훨씬 낫긴 하지. 영화 보고나면 바로 가보고 싶어지니.” “그래서 좀 그래. 파리나 로마를 떠올리면서 사람들이 꾸는 빤한 꿈을 그대로 뻥튀기한 느낌이야. 움직이는 그림엽서지 이게.” “미화만 하지 않고 사람들이 이태리 사람에 대해 갖고 있는 고정관념도 다뤘잖아.” “그걸 유머 코드로 쓰면서, 비틀지도 않고 그냥 막 갖다 쓰잖냐. 파파라치나, 섹시 뚝뚝 떨어지며 남자한테 덤벼드는 이태리 육체파 미녀 이미지나, 장의사마저 카루소처럼 기막히게 노래한다는 식의 전형적인 이태리 남자 이미지나. 솔직히 옛날엔 우디 앨런이 좀더 정교하지 않았냐?” “<장고>는 좋았다면서? 우디 앨런은 그런 농담같은 설정들로 영화 만들면 안돼?” “타란티노랑 우디 앨런은 다르지, 인마. 타란티노는 ‘쌩까고 막가자’는 주의고, 우디 앨런은 지적인척하면서 피해가는 주의니까.” “우디 앨런도 막갈 때 있어. 예전 자기 영화에 정자(精子) 역할로도 나왔는데. <당신이 섹스에 대해 알고 싶었던 모든 것>이던가, 제목 무지 긴 영화. 그 영화도 섹스에 대한 이런저런 농담과 고정관념을 다루는 영화야. 무지 웃겨. 그러고 보니 어떤 면에서 이 영화랑 닮았네. 에피소드들을 짜는 방식이.” “그래? 그 영화는 못 봐서 모르겠고.”
태일은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나오면 바로 말을 돌린다. 그러더니 멀리 공사현장으로 시선을 옮기고 담배연기를 내뿜는다.
“근데 여기랑 로마랑 참 다르다. 씨바, 로마는 아기자기하기도 하더만. 거기도 이런 특대사이즈 공사판, 있을까나?”
우리는 근처 포장마차에 자리를 잡았다. 떡볶이, 어묵을 파는데 소주를 사와서 마셔도 되는 곳이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떡볶이가 맛있을지, 어릴 땐 상상하지 못했다.
“나이는 마흔인데, 속은 바뀌질 않네.”
내가 한숨처럼 중얼거리자 태일이 웃으며 내 머릴 때린다.
“새끼, 늙은이같이. 야, 너 나이 얘기 요즘 부쩍 많이 한다. 아까 영화 보면서도 그러더만. 결혼하고 애 낳더니 폭삭 삭았네. 너 속 바뀌었어. 졸라 찌질해졌어. 그러니까 걱정 마.”
위로인지 조롱인지 모르겠지만 반격하기도 귀찮다. 아니 딱히 받아칠 말이 없다. 태일은 그런 내 표정을 살피더니 바로 영화 얘기로 덮는다.
“우디 앨런 형은 그 연세가 되셔도 욕망이 팔팔하잖아. 그거 없어지면 죽어. 대사도 나오지? ‘은퇴는 곧 죽음이다.’ 일 얘기이기도 하지만 실은 욕망 얘긴 거야. 두 사람 다 결국 짧게 바람 피우고 돌아오는 부부 에피소드나, 여자친구의 친구한테 그냥 넘어갔다가 뽈 되는 에피소드나 그런 거 아니냐. ‘인생 뭐 있냐. 내내, 죽을 때까지, 그 욕정의 뒤척임이 인생이다.’ 이런 말씀이지. 그런 면에선 참, 존경스러운 형님이셔.” “난 다 접었어. 이 나이에도 그걸 낭만인 양 굴며 사는 게 좀 추해 보이는 거 같더라고. 아름답지가 않아.” “까고 있네. 그럼 죽는다니까. 죽은 거나 다름없든지.” “….” “뭐 하 수상한 시절이니 연예인이 이미지 걱정하며 조심하는 거는 나쁘지 않지만.” “그보단 좀 심오하게 받아줄 수 없어?” “지랄 말고. 우울증 초기 같은데, 약 먹어라.”
봄바람이 포장마차를 스친다. 울렁 주황색 천막이 흔들린다.
“참 이적, 걔 이름 뭐냐? 주커버그가 반한 여자애. 여자친구의 친구로 나온 애.” “주커버그? 아, 제시 아이젠버그. 여배우는 이름이 뭐더라? 검색해보면 되지. 엘렌 페이지라네?” “그 여자애 캐릭터 예전에 실제로 본 적 있지 않냐?” “하하, 나도 그 생각하긴 했어.” “너랑 나랑 같은 애 생각하는 거 아니야?” “응? 뭐… 그럴 수도…” “그럼 혹시 너도? 아니다. 하여간 나름 졸라 리얼한 캐릭터야. 저런 캐릭터 만나면 반가워, 히히히.”
태일의 웃음이 짓궂지만 듣기 싫진 않다. 엘렌 페이지의 캐릭터를 만들던 우디 앨런의 마음 같은 것일 거다. 신비한 자기 세계가 있는 듯해 남자들이 홀딱 빠지는 여인. 하지만 모든 게 공허한 제스처에 불과한 여인. 그 일을 돌이켜보는 알렉 볼드윈의 대사가 이거였나. ‘나이를 먹으니 분명해진다.’
“음, 생각보다 우리 애기가 늦네. 수업 마치자마자 용산역 앞으로 넘어온다고 했는데.” “누가 와? 애기? 여자친구?” “여친이라기보단 애인? 가수 구경도 시켜줄 겸 이리로 오라 그랬거든. 사실은 오후에 시간이 떠서 너랑 영화보자 그런 거야. 근데 요즘 대학생들도 이적을 아나?”
왠지 의기양양한 말투다. 여대생 애인이 있다는 자랑을 이렇게 한다.
“몇살 차이야? 범죄 아니야?” “나이가 뭔 상관? 얘가 나 베이스 치는 거 보고 뻑갔대잖냐. 내가 옛날부터 그랬지? 여자들은 기타보다 베이스를 좋아한다고. 앰프에서 저음 빡 울리면 뱃속이 간질간질해지거든. 사랑이 별거냐? 뱃속 간질간질하고 가슴 두근두근하면 그게 사랑이지.”
나는 굳이 그 여성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한다. 괜히 인사를 길게 나눠봐야 다음번엔 다른 여자를 데리고 올 테니 시간낭비다. 그저 둘이 만나면 뭐 할 거냐고 묻는 것으로 그친다.
“영화 하나 더 보려고.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아직 하나?”
‘참 영화 좋아한다. 영화처럼 산다’고 쏘아붙이려다 만다. 부러워하는 것처럼 보일까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