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영객잔]
[신 전영객잔] 진실은 막간에 있다
2013-05-09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드니 라방과 함께 밤으로 돌아온 레오스 카락스의 <홀리모터스>

한발은 땅 위에 한발은 허공 속에 의기양양한 시인이 이렇게 절룩거린다. 그를 비틀어버리는 낯선 곳에서 완전하게 패배하여 자신의 상상의 형상이 사라져버리는 세계 속으로 되돌아온다. -장 콕토 <몽유병자> 중에서

레오스 카락스의 짧은 필모그래피에서도 <폴라 X>(1999)는 이례적인 영화였다. 대부분 낮에 찍혔고, 그의 페르소나인 드니 라방이 등장하지 않는다. 어떤 감독의 영화에선, 오즈 야스지로나 에릭 로메르의 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야기나 소재보다 계절이나 밤낮이라는 배경이 더 근원적이다. 레오스 카락스의 영화도 그런 것 같다. 카락스가 스물넷에 만든 데뷔작 <소년, 소녀를 만나다>(1984)는 거의 모든 장면이 밤이며, 뒤를 이은 <나쁜 피>(1986)와 <퐁네프의 연인들>(1991)도 3분의 2 안팎이 밤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미완성의 조상(彫像)과도 같은 특이한 외모의 드니 라방은 몽유병자의 무표정으로 어둠이 깃든 파리의 뒷골목을 배회하며, 낡은 건물의 황량한 형상들과 그에 대비되는 도발적인 색채와 음영의 미장센은, 한때 얼마간 비아냥조의 ‘시네마 뒤 룩’(cinema du look)이라 불렸던 매력적인 이미지들로 되살아난다. 첫 세편의 영화에서 카락스는 밤의 화가라고 부르고 싶을 만큼, 밤 풍경의 우울과 매혹에 탐닉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카락스의 영화 가운데 가장 산문적인 <폴라 X>의 실패는 카락스가 낮의 세계를 잘 다루지 못했다는 점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이 영화엔 밤에 유혹된 낮이라는 모티브가 근친상간의 모티브 아래 잠복해 있다. 부유하고 젊고 재능있고 잘생긴 소설가 피에르는 낮의 남자이며, 그가 누이라고 믿는 집시여인 이사벨은 남루하고 어둡고 우울한 밤의 여자다. 피에르는 꿈에서 만난 이사벨의 존재에 사로잡히며, 밤의 숲에서 조우한 뒤 그녀와 살기로 결심한다. 빈민가에 정착한 피에르는 지금까지 자신의 삶이 허위였고 이제 진실을 깨달았다고 믿으며 그 진실을 소설로 쓴다. 하지만 그의 새 소설은 출판이 거부된다.

“말이 시들고 사물이 살아나는 밤”(생텍쥐페리)은 소설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일까? 관객인 우리는 피에르가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진실도 새 소설의 내용도 알 수 없지만, 그는 어쨌든 실패하고 자멸한다. 그의 귀족적이고 관능적인 어머니도 자살에 가까운 사고사로 죽음을 맞고, 헌신적인 전 약혼녀는 그와 함께 살겠다며 폐건물의 숙소에 들어와 병들어간다. 밤의 매혹에 사로잡힌 낮의 인간들은 그렇게 몰락해간다. 이 영화가 실패작이라면, 밤의 유혹이라는 모티브의 뼈대만 있고 유혹당하는 자의 피와 살이 없기 때문이다. 피에르는 파탄이 예정된 자동인형처럼 묘사되며, 피에르를 연기한 기욤 드파르디외의 수많은 격정의 표정과 몸짓들은 드니 라방의 어둡고 굳은 표정 하나를 당하지 못한다.

<홀리모터스>에서 카락스는 드니 라방과 함께 밤으로 돌아왔다. 극영화에선 20여년 만의 재회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을 듯 반항적이고 고집스런 눈매의 라방도 이제 머리가 벗겨지고 깊은 주름이 팬 장년이 되었다. 동년배인 그를 다시 맞은 카락스의 영화세상에서 어둠은 더 깊은 층위로 이동했다. 밤장면이 많다기보다 이것은 고스란히 밤의 몽상과도 같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밤은 천개의 눈을 가졌지만 낮은 오직 하나뿐”이라는 옛 시인의 말이 맞다면 <홀리모터스>는 밤의 외양(look)이 아니라 밤의 영혼을 담으려는 영화다.

죽은 관객의 극장에 갇힌 감독

<홀리모터스>에는 9가지 에피소드가 이어 붙여져 있고, 라방은 9가지 캐릭터를 연기한다. 그를 태운 리무진은 분장실을 갖추고 있어, 리무진이 설 때마다 그는 다른 인물이 되어 차에서 내린다. 에피소드들 사이의 연관성은 전혀 없다. 다만 그는 스케줄에 있는 대로 그 역할을 할 뿐이다. 개연성이라는 외재적 규율이 내재적 규칙으로 완전히 대체되어 있다는 점에서 <홀리모터스>는 카락스의 초기 3부작과 같은 시적 영화가 아니라, 시(詩)의 영화다. 시적 이미지나 시적 리듬이 채용된 것이 아니라, 시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영화에 와서야 카락스는 그가 오랫동안 존경을 표해온 장 콕토의 세계와 비로소 만난 셈이다.

20세기 초반의 상징주의 시와 영화가 그러했듯 이질적인 것들의 난폭하고 대담한 병치와 절충의 연속이라고 해서 <홀리모터스>가 모종의 일관성도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이 점을 말하기 위해선 얼마간의 우회가 불가피할 것 같다. 우회의 과정에서 카락스의 전기적 사실로부터 어떤 장면을 설명하는 일은 피하려 한다. 그것이 무의미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영화 외적 정보에 대해 무지한 관객으로서 영화의 내적 흐름에만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프롤로그에 해당되는 오프닝 시퀀스는 상세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다. 남자의 벌거벗은 상체의 움직임을 담은 오래된 흑백 활동사진에 이어 객석을 채운 관객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모두 잠들어 있다. 다음 장면에서 레오스 카락스 자신이 침대에서 일어난다. 아마 잠자는 관객 장면은 그가 꾼 꿈이었을 것이다. 개가 곁에서 잠들어 있고, 트윈 침대의 다른 한쪽은 비어 있는데, 누군가 떠난 빈자리일 것이다. 일어난 카락스는 느린 움직임으로 거울, 유리창, 벽을 차례대로 지나친다(벽은 벽화의 틀이기도 하며 나중엔 문으로 변한다. 우리는 거울과 창과 틀과 문이 모두 스크린의 은유라는 것을 알고 있다).

카락스는 거울과 창문을 무심하게 지나치는데, 창문 밖에는 도시의 야경이 비친다. 비행 물체들이 이착륙하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는데 비행기라기보다 우주선의 형상에 가깝다. 카락스는 나무들이 실물처럼 그려진 벽, 그러니까 벽화 앞에 멈춰선다. 벽 한가운데 구멍이 있고, 그 구멍을 만지던 그의 손가락이 열쇠로 변해 구멍에 꽂히자 벽이 열린다. 틀이 문으로 변하자 다른 세계의 입구가 된다. 그런데 문 뒤에는 또 다른 문이 있고, 그 문을 열자 첫 장면에 등장했던 극장의 2층 객석 뒤편에 이른다. 사내는 여전히 꿈속이다. 스크린은 보이지 않으며 관객은 여전히 잠들어 있고, 1층의 객석 사이로 벌거벗은 아기가 스크린을 향해 아장아장 걸어간다. 카메라는 스크린을 등지고 다시 1층 객석을 비추는데, 어둠 속에서 늙은 개가 스크린을 향해 조금씩 다가온다. 프롤로그의 마지막은 뱃고동 소리와 함께 한 여자아이가 배의 유리창 안에 앉아서 유리창 밖의 카메라를 혹은 관객인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다. 미묘한 점프컷으로 촬영된 이 장면에서 아이는 지금 배를 타고 떠나가려는 것 같다.

모호하고도 신비한 이 프롤로그의 세부들을 일일이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우리는 이 사내가 놓인 상황을 짐작할 수는 있다. 그는 지금 중첩된 문들과 스크린들에 갇혀 있고, 이 상황은 이 장면이 사내가 꾸는 꿈속의 꿈이라는 사실과 겹쳐 있다. 그는 어떤 관객도 스크린을 바라보지 않는 혹은 모든 관객이 죽어버린 극장에서 늙은 개가 되어 어슬렁거리고 있다. 그리고 그의 곁을 누군가 떠나갔으며, 떠난 이가 여인인지 아이인지 알 수 없다. 사내는 꿈에서 깨어날 수 없고, 스크린을 벗어날 수 없다. 떠난 이를 떠올리며 그는 이렇게 죽은 관객의 극장에서 끝없이 긴 밤을 살아왔고 살아야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한 외로운 감독의 중첩된 악몽과 마주하고 있으며, 이것이 <홀리모터스>라는 영화의 입구이다. 본편은 악몽의 연장일까, 아니면 현실의 세상일까. 아직은 알 수 없다.

가면의 역설

매혹적인 프롤로그가 끝나면 아침이 밝아오고, 드니 라방이 세련된 사업가 오스카의 모습으로 등장해 60대 여인 셀린느가 운전하는 리무진에 올라타는 본편이 시작된다. 셀린느는 오스카에게 오늘 9개의 스케줄이 있다고 말한다. 오스카의 9가지 역할은 차례대로 이렇게 등장한다. 1. 걸인 노파 2. 모션 캡처 스턴트맨 3. 지하의 마귀인간 4. 가정적인 택시기사 5. 중국인 킬러 6. 우발적 살인자 7. 죽어가는 노부호 8. 옛 연인과 만나는 중년 남자 배우 9. 가정으로 돌아가는 중산층 남자.

프롤로그가 감독 카락스의 악몽 그대로라면, 본편은 드니 라방이라는 배우의 삶을 악몽의 문체로 번안한 것처럼 보인다. 감독 카락스가 중첩된 문과 스크린들 그리고 관객이 죽은 극장에 갇혀 있다면, 배우 드니 라방은 중첩된 배역들 혹은 가면들에 갇혀 있다. 개인적으로는 본편이 프롤로그보다 매력적이지 않다고 느꼈다. 프롤로그는 풍성하고 강렬한 이미지들이 서로 충돌하면서도 한몸이 되어 부드럽게 흐르지만, 본편은 보는 동안 계산된 트릭들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기 때문이다.

본편의 에피소드들은 이질적인 것이 불규칙하게 병치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이 역할 게임의 내적 규칙이라고 믿게 만든 항목들을 하나씩 위반하며 진행된다. 오스카가 집에서 나올 때 그의 저택을 경비병들이 무장한 채 지키고 있으며, 그의 리무진 뒤에는 경호차가 따라온다. 에피소드1의 역할을 수행할 때도 경호원들이 그의 주위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2의 역할을 맡을 때는 경호원이 사라졌다(우리는 그가 부호 오스카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짐작하게 된다). 3의 역할에 이르면 그의 배역은 타인의 삶에 난폭하게 개입한다. 사진작가 에이전트의 손을 물어뜯고 모델을 납치하는 것이다(우리는 이 영화가 사실적인 역할 수행이 아니라 일종의 환상담 혹은 악몽의 연장이라고 짐작하게 된다). 4의 역할에는 그와 공연하는 타인(딸)이 등장한다(임시적인 역할 놀이와 지속되는 실제 생활 사이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에피소드5에선 킬러가 된 오스카가 자신과 똑같이 생긴 타깃을 죽이려다 자신도 칼에 찔리는데, 리무진으로 돌아온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는다(우리는 그가 더이상 오스카임을 믿지 않거나,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은 누구나 오스카일 수 있다고 짐작하게 된다). 6의 우발적 살인은 스케줄에 없는 것처럼 진행되지만 사실은 이것도 포함되어 있다(스케줄의 계획과 우연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7에 이르면 오스카의 조카로 나오는 여인이 관능적인 자세로 옷을 갈아입는 단독 장면이 등장하며, 그 여인은 스스로 연기자임을 밝힌다(연기자를 연기하는 연기자의 연기… 연기는 중첩되고 연기와 연기 이후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에피소드8에는 동료 연기자이자 옛 연인을 우연히 만난 뒤 그녀가 투신자살하는 연기를 목격하는데 오스카는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흘린다(연기가 실재의 수준으로 승격한다). 9에선 오랑우탄이 기다리고 있는 중산층 가정으로 돌아간다. 리무진 운전사는 실은 운전사가 아니라 그의 고용인이며 그에게 일당을 지급한다. 일을 마치고 돌아간 곳이 실제 생활이 아니라 또 다른 연기가 되는 것이다(그는 부호 오스카가 아니며 연기 아닌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보는 사람에 따라선 부호 오스카 또한 배역이므로 8이 연기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고, “자정 직전에 웃어야 한다”는 셀린느의 주문 또한 연기에 관한 것이므로 우연처럼 보이는 6과 8이 모두 연기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셀린느는 에피소드7이 끝나고 이제 “스케줄이 하나만 남았다”고 말한다. 이 혼란스런 트릭들은 우리 머리를 얼마간 어지럽히지만 고민할 필요가 없는 퍼즐이다. 오스카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편의 에피소드들은 연기와 생활, 연기 이전과 이후를 점점 모호하게 만들어 연기 이외의 모든 것을 지워버린다. 출발한 곳과 돌아간 곳도 연기라면 그는 자신의 배역들에 영원히 갇혀 있다.

당신의 진짜 얼굴을 보여달라, 라고 요구한다면 그는 가면을 내놓을 것이다. 그는 가면들로 진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면(들)이야말로 그의 얼굴(들)이다. 에필로그에서 셀린느가 퇴근을 하면서 가면을 쓰는 장면은 본편의 역설적 요약이며, 유머러스한 알레고리다. 드니 라방이 가면들에 갇혀 있다는 진술은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 그는 가면들에 갇혀 있지만 가면들을 통해서만 세상과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또한 열려 있다. 가면은 비유컨대 틀이기도 하고 창이기도 한, 투명과 불투명과 반투명이 경합하는 장이다.

섬광의 전율, 기적의 배열

이 진술을 예시하기 위해 긴 본편이 있는 걸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 영화가 우리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다가 점차 마음을 울리게 된다면, 그것은 드니 라방이라는 배우가 그 모든 배역에 경이로운 육체성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의 연기력이 아니라(라방은 표정 연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총체적인 신체적 능력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누군가 9개의 캐릭터를 그만큼 능숙하게 연기할 수는 있겠지만 분장과 휴식의 막간을 보여주면서도 9가지 얼굴이 모두 허위가 아니라고 설득할 수 있는 육체의 소유자는 라방 외에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진실은 가면들 사이에 있다. <홀리모터스>가 우리를 완전히 사로잡는 것은 ‘중간휴식’이다. 낡고 어두운 성당과 같은 공간에서 드니 라방이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걸어온다. 기둥들의 뒤편에서 또 다른 아코디언 연주자들과 세션맨들이 하나씩 합류하면서 연주 퍼레이드가 벌어진다. 소리는 점점 커지고, 아쉽게 끝날 듯한 순간에 라방이 하나 둘 셋을 외치면 터져나오듯 모든 악기가 목청껏 노래한다. 확신컨대 여기엔 가면이 없다.

정한석은 이 장면의 “음악과 리듬과 운동감이 황홀하다”고 표현했다. 완전히 동의한다. 이 장면에 넋을 잃게 되는 이유는 연주와 음악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의 위치에 있다. 비루하고 잔혹하며 고단한 가면 놀이의 틈에서 우리를 향해 이처럼 벼락같이 쏟아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 음악을 그토록 사랑할 수 있었을까. 이 음악과 그것의 방식과 위치를 기적처럼 찾아냈다는 점만으로도 <홀리모터스>는 걸작의 반열에 오를 자격이 있다. 이 섬광과도 같은 전율의 순간을 위해 그토록 혼란스런 가면극이 있었다고 믿는다. 진실은 막간에 있다. 결국 시인은 패배하여 가면의 세계로 되돌아올 운명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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