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가 젊을 때는 청춘 하나만으로도 승부를 걸 수 있다. 빛나는 육체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나이가 들면 어떡할 것인가. 이것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이고, 여기에 정답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영화의 한 특징이 육체에의 매혹이다. 2차대전 이후, 네오리얼리즘이 유행할 때 국내에선 ‘마조라타’(Maggiorata)라고 불리는 여성육체파가 스타가 됐다. 이런 전통은 60년대의 소피아 로렌을 거쳐, 최근의 모니카 벨루치까지 이어진다. 실바나 망가노(1930~89)는 전후의 마조라타 가운데 한명이다. 젊을 때는 육체 하나만으로 전세계의 이목을 끌었는데, 아쉽게도 곧바로 잊어졌다. 그런데 중년이 돼서 극적인 변신을 한다. 곧 청춘의 화신은 놀랍게도 죽음의 상징이 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그렇게 망가노는 배우로서 두번 살았다.
망가노의 출세작은 주세페 데 산티스 감독의 <씁쓸한 쌀>(Riso Amaro, 1949)이다. 30대 초반의 이 젊은 감독은 로베르토 로셀리니, 루키노 비스콘티 등 당대의 대가들과 경쟁하기 위해 네오리얼리즘에 할리우드의 갱스터를 섞은 변종 범죄물을 들고 나왔다. 농번기가 되면 이탈리아 전역에서 모심기를 할 일용직 여성들이 북부의 평야로 몰려오는데, 범죄단에서 겨우 훔친 보석이 하필이면 이곳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스릴이 시작된다.
원시적 관능의 빛과 그림자
실바나 망가노는 모심기로 돈을 벌려고 온, 몸밖에 없는 하층민 여성으로 나온다. 그녀가 볏단을 들고, 몸에 딱 붙는 상의에, 검정색 짧은 바지, 그리고 피부보호용 흑색 스타킹을 신고 논에 서 있는 장면은 전후 이탈리아 노동여성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됐다. 패전 국가에서 벌어먹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몸을 쓰는 일에 동원됐는데, 육체의 아름다움이 해진 옷을 비집고 나오는 것이다. <씁쓸한 쌀>은 여성 육체에 대한 페티시즘을 노골적으로 이용했다. 몸매가 완벽해서 마네킹 같은 다른 글래머들과 달리 망가노는 큰 가슴과 튼튼한 허벅지로 원시적인 매력을 자랑하며 전후 이탈리아 여성의 관능의 아이콘이 된 것이다.
지금 보면 망가노는 운이 좋았다. 여성 배우들이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네오리얼리즘 영화에서 육체파의 매력을 마음껏 표현했다. 말하자면 세계 영화계는 <자전거 도둑>(1948) 같은 네오리얼리즘의 또 다른 걸작을 찾다가, 우연히 관능미가 넘치는 여배우를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일찍 찾아온 엄청난 초운(初運)의 대가도 컸다. 망가노는 <씁쓸한 쌀> 이후 세계의 이목을 끄는 작품에 나오지 못했다. 그저 국내에서 고만고만한 히트작에 출연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망가노가 <씁쓸한 쌀>로 이름을 알린 뒤, 할리우드의 요청이 쇄도했다. 그러자 <씁쓸한 쌀>의 제작자이자 훗날 이탈리아 영화계의 거물로 성장하는 디노 데 라우렌티스가 전격적으로 망가노와의 결혼을 발표했다. 너무 빠른 결혼발표는 신랑의 불안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을 낳았다. 그만큼 망가노의 육체는 남성 판타지의 정점에 있었다. 불과 19살의 나이에 결혼한 망가노는 이후 활동에 큰 제약을 받았다. 기왕이면 점잖고 존경받는 역할에 출연해야 했다. 제작자의 부(富)와 배우의 경력이 반비례하는, 어찌 보면 흔한 불행이 그녀의 운명 앞에 어른거렸다.
페데리코 펠리니가 <달콤한 인생>(1960)을 만들 때, 원래 마르첼로 마스트로이 안니의 상대역은 실바나 망가노였다. 주인공이었던 아니타 에크베르크의 풍만한 몸매를 떠올리면 펠리니의 의도가 이해될 것이다. 그런데 망가노의 남편이 절대 반대했다. 이탈리아 영화계의 다 아는 비밀인데, 망가노와 마스트로이안니는 로마의 같은 동네 출신이고, 10대 시절 이미 연인 관계였다. 훗날 망가노가 밝힌 바에 따르면 마스트로이안니는 그녀의 평생의 사랑이었다. 망가노가 캐스팅되지 못한 것은 남편의 질투 때문이라고들 생각했다. 그러면서 배우로서의 망가노의 삶도 시드는 듯 보였다.
죽음을 뒤집어쓰고 다시 살다
세계 영화계에서 사라진 망가노가 돌아온 것은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오이디푸스 왕>(1967)을 통해서였다.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 변해, 못 알아볼 정도였다. 튼튼한 처녀는 온데간데없고, 바싹 마르고 예민해서 부서질 것 같은 중년 부인이 대신 있었다. 남편의 질투가 결국 한 여성을 말라 죽인다느니, 불면증 때문이라느니 등 말들이 많았다. 논에서 일했던 처녀는 이제 그리스의 왕비가 되어 싸늘한 느낌을 전달했는데, 처음에 관객은 그녀의 변한 모습 때문에 대단히 놀랐다. 변신에 매력을 느끼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볼 때, 파졸리니를 만나지 않았다면 망가노는 풍만한 가슴과 관능적인 허벅지만으로 기억됐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런 배우는 넘친다. 그런데 <오이디푸스 왕>에서 망가노는 잔인한 운명에 의해 아들과 사랑을 나누고, 목매달아 자살하는 비극적인 왕비를 연기했는데, 저주받은 여성의 회한을 더이상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망가져버린 지나간 과거에 대한 포기와 체념이, 살이라곤 한점 없는 마른 얼굴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쯤 되면 연기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잘 안 갈 정도였다. 돌이켜보면 망가노는 그제야 배우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메마른 운명의 여성이라는 이미지는 파졸리니의 <테오레마>(1968), <데카메론>(1971)을 통해 그녀의 캐릭터로 자리잡았다. 이것에 약간의 변화를 준 감독이 비스콘티다.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에서는 그런 메마름에 귀족의 품위를, <루드비히>(1972)에서는 바그너의 아내인 코지마를 통해 영악함을, 그리고 <가족초상화>(1974)에서는 통제되지 않는 섹스의 욕정까지 입혔다. 그러나 어떤 작품이든 그녀의 웃음기라곤 없는 미라처럼 바싹 마른 얼굴에는 불안하게도 늘 죽음의 그림자가 덧씌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존재 자체가 죽음의 은유처럼 보일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이런 캐릭터 덕분에 망가노는 영화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섹스 어필에만 매달리는 다른 배우들과는 달랐다. 더 나아가 망가노는 죽음의 운명을 이해하는 배우로 보였다.
망가노는 평생의 사랑이었던 마스트로이안니와 마침내 공연하는 기회를 얻었다. 남편과 이혼한 뒤였다. 니키타 미할코프의 <검은 눈동자>(1987)에서였다. 하지만 망가노는 마스트로이안니의 상대역이 아니라 조그만 배역에 만족해야 했다. 망가노는 이 작품으로 마스트로이안니가 칸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때가 죽기 2년 전이다. 다시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으며, 스크린에 나타났을 때의 메마른 얼굴 위의 죽음의 그림자는 실제에서도 너무 빨리 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