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이 자기 후배를 소개하며 말했다. “얘 남자친구가 진짜 좋은 회사 다녀요.” “어딘데요?” “아빠 회사.” 세상에서 제일 좋은 회사, 아빠 회사. 나는 슈퍼히어로가 엄청 비싼 슈트들을 때려부수며 돈지랄하는 영화 <아이언맨3>를 보면서 생각했다. 아이언맨은 좋겠구나, 아빠 회사가 있어서. 시골 구석에서 농사 짓다 상경한 슈퍼맨은 투잡을 뛰느라 바쁘고, 고아에 고학생인 스파이더맨은 피자 배달한다고 서럽지만, 아이언맨은 이런 사람이다. “나? 억만장자에 플레이보이, 파티광.”(<어벤져스> 중에서)
아빠 회사로 치면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슈퍼히어로가 배트맨이다. 직업은 웨인엔터프라이즈의 회장이지만 말단 직원보다 한가해서, 사업도 하고 도시도 구하고 연애도 하는 틈틈이 방구석에 처박혀 정체성을 고민한다(이 시간이 제일 길다). 아이언맨보다 슈트가 적은 대신 배트카가 있다. 그리고 아이언맨 슈트는 DIY지만 배트맨 슈트는 주문제작이니까 훨씬 비쌀 거다. 그렇다면 두 재벌 2세 중 누가 더 부자일까?
이런 걸 나만 궁금해할 리가 없다. <아이언맨2>가 개봉했을 때 Ranker.com이 선정한 바에 따르면 배트맨은 부자 슈퍼히어로 4위, 아이언맨은 7위였다(1위는 블랙 팬더, 회사도 아니고 무려 ‘나라’가 있다). 이 밖에 원더우먼은 아마존 공주님이고(채찍을 비롯한 무기도 몽땅 엄마한테 받아왔다), <엑스맨>의 자비에르 교수는 엄청난 부잣집 도련님이다(초능력자들을 키우는 학교 저택이 아빠 집).
이렇게 보니 역시, 아빠가 중요하다. Ranker.com이 선정한 부자 슈퍼히어로 20명 중에서 일확천금이나 유산이 아닌, 본인 월급으로 순위 안에 들어간 히어로는 변호사인 데어데블뿐이었다. 어느 슈퍼히어로 팬사이트 게시판에서 가장 가난한 슈퍼히어로가 누구인지 따지기 시작했는데, 답은 스파이더맨, 스파이더맨, 스파이더맨. 머리는 제법 좋지만 아빠 회사가 없어서, 슈트를 맞추기는커녕 빨면 물 빠지는 싸구려 쫄쫄이를 입고 다니면서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하는 스파이더맨이다.
이처럼 슈퍼히어로들의 판타지 세계에서도 아빠 잘 만난 영웅들이 득세하는데, 현실이라고 공평할 리가 없다. 내세울 거라고는 아빠밖에 없어서 ‘우리 아빠가 최고’만 외쳐도 대통령이 되는 세상이다. 하지만 정작 아빠들은 어떨까? 능력있는 슈퍼히어로 아빠들은 세상에서 제대로 자리잡고 살 수 있을까? 아니면 아빠가 열심히 지구를 구했으니 자식들이라도 팔자를 고칠까? 그럴 리가. 뉴욕은 공짜로 구해주고 피자 배달로 돈을 버는 스파이더맨이 나이 먹으면 아빠가 된다. 중요한 건 슈퍼 파워가 아니라 슈퍼 리치다.
초능력 가족 <인크레더블>의 아빠는 보험회사 직원이다. 한때는 세상을 구했지만 지금은 교묘한 보험 약관에 억울하게 당한 할머니도 구하지 못하는 신세다. 어느 날 문득 부름을 받지만 이를 어쩌나, 한달 월급이 아쉬워 사무직으로 보낸 세월, 슈트가 있어도 맞지를 않는데. 그래도 인크레더블 가족은 장비라도 지원받지, 일본 애니메이션 시리즈 <지구방위 가족>은 무기를 돈 내고 산다. 진짜다. 이 가족은 아빠가 정체불명의 계약서에 서명하는 바람에 정체불명의 외계인이 쳐들어올 때마다 억지로 지구를 구해야 하는데, 한번 출동할 때마다 980만원을 받는다. 그래서 포기하고 싶어지는 순간, 엄마는 외친다. “980만원!” 하지만 미사일이며 광선이며 이것저것 쓸 때마다 정체불명의 장부에 기록되고 결과는 언제나 적자. 가족의 외상 장부는 쌓여만 간다.
슈퍼히어로도 살기 힘든 세상이다. 아빠가 우리의 지구를 구하는 슈퍼히어로의 인생을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