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의 날씨]
[영하의 날씨] 지금 누굴 연기하고 있나요?
2013-05-20
글 : 김영하 (소설가)
일러스트레이션 : 김현영 (일러스트레이션)
<시저는 죽어야 한다>의 배우들을 보며 인간의 본성을 생각하다

“다른 사람인 척해본 적 있어요?” 몇년 전 지인과 그의 아내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일이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지인의 아내가 되물었다.

“살아오면서 자기 정체를 감추고 다른 사람 행세를 해본 적이 있냐고요. 실제 생활에서든 인터넷에서든.” “없는데요.”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말일까? 나는 그녀의 즉각적인 부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과연 자기 정체에 대해 늘 진실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공항의 입국 카드나 웹사이트 가입신청서에 언제나 진짜 직업을 적고 칵테일파티장에서 어떤 허세도 부리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얼마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 더러 아주 심한 거짓말을 할 때도 있다. 기혼인데도 미혼이라고 한다거나 비정규직인데도 정규직처럼 행세한다거나 출신 학교를 의도적으로 감추거나 상대방의 오해를 유도하기도 한다. 몇년 전 시끄러웠던 신정아씨 같은 경우는 극단적으로 심하게 정체를 윤색한 경우일 것이다. 그녀는 심지어 자기가 정말로 예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땄다고 믿어버린 것 같았다. “제가 예일대학이 있는 뉴헤이븐에 한번도 안 간 것은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학위를 딴 것만은 확실해요.” 이런 말이 얼마나 이상한 말인지 모른다는 것부터가 그녀가 얼마나 자기의 가짜 정체에 깊숙이 빠져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한 경제학과 교수는 택시를 타고 자기가 근무하는 대학으로 가자고 하면 기사가 자꾸 교수냐고 묻고, 그렇다고 하면 무슨 과 교수냐고 또 묻고, 그래서 경제학과라고 하면 내릴 때까지 이 나라 경제에 대한 기사의 강의를 들어야만 하기 때문에 늘 전공을 물리학과라고 둘러댔다고 한다. 그의 술책은 북한 핵에 엄청난 관심을 가진 택시기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잘 먹혔다고 한다.

“물리학이라… 혹시 핵물리학자 아니시오?”

“아, 아닙니다. 그냥 이론 물리학자입니다”라고 했지만 택시기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북한 핵이 얼마나 심각한 위협인지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더란다. 그 뒤로는 천체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한다. 기자들은 곧잘 취재를 위해 직업을 위장하고 작가들 역시 작가라고 밝혔을 때 겪게 될 부작용을 우려해 이런저런 다른 ‘대체’ 직업을 갖고 있다.

10여년 전에 갓 등단한 20대 여성 작가 세명이 인터넷에서 알게 된 남자 셋과 오프에서 술자리를 가졌다고 한다. 여성 작가들은 인터넷 채팅 때부터 장난 삼아 자신들의 정체를 텔레마케터로 위장했다. 오프에서 만난 회사원 셋과 가짜 텔레마케터 셋은 꽤나 즐거운 술자리를 벌였다. 취흥이 꽤 오르자 여성 작가 한명이 자기의 진짜 정체를 밝혔다. “실은 우리 모두 작가거든.” 남자들은 믿으려 들지 않았다. “그럼 검색해 봐. 진짜라니까.” 결국 남자 한명이 인터넷 검색을 통해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여자 셋이 모두 작가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자 남자들은 불같이 화를 내더니 모두 나가버렸다고 한다. 이 얘기를 내게 전하면서 그들은 물었다. “남자들은 우리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에 화가 났던 걸까요, 우리가 작가여서 화가 났던 걸까요, 아니면 텔레마케터가 아니어서 화가 났던 걸까요?”

내가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런데 텔레마케터 연기는 재밌었어?”

그들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의 그들은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친 연극배우들처럼 보였다.

<시저는 죽어야 한다>의 배우들은 모두 중죄를 범한 수감자들이다. 영화에서 이들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를 연기한다. 살인이나 조직범죄에 연루된 수감자들이 브루투스가 시저를 암살하는 장면을 연기한다는 것은 설정에서부터 대단히 흥미롭다. 원로원이 배경이지만 시저의 암살은 엄연한 살인이고, 그것도 조직범죄다. 이들은 대중에게 인기가 높은 독재자 시저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모두가 알다시피 <줄리어스 시저>는 영국인 셰익스피어가 중세 말기 영어로 쓴 희곡이다. 그것을 현대 이탈리아어로 다시 번역해 공연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극중 수감자들은 “에이, 그건 나폴리 사투리라고 할 수 없지”라며 다툰다. 배경은 고대 로마이고 원작은 셰익스피어이며 공연장은 다시 현대 로마의 감옥이다. 영화는 수감자들이 연극을 제작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처럼 보이지만 실은 일종의 페이크다큐에 가깝다. 그러니까, 수감자들은 ‘교도소에서 <줄리어스 시저>를 무대에 올리는 수감자들’을 연기하고 있다. 재밌는 것은 수감자들이 극중극인 <줄리어스 시저>의 장면들을 연기할 때는 대단히 그럴듯한데, 오히려 자신들의 일상생활을 연기할 때는 매우 어색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연기 연습을 마치고 자기 감방으로 돌아와 “예술을 알고 나니 이 작은 방이 감옥이 되었구나” 같은 대사를 치는 장면은 브루투스와 시저, 안토니우스를 연기할 때와는 전혀 다르게 부자연스럽다(대사 자체도 일부러 저런 것을 넣었을까 싶게 오글거린다). ‘극중 인물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혹은 ‘극과 현실을 혼동한 나머지’ 수감자들이 서로 다투거나 불화하는 장면 역시 어설프기는 마찬가지다. 수감자 배우들은 시저와 브루투스 역할은 멋지게 해내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의 역할은 잘해내지 못했다.

<시저는 죽어야 한다>를 보고 나오면서 떠올린 것은 오래전에 한 연극연출가와 나눈 대화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연극을 싫어하는 사람 못 봤습니다. 보는 건 지루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하는 거 지루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군인이든 학생이든 정신병원의 환자든 막상 연기에 들어가면 바로 몰입하거든요.” “사람마다 연극적 자아라는 게 따로 있는 건가요?”

내 질문에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인간에게 연극적 자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연극적 자아가 바로 인간의 본성입니다. 어릴 적 소꿉놀이를 생각해보세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데도 아이들은 엄마, 아빠, 의사와 간호사를 연기합니다. 인간은 원래 연기자로 타고납니다. 이 본성을 억누르면서 성인이 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되려는 욕망, 다른 사람인 척하려는 욕망을 억누르면서 사회화가 되는 겁니다. 연극은 사람들 내면에 숨어 있는 이 오래된 욕망, 억압된 연극적 본성을 일깨웁니다. 그래서 연기하면 신이 나는 거예요.”

그의 말은 <시저는 죽어야 한다>에서 죄수들이 왜 <줄리어스 시저>의 배역은 태연하게 소화하면서 영화 속 자신의 모습을 연기하는 일에는 서툴렀는지에 대해 흥미로운 힌트를 준다. 우리가 가장 연기하기 어려운 존재,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끝없이 변화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게 무엇인지 영원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가장 연기하기 어려운 장면은 바로 우리의 일상일 것이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마릴린 먼로를 모델로 한 역작 <블론드>에서 조 디마지오와의 결혼 생활, 즉 끝없이 이어지는 일상을 힘겨워하는 마릴린 먼로의 육성을 들려준다. “대디, 난 무서워요. 영화 밖 실제 사람들과 함께하는 장면은 왜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기만 하는 걸까요?…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일상에서는 누구도 ‘컷’이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삶은 때로 끝도 없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것만 같다. 그럴 때 누군가가 이렇게 말해주면 참 좋을 것이다.

“자, 다시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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