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15회를 맞았다. 5월24일(금)∼30일(목) 메가박스 신촌에서 총 28개국 110편(장편 43편, 단편 67편)의 초청작이 상영된다. 개막작은 <올란도>의 감독이자 시적이고 실험적 영상으로 유명한 샐리 포터가 할리우드 신예인 엘르 패닝과 함께 작업한 소녀들의 성장영화 <진저 앤 로사>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꾸준히 자본/국가/군사주의 속에서 여성의 시선이 어떻게 노동/생태/평화의 의제를 제시하는가에 관심을 두어왔다.
올해엔 철학자 한나 아렌트, 여배우 마릴린 먼로, 디자이너 노라노 등 시대의 아이콘이던 여성을 재해석한 영화들에 주목해보자. 사실과 해석을 통해 시대를 앞선 혹은 시대의 산물인 그녀들의 사유와 실천에 감응하게 될 것이다. 누벨바그의 뮤즈 델핀 셰리그나 캐나다 아역배우 출신 사라 폴리에서부터 구혜선과 윤은혜까지, 대중의 뮤즈인 여배우들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찍은 영화들을 골라 볼 수도 있다. <2차 노출>의 리위와 다큐멘터리 <살마>의 킴 론지노트는 이번 영화제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아시아 신예 여성감독들이다. 제인 캠피온, 샹탈 애커만, 마가레테 폰 트로타 등 저명한 여성주의 감독들의 영화도 만날 수 있다(서울국제여성영화제 홈페이지 www.wffis.or.kr 참고).
<진저 앤 로사> Ginger & Rosa
샐리 포터 / 영국 / 2012년 / 89분 / 드라마 / 개막작
냉전과 섹스, 핵공포와 성혁명의 열기가 교착됐던 1960년대. 영화는 이 시기 진보적이고도 냉소적인 지식인을 부모로 둔 10대 소녀의 성장과 동요를 시적으로 포착해낸다. 샐리 포터는 자신이 체험했던 성장기의 시대적 공기를 영화에 담았다. 엘르 패닝이 새로운 페미니스트로 성장하는 진저를, 제인 캠피온의 딸 앨리스 엔글레르트가 윤리적 모험을 감행하는 로사를 연기했다. 영화는 진저의 감각, 사유, 내적 변화를 따라간다. 세계 몰락에 대한 시를 쓰는 진저는 원자폭탄에 반대하는 행동주의자다. 한편 그녀의 조숙한 단짝 친구 로사는 겁 없는 퇴폐적 자유주의자가 되어간다. 영화는 가족 해체, 내밀한 관계의 파열, 세계의 파국에 대한 소녀의 감성을 푸르고 축축한 영상에 잡아낸다.
<8일째 매미> Renirth
나루시마 이즈루 / 일본 / 2011년 / 147분 / 드라마
오랜 유충생활 끝에 겨우 몸을 얻어 7일을 울다 죽는 매미에게 8번째 날이 주어진다면? 영화는 어릴 때 아버지의 내연녀에게 납치되었다 돌아온 에리나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가족의 해체와 불행을 보여준다. 에리나뿐 아니라 해체되어 흩어진 가족들도 모두 어찌할 수 없는 불행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납치당한 자들이다. 누구의 손에서 자라더라도 인간성은 끝끝내 파괴되지 않는다는 강인함이 영화의 기저에 꿋꿋이 깔려 있다. <죽이러 갑니다> 등 감각적 문체로 여성의 내면을 그려온 가쿠다 미쓰요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영화로, 2012년 일본아카데미상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등 10개 부문을 차지한 화제작. 여성 친화적이거나 젠더 이슈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주는 남성감독에게 열린 섹션인 ‘오픈시네마’에 소개되었다.
<포 엘렌> For Ellen
김소영 / 미국 / 2012년 / 88분 / 드라마
인디 로커 조비가 아내와의 이혼에 합의하려면 양육권을 포기해야 한다. 문득 그는 딸이 보고 싶다. 엘렌에게 가는 길은 남루한 조비에게 강렬한 생의 염원을 부여한다. 우린 이 부성의 강도와 뉘앙스를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모성뿐 아니라 이 부성도 황홀하고 신비롭다. 풍경의 영화, 기상(氣象)의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영화는 조비가 이동하는 경관과 대기의 분 위기를 멈추어 오래 담아낸다. <방황의 날들>과 <나무 없는 산>의 김소영 감독의 신작으로, 제목 <포 엘렌>은 극중에서 꼬마 엘렌이 연주하는 서툴고도 애잔한 <엘리제를 위하여>에서 영감을 얻은 듯하다.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인상적 연기를 선보였던 폴 다노가 핏기없는 루저 로커 조비를 맡았다.
<2차 노출> Double Xpouser
리위 / 중국 / 2012년 / 105분 / 드라마
다큐멘터리와 사실주의 영화 성향이 강했던 리위의 사이코 스릴러 판타지영화로 여성의 욕망과 중국 현대의 역사성을 중첩시킨다. 노출 신과 도박장면으로 인해 중국에서 상영 금지되었던 영화 <로스트 인 베이징>의 감독이자, 현재 아시아에서 주목받는 시네아스트이며 중국의 떠오르는 감독인 리위의 작품이다. 전작에 이어 매혹적 여주인공 판빙빙의 섬뜩한 연기를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부친의 죽음과 모친의 살해를 목격한 송치는 자신의 남자친구와 외도하는 절친에게 복수한 뒤 원치 않던 잔혹한 사건에 연루되어간다. 우리가 지금 주목해야 할 중국 신예 여감독의 감각적이고 자극적이고 광적인 영화.
<도시, 예술가, 리노베이션> Gut Renovation
수 프리드리히 / 미국 / 2012년 / 81분 / 다큐멘터리
수 프리드리히는 1989년 예술가 친구들과 함께 브루클린 공업지대의 노동자 거주지의 오랜 창고형 스튜디오를 임대해 개조했다. 2005년 이곳이 주택지로 변경되자, 개발이익을 노린 부동산 투자자들로 인해 건물 임대 가격이 폭등했다. 공장과 예술가들의 스튜디오는 밀려나고, 도시는 산산이 해체되어 상류층을 위한 근사한 주거공간으로 바뀌어갔다. 도시가 자본의 공간이 아니라 삶과 기억의 공간이라는 것, 그리고 획일적 개발의 공간이 아니라 문화와 예술의 공간이라는 것, 그 문화와 예술이라는 것은 그 공간에 깃든 이웃들의 오랜 기억들이 축적되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영화는 잘 보여주고 있다.
<살마> Salma
킴 론지노트 / 인도 / 2013년 / 90분 / 다큐멘터리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다큐멘터리작가 중 하나인 킴 론지노트는 문제적 인물에 초점을 맞춰 강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번 작품에서는 인도의 상징적 여성인물 살마의 인생을 다루지만, 논쟁적이 아니라 관조적으로 카메라를 운용한다. 론지노트는 살마의 가족과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뿐 인위적인 질문이나 대화의 가공을 자제한다. 최근 강간-여성 살해 사건이 빈번한 인도에서 살마는 여성정치가로서 상징적인 인물이자 시인이다. 동시에 그녀는 가족 제도의 모순 속에서 오랫동안 고통받은 기억을 갖고 있다.
<짝을 찾아서> After Ucok
삼마리아 시만준딱 / 인도네시아 / 2012년 / 79분 / 드라마
영화감독의 꿈을 꾸는 글로리아는 결혼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국가주의적이거나 대중적 영웅물을 만들 생각이 없는 그녀에게 관심있는 투자자가 있을 리 없다. 엄마는 남들처럼 결혼하여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지만, 글로리아는 엄마처럼 살긴 싫다. 그녀의 주위에는 해적판 DVD 판매상인 마성의 레즈비언 임신부 니키와, 자신 영화의 주연배우였지만 현재는 화사원인 아쿤이 있다. <짝을 찾아서>는 영감으로 가득하진 않지만 진실로 낙관적이고 건강하다. 시만준딱 감독 특유의 코믹 터치가 인도판 뽕짝 경연대회에 출전한 14살 소녀를 다룬 <5분만, 어… 어… 어…>에서부터 이어지고 있는 영화의 살이라면, 모녀가 결혼과 여성의 행복에 대해 아웅다웅 다투는 언쟁들은 여성들의 의견과 차이를 드러내는 영화의 뼈다.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마가레테 폰 트로타 / 독일 / 2012년 / 110분 / 드라마
1962년 예루살렘에서 전범자 아이히만 재판이 열린다. <뉴요커>는 아렌트에게 재판 취재를 요청한다. 그녀는 냉철히, 그러나 놀라운 발견 속에서 재판을 관람하고 기록한다. 영화는 살롱과 서재, 전범재판소, 대학 강단을 오간다. 오로지 성실히 명령을 실행했을 뿐인 아이히만을 통해 아렌트가 무사유가 만든 ‘악의 평범성’을 발견하는 과정과, 그녀가 스승 하이데거와 조응하고 반목하는 회상장면이 교차 편집되는 설정은 너무도 탁월하여 지적 관객이라면 사유의 서스펜스를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안락의자에 누워 혹은 창 너머를 바라보며 아렌트는 오래 고요히 사유한다. 카메라는 이 이슥한 사유를 꾸준히 응시한다. 뉴저먼시네마의 대표 감독인 마가레테 폰 트로타가 로자 룩셈부르크, <위대한 계시>의 힐데가르트 폰 빙엔에 이어 문제적 여성 아렌트를 극영화로 만들어냈다. 톤, 밀도, 해석과 제시 모두 훌륭하다. 폰 트로타의 오랜 뮤즈 바버라 주코바의 연기도 오래 뇌리에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