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영객잔]
[신 전영객잔] 강우석 스타일을 지지함
2013-05-30
글 : 김영진 (영화평론가)
연륜이 가닿을 수 있는 시각적 인장 보여준 <전설의 주먹>

나에게 강우석의 영화는 늘 옛날 미국영화의 무구한 오락적 가치를 떠올리게 한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공공의 적> 이후, <한반도>를 제외하곤 난 늘 그의 영화를 일관되게 지지해왔다. <전설의 주먹>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영화가 예상만큼 흥행하지 못한 것을 두고 놀랐다. 나는 이 영화의 건전한 오락적 가치가 충분히 대중적으로 통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편의 영화의 흥행 여부를 작품 자체의 가치만으로 판별할 수는 없다. 다른 대다수 영화에 비해 긴 상영시간,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한계라는 것도 이 영화의 흥행 스코어를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웠던 언론의 호평에 비해 이 영화가 상대적으로 낡았다는 상당수의 비판적 시각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를 옹호하고 싶다. <전설의 주먹>이 다루고 있는 삶의 남루함이라는 소재에 외면할 수 없는 강우석의 윤리적 정직성이 스며들어 있고 그가 묘사한 인물의 유쾌한 자기 존엄 긍정에 동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업 스타일과 영화적 어법의 상관관계

강우석의 현장 지휘는 빠르고 효율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촬영현장을 두세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 늘 해가 지기 전에 그날의 촬영분이 끝났다. 그는 촬영을 마치면 배우들과 주요 스탭들을 데리고 어딘가 정해놓은 맛집에서 굵고 짧게 회식을 가진 다음 숙소로 돌아간다. 피터 보그다노비치가 연출한 존 포드에 관한 다큐멘터리 <디렉티드 바이 존 포드>를 보면, 존 포드가 모뉴먼트 밸리에서 서부극을 촬영할 때 네시나 다섯시에 촬영을 마무리하고 매일 밤 캠프파이어를 즐겼다는 일화가 나온다. 제작부는 촬영 준비만큼이나 매일 바뀌는 캠프 파이어의 놀이 메뉴를 정하는 것이 주요 일과였고 신선한 잔치 코스를 준비하지 못하면 존 포드는 매우 언짢아했다고 한다. 이 얘기를 강우석과 작업했던 배우와 사석에서 나눴더니 그의 답은 이랬다. “그건 강 감독님 현장과 똑같네요. 우리도 매일 그렇게 놀았어요.”

촬영현장의 작업속도가 빨랐다는 것은 거꾸로 조명 세팅에 들이는 시간이 그만큼 짧고 신속했다는 뜻이다. 강우석의 영화는 빛에 둔감하고 이는 그의 영화가 낡아 보이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는 드라마의 줄기와 등장인물의 감정선만 살아 있으면 다른 것은 크게 개의치 않는 유형의 연출자이다. 스탭들을 자주 바꾸지도 않는다. 류승완은 그의 그런 성향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강우석 감독의 영화에 대해 잘 지적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이준익 감독과 마찬가지로 그의 가장의식이 문제다. 그는 헤드스탭들이나 조/단역배우들을 웬만하면 늘 함께하던 충무로 사람들로 쓰려고 한다. 그 사람들의 생활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가장의식이 그의 영화를 좀 낡아 보이게 한다.” 강우석도 비슷한 말을 사석에서 한 적이 있다. “난 영화작업이 잔치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늘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과 즐겁게 영화 찍으면서 작업이 끝나면 맛있는 것도 먹고 서로 격려하면서 살아가는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것, 그 재미가 없으면 영화할 이유가 없다.”

물론 이것이 강우석 영화의 둔탁한 빛의 질감과 예산에 비해 감각이 떨어지는 듯이 보이는 프로덕션 디자인의 낙후성을 변명해주진 못할 것이다. 나는 거꾸로 이게 강우석이 영화를 대하는 어떤 태도, 이미 1980년대 말에 일찍 감독으로 데뷔한 그가 충무로에서 익힌 영화적 어법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영화적 프레임의 관능을 중시하는 풍토에서 연출을 익히지도 않았고 현장에서 정해진 예산으로 빠르게 영화를 찍는 법을 배웠다. 그가 영화적 앵글을 고민했다기보다 자기만의 호흡으로 비로소 접수한 듯이 보인 것은, 특히 클로즈업 효과의 강렬함 면에서 <공공의 적> 때부터였다. <실미도>에서도 그랬고 <공공의 적2>에서도 그의 클로즈업이나 대화장면 연출은 상투형을 넘어서는 간결한 인상이 진했다. 누아르의 분위기가 강한 원작 만화를 스크린에 옮긴 <이끼>에서도 그는 빛을 다루는 데 무심한 자신의 연출 스타일을 고수했고 대신 몇몇 인상적인 배우들의 결정적 순간을 담아냈다. 정재영과 유해진과 유선과 유준상은 자신들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가장 강력한 외형을 이 영화에 남겨놓았다.

이 남자들의 걸음걸이를 보라

<전설의 주먹>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영화에서 임덕규를 연기한 황정민의 어중간한 걸음걸이를 좋아한다. 그는 미적미적 걷는다. 황정민이 연기하는 임덕규는 한때 전도유망한 복서였으나 그 전망을 이루는 데 실패하고 아내와 사별한 뒤 손님이 들지 않는 국숫집을 운영하는 가난한 중년 남자로서, 딸아이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것을 보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무기력한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최적의 걸음걸이와 미적지근한 태도를 갖추고 있다. 이는 어린 시절의 임덕규를 연기한 (이미 <파수꾼>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던) 박정민의 간결하고 모나지 않은 절도있는 행동과 비교된다. 과거와 현재가 오가는 영화의 구성에서 젊은 임덕규는 민첩하고 군더더기 없는 자세를 갖추고 있는데 나이 든 임덕규는 어딘가 모르게 허술하다.

영화에서 대비해 보여주는 폭력장면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설명할 수 있겠다. 임덕규는 고교 시절에 복서로서 또래들의 폭력에는 가담하지 않으려고 한다. 주먹깨나 쓴다고 알려진 아이들이 그의 곁에 모이지만 임덕규는 끝내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그가 폭력을 쓰는 것은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부당한 판정패를 당한 뒤 친구들과 밤거리를 배회하면서 건달들과 호기있게 붙어본 것뿐이다. 상당히 양식화된 형태로 진행되는 이 패거리 싸움에서 어린 임덕규는 끝까지 절도있게 자세를 갖추고 싸운다. 여기서 그가 폭력을 행사하는 폼은 남자다운 기개를 유치하게 과시하려는, 링 위에서는 끝내 인정받지 못한 실력을 증명하려는 것이고 이 기개는 아주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서둘러 패배로 끝난다. 싸움실력을 과시한 임덕규와 친구들에게 하달되는 바깥세상으로부터의 주문은 폭력 하청배의 일이고 아이들은 그 일에 휘말려 허둥지둥 도망치거나 사로잡혀 인생을 그르친다.

나이가 들어 케이블TV의 격투기쇼 상금을 획득하기 위해 출전한 링 위에서 임덕규는 주먹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마냥 어색해한다. 여기서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쇼로서의 폭력은 어린 시절 호기있게 휘둘렀던 주먹마냥 가볍지 않은 실존적 근심을 임덕규에게 던져준다. 그는 잠깐 동안의 폭력행사로 인생을 그르쳤고 이제 청춘기를 바쳤던 복싱 실력을 돈을 벌기 위해 중인환시리에 써야 하지만 망설일 수밖에 없다. 어른이 된 상태에서 그는 폭력을 통해 존엄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벌기 위해 주먹을 휘둘러야 한다는 자본제적 폭력적 상황에 대해 맞서지도 못하고 망설인다. 영화의 대단원에서 그가 거북이라 불리는 싸움꾼과 힘겨운 격투기를 벌일 때 정두홍의 무술연출은 다소 억지로 버티고 있는 듯한 배우 황정민의 근육과 뼈가 실제로 훼손당하고 있는 듯한 충격을 관객에게 전해준다. 닭장처럼 조악하게 설계된 격투기장에서 황정민이 연기하는 임덕규가 실전무술의 기술을 조금씩 발휘하며 힘겹게 버틸때 사실상 이 장면들에서 연기하는 것은 배우 황정민의 얼굴이 아니라 그의 근육과 살들이다. 그는 돈과 명예 사이에서 확신을 갖지 못하고 버티는 상태에서 자기 존엄을 걸고 여하튼 싸운다.

이 대단원의 장면과 비슷한 감흥을 주는 장면은 임덕규가 친구들에게 린치당하고 처참한 몰골이 된 딸을 보고 충격에 빠져 있을 때 딸 친구들의 계략에 빠져 한적한 야산 공원에서 불량 학생들과 대결을 벌이는 장면이다. 임덕규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되풀이하는 듯한 아이들의 객기 어린 가학적 폭력본능을 다스리려 하지만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른 덕규에게 모욕을 준다. 이윽고 벌어지는 싸움판에서 임덕규는 전광석화와 같은 펀치로 아이들을 다 때려눕히지만 여기서 카타르시스는 발생하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도 때리는 자와 맞는 자의 의미의 맥락화는 이뤄지지 않는다. 임덕규는 이 폭력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지만 맞는 아이들은 모른다. 그건 마치 격투기쇼가 벌어지는 닭장 같은 결투장에서 돈을 위해, 또는 명예를 위해 대드는 상대방들과 달리 임덕규는 그 폭력의 무의미를 체감하는 것과 같다.

폭력은 남들에게 보여지기 위한 것으로서만 의미있다. 주인공이 아이들이었을 때 폭력의 행사는 남자다움을 증명하는 자랑스런 표식이다. 그 표식은 유치하고 무의미한 것이지만 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도 가학과 피학이 공전하는 이 폭력의 보여지는 것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격투기쇼를 계속할 것을 망설이는 임덕규에게 이요원이 연기하는 TV 쇼의 연출자는 아버지라면 돈이 되는 것이면 뭐든 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다그친다. 이 폭력은 돈을 벌기 위한 쇼로서의 도구이다. 강우석은 직설적 비유로 이 물리적 폭력의 실세를 자본주의적 위계관계의 폭력과 겹쳐놓는다. 유준상이 인상적으로 연기하는 이상훈은 학창 시절 단짝이었던 친구가 회장으로 있는 대기업의 홍보부장으로 일하고 있는데, 영화 속 우리가 그를 처음 보게되는 장면에서 그는 룸살롱에서 주먹에 피를 흘릴 만큼 기물을 때려부순 회장님의 폭력 뒤처리를 하고 있다. 그는 회장님이 자본제 사회에서의 갑의 권력을 우월하게 행사하는 동안 그 뒤에서 후유증을 처리하고 있다.

황정민의 임덕규가 미적거리는 동작으로 실패자의 존엄을 형상화한다면 유준상의 이상훈은 절도있는 동작으로 겉으로는 성공한 직장인이되 속으로는 끝없이 굴욕을 감수하는 자의 치욕을 감춘다. 이상훈이 어느 언론사 편집국장과 접대 술자리를 가졌을 때 상대방 부장은 독한 소맥잔을 연거푸 이상훈에게 강제로 권하면서 회장의 수하인 그의 지위를 조롱한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술잔을 다 받아마신 이상훈이 회사로 돌아올 때의 걸음, 성큼성큼 한 발자국도 멀쩡한 자의 자세를 잃지 않겠다는 듯이 걷는 반듯한 걸음은 유준상의 늘씬한 양복 매무새에 드러나는 육체적 존엄과 잘 어울린다. 그는 끊임없이 모욕받는 직장인이지만 그 모욕을 자신의 정중한 동작으로 감추고 승화한다. 유준상이 사내에 들어와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걷다가 치밀어오르는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우억거리고 난 다음에 재빠르게 자세를 추스르며 다시 씩씩하게 걸어가는 자세는 아름다웠다.

존엄, 순정, 그리고 다짐

<전설의 주먹>은 결국 인간의 자기 존엄 회복에 관한 이야기이고 사나이들의 순정에 관한 이야기이며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고 하는 다짐에 관한 영화이다. 아빠의 순정이 영화의 전면에 주제로 제시되고 있지만 동시에 격투기장의 난잡한 세트모형이 암시하는 우리 삶의 누추한 실상에 관한 영화이고 그것과 평행을 이루며 제시되는 대기업 회장과 조직폭력배 두목의 갑질하는 삶의 모욕에 관한 영화이다. 나는 이런 것들이 수박 겉핥기 식으로 보조 장치로 깔려 있다는 식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사회적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을 뿐이고 그것에 반응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담는 것에 영화가 주력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임덕규와 이상훈과 윤제문이 연기하는 유치한 마초 신재석은 그들의 경직된 육체들이 속절없이 허물어져가는 유사 스펙터클의 진경을 통해 그들의 마음까지 비춰 보여준다. 그들의 육체와 동작, 표정들은 대형 스크린에서 볼 수 있을 만큼의 탱탱한 긴장을 갖고 관객의 시선을 버티어낸다. 이것은 영화감독 강우석의 오랜 연륜이 해낼 수 있는 인상적 고정점이며 따라서 텔레비전 스타일로 퇴화했다거나 낡은 스타일의 효과라고 보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강우석은 삶의 누추함을 담는 한편으로 그것과 맞먹는 인간들의 존엄과 자존심을 자기 스타일대로 스크린에 옮겨놓았다. 평자에 따라 의견이 엇갈리겠지만 나는 <전설의 주먹>이 좀 더 많은 관객과 행복하게 만나지 못한 게 애석하다. 강우석은 우리에게 무구한 오락적 가치를 보여준다. 그는 우리 삶의 상처와 증상을 세밀하게 파헤치는 대신 그걸 견디어내는 인간의 시각적 인장을 묘사하는 중견감독의 재능을 증명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강우석이 이 영화로 상처 입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쓸쓸할 것 같다. 그가 새 영화로 관객과 행복하게 만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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