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원의 피카추]
[김정원의 피카추] 브라보 실버 라이프
2013-05-31
글 : 김정원 (자유기고가)
노인과 함께 영화를
<송포유>

70대인 우디 앨런은 말했다. “일흔넷 먹은 영감이 여자한테 수작 거는 걸 누가 보고 싶겠는가(그래서 60대에 수작 걸어 양녀하고 살림 차렸나). 노인들이 나오는 영화는 나한테도 지루해서 만들고 싶지 않다.” 아니,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최소한 한국에서는. 노인들이 나오는 영화는 노인들이 보고 싶어 한다. 손에 손을 잡고 극장으로 놀러가서 마음껏 자식 욕도 하고 늙으면 서럽다며 한탄도 한다.

인적이 드물어야 마땅한 평일 오후 강북의 어느 극장, 로비를 메운 노인들은 설레는 표정으로 <송포유> 팸플릿을 들고 있었다. 불길했다. 설마 저분들이 몽땅 <송포유>를 보러 온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이언맨3>도 하고 있잖아? <송포유>는 광고도 안 한다고. 그러나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지. 자그마한 상영관으로 밀려 들어온 노인들은 좌석 번호 따위 필요없다며 극장을 휩쓸더니 마치 단체 관람객처럼 나란히 뒷줄부터 점령하고 앉기 시작했다. 극장 내 노인 지수 83%. 왜 왔는지 모를 젊은 커플 두쌍과 누가 봐도 백수인 나는 기가 죽었다.

곧이어 전지적 작가 시점의 해설이 음성으로 지원되는 최첨단 영화가 상영을 시작했다. “저, 저런 몹쓸 놈! 아버지가 미안하다는데, 저걸 모른 척해?” 노발대발하는 할아버지들 옆에서 할머니들은 눈물을 찍었다. “그러니까 늙으면 서러운 거야, 훌쩍.” 아닙니다, 아버지가 먼저 얼굴 보지 말고 살자 하지 않았습니까. 혼자된 노인이 젊은 노래 강사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에고, 마누라 뜬 지 얼마나 됐다고 젊은 것하고 바람이 나서는, 쯧쯧.” 아닙니다, 친구입니다. 그리고 저 할아버지 이제 싱글인데 바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암으로 세상을 떠난 아내를 대신해 합창대회에 나갔던 할아버지가 침대에 누워있었다. “저런, 갔네, 갔어!” “에휴, 저렇게 가는구먼.” 아닙니다, 어르신들, 저분은 죽지 않았습니다. 코 고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어웨이 프롬 허>
<서편제>

<어웨이 프롬 허> 이후 5년 만에 겪는 일이었다. 때는 2008년, 반백수였던 나는 싸고 안락한 평일의 조조 상영을 노리고 영화를 보러 갔다가 사무치는 싱글의 서러움을 겪었다. 서로 손을 꼭 잡은 노인 커플 수십쌍 덕분에 극장은 가득 찼고, 영화가 끝나고 나와보니 로비는 2회 상영을 기다리며 서로 손을 꼭 잡은 노인 커플 수십쌍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랑이 꽃피는 아름다운 극장, 노인들은 속삭였다. “그러니까 바람 피우면 어떻게 되는지 봤지?” “늙으면 마누라가 최고야.” 나도 마누라가 되고 싶었다.

때는 다시 15년 전인 1993년, 10대 소녀였던 나는 노인들의 물결에 휩싸여 당황하고 있었다. 1X년 평생 그렇게 많은 노인을 한꺼번에 보는 건 처음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한국영화최초로 100만 관객을 돌파한 <서편제>는 관객 연령층 확대에도 기여했으니, 65살 이상 노인 관객이 무려… 0.3%에 달했다. 그런데 그 0.3%, 다시 말해 3천명의 노인 관객 중에서 10%는 그 극장에 있는 거 같았다. 게다가 고을은 세간에서 예향이라 일컫는 전주, 노인들은 소화가 판소리를 할 때마다 더불어 창을 했다. 이것이 진정한 마당극, 연기자와 관객의 벽을 허무는구나.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잔잔할 거라고 생각했던 <송포유>는 노인들의 방백과 더불어 파렴치한 연애와 느닷없는 죽음과 개망나니 아들이 등장하는 막장드라마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래서 매우 좋았다는 이야기다. 나는 막장드라마를 좋아한다. 3분마다 한번씩 동영상이 끊기는 유럽 시골구석에서 끝끝내 <아내의 유혹>을 전편 시청했던 나다. <송포유>를 보며 반세기 넘게 쌓인 경험을 라이브로 공연하는 어르신들 덕분에 지루할 뻔했던 영화가 정말 재미있었다. 그래서 노인 한명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거라는 옛말이 있나 보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