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산 기타에 줄을 갈아 끼우고 있는데 태일의 ‘애기’이자 ‘애인’인 혜원이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날 즐거웠어요. 우리 좀 많이 마셨죠?^^ 내일 영화 한 편 같이 보실래요?’ 누가 보면 어쩌나 싶어 얼른 삭제한다. 오해를 막기 위해 얘기하겠다. 태일이 혜원과 있는 자리에 나를 처음 부른 그날, 내가 <씨네21>에 태일과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혜원이 발설해버렸고, 아무것도 몰랐던 태일이 불같이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떠나자 남아 있던 혜원의 제안으로 우리 둘은 인근의 이자카야로 향했는데 그 뒤, 나 참, 내가 왜 이런 설명을 늘어놓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정말 우스운 일이다. 나는 답문자를 보냈다. ‘잘 들어가셨죠? 태일이는 좀 어떤가요? 아직도 화나 있나요?’ ‘태일이 오빠 얘기도 할 겸 만나요. 내일 오후 스케줄 없으시면.’
다음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광화문의 한 극장 앞에서 난 우산을 들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약속시간이 15분 정도 지났을까. 저쪽에서 “늦어서 죄송해요!” 라는 외침과 함께 그녀가 뛰어온다. 우산도 없이 가방을 머리에 얹어 비를 막으며. 물방울무늬 블라우스가 벌써 꽤나 젖어있다. 내 우산 속으로 서슴없이 들어온 그녀가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며 웃음을 터뜨린다. “하하. 아침에 나올 때는 비 안 왔거든요. 수업 듣는 내내 창밖만 계속 쳐다봤지 뭐예요.” 기다리다 뾰로통해진 마음이 어느새 누그러든다. “춥지 않아요? 감기 걸리겠네. 일단 편의점에 들어가서 우산이라도 하나 사죠.” “아뇨? 이적씨 우산 큰 거 들고 왔잖아요. 이렇게 대박 큰 우산 오랜만이에요. 아저씨 같애.” “이거 아저씨 우산 아닌데, 봐요, 안에 하늘이 그려져 있죠? 이거 마그리트 하늘인데.” “진짜? 우와, 신기하다. 마그리트… 화가! 맞죠?” “네.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이깟 얘기에 당황하고 우쭐해하는 내가 우습다. 말을 돌린다. “무슨 영화 보고 싶어요? <앤젤스 셰어>? <러스트 앤 본>?” “그냥 <아이언맨3> 볼까요? 오늘 날씨엔 막 때려부수는 영화가 어울릴 것 같아요.”
광화문 근처에선 <아이언맨3> 하는 극장을 찾기 쉽지 않아 명동으로 이동했다. 컴컴한 극장 안에 들어서자 평일 오후인데도 꽤 많은 관객이 앉아 있었다. 대부분 남자들이고, 혼자 온 사람들이 유독 많아 보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혜원이 재미있다는 듯 속삭인다. “이 사람들이 그 유명한 오덕들인가봐요.” “오덕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이런 영화 좋아하는 남자들이겠죠.” “남자들은 왜 이런 영화에 사족을 못 쓰는지 몰라요. 난 <트랜스포머> 같은 거 보면 오히려 졸리던데.” “천성 아닐까 싶어요. 두들기고 폭발하고 그러는 거 좋아하는 남자들의 본성. 미국의 어느 사회학자가 자기 아들만은 그런 전형적인 성역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칼, 총 안 사주고 여자아이들 가지고 노는 예쁜 인형들만 사줬대요. 어느 날 강의 마치고 돌아와 보니 글쎄 아들이 그 인형들을 엮어서 칼이랑 총을 만들어서 휘두르며 놀고 있더라나요.” “헤헤. 설마요.” “정말이래요. 근데 이런 영화 별로 안 좋아하면서 왜 보러 오자 그런 거예요?” “그냥요. 태일이 오빠 땜에 속도 상하고, 스트레스도 쌓이고… 아, 이제 시작해요!”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유머와 액션이 잘 뒤섞여 모두들 키득거리며 영화를 즐기고 있다. 나만 빼고. 자꾸 내 팔에 그녀의 팔이 닿는다. 두 팔 다 맨살이다. 초여름의 극장이 이렇지 뭐, 쿨하게 있어보다가 슬그머니 팔을 움츠린다. 오른쪽에 앉은 혜원을 힐끗 보니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영화에 빠져있는 눈치다. 나 자신이 바보 같다. 왜 멍청하게 이런 일에 당황하고 이래. 친구 애인이랑 친구 문제 때문에 만났다가 가볍게 영화 보는 거야. 왜 별 것도 아닌 것에 촌스럽게.
영화를 보고 가까운 카페에 앉았다. 커피를 홀짝이며 혜원이 묻는다. “이적씨는 아이언맨처럼 되어보고 싶어요? 돈 있고 기술만 있으면 저런 거 해 보고 싶나요?” 천진한 질문에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자 그녀가 덧붙인다. “이적씨라는 호칭 좀 불편하시죠? 뭐라고 불러야 되나 애매해서. 그냥 태일이 오빠처럼 오빠라고 부를까요? 그럴게요, 오빠.” “네, 저, 아니 저는 아무렇게나 불러도 좋은데, 편한 대로.” 그녀가 미소를 머금고 빤히 날 쳐다보고 있다. 아까 한 질문의 대답을 기다리나 보다. “아… 얼마 전에 자동차에 단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해본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몇주간 찍힌 영상들이 쭉 나오더라고요. 그중에 제가 술 마시고 대리운전기사 불러 집에 왔던 날의 영상도 있데요. 운전은 대리기사님이 하시고 제가 옆에서 수다를 떠는데 그 음성도 낱낱이 기록돼 있었어요. 한데 저는 도무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대화인 거예요. 당연하죠. 만취상태였으니까. 근데 블랙박스파일에는 눈앞의 도로 풍경에다 생생한 음성이 남아 있어요. 혀 꼬부라진 소리까지 적나라하게.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나에겐 없는 기억, 하지만 분명히 내가 경험한 일. 그게 어딘가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무섭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그래서 생각했어요. 차에 달린 블랙박스 같은 걸 우리가 안경처럼 쓰고 다니거나 아예 뇌와 연결해서 몸에 달고 다닌다면, 우리는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체험과 기억을 갖게 되겠구나, 그럼 우리는 기존의 인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겪는 최초의 인류가 되겠구나. 이제 SF가 남의 얘기가 아니구나… 이런 생각?” “재밌네요. 아이언맨이랑 무슨 상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재밌어요.” “허허, 그렇죠? 질문에 엉뚱한 답을 했네요.” 아까부터 왜 자꾸 장광설을 늘어놓는지 모르겠다. 대학생 앞에서 허영을 떠는 거냐. 그러기엔 그녀는 눈치 빠르고 영민하다. 섣불리 매혹되는 어린애가 아니다. 참담하다. 몇해가 지나도 어떤 부분은 전혀 성숙하지 않는다. 나는 다시 화제를 돌려본다. “태일이는 어때요? 아직도 나한테 화가 안 풀렸나요?” “별로 그런 거 같지 않던데? 그다음에 한번 만났는데 은근 뿌듯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태일이 오빠가 안 그런 척하면서 늘 좀 유명해지고 싶어 하잖아요. 적이 오빠가 나쁜 내용을 쓴 것도 아니니까, 아마 슬쩍 다시 연락할걸요? 문제는 적이 오빠가 아니라 전데요.”
그때 문자메시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태일의 문자다. ‘형님이 이번 한번만 봐준다. 새끼. 대신 원고료 반은 내 거야. ㅋㅋ 켄 로치 새 영화 같이 안 볼래? 위스키 좋아하는 인간쓰레기들 얘기 우리가 챙겨봐줘야지.’ 난 전화기와 혜원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