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전쟁의 근원 <폴 다이어리>
2013-05-29
글 : 송효정 (영화평론가)

<폴 다이어리>는 14살 소녀 오다의 일기를 바탕으로 한 실화다. 어머니의 죽음 뒤 오다가 갓 도착한 에스토니아는 낯설고 우울한 나라다. 새어머니는 관리인과 불륜에 빠졌고 아버지의 실험실에는 절단된 시체들이 가득하다. 이 속에서 조숙한 오다에게 일기 쓰기란 절규를 대체한 무엇이다. 죽음과 고독과 악의 예감 속에 휩싸여 있던 오다는 우연히 에스토니아 아나키스트 도망자를 만난다. 오다는 무명의 그를 ‘슈납스’라 부르며 깊은 관심을 보이며 함께 도망가기를 꿈꾼다. 독일과 러시아가 갈등하던 1차대전 직전을 배경으로 삼고 있으나 영화는 전쟁을 직접적으로 다루기보다 전쟁의 근원이 되는 악의 문제, 인간의 잔혹성, 교양주의의 기만 등을 에둘러 보여준다. 도저한 전쟁의 전조는 생체실험을 통해 우생학을 합리화하는 아버지의 음울한 실험실을 통해 드러난다. 비정상적 실험을 일부 소재로 한 이 영화를 보는 것은 시각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다소 힘들 수 있다.

이 영화는 기존에 알고 있는 전쟁로맨스, 심리스릴러 등 익숙한 장르로 편입 가능한 영화가 아니다. 그저 ‘슈납스’라 불리는 무명 아나키스트와 소녀 오다와의 관계 역시 익숙한 패턴의 로맨틱한 관계가 되기 어렵다. 그리고 소녀의 일기에는 성장도, 발견도 없다. 감독 크리스 크라우스는 전작 <포미니츠>(2006)를 통해 예술과 인간의 내적 폭력성을 연관지은 바 있으며, 이 방식은 <폴 다이어리>에도 유효하다. 그에게 음악이란 파시즘과 내적 관련을 지니는 어떤 것으로 보인다. 특히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 <숭어> 연주와 수술의 교차편집 장면에는 예술성과 잔혹함이 정열적으로 뒤얽혀 있다. 에스토니아의 해변을 배경으로 한 영상의 회화적 터치와 빛의 활용도 꽤 인상적이다. 코스튬드라마로서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패션과 소품의 활용도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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