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수행도량인 백흥암에서 이창재 감독은 300여일을 보내고 돌아왔다. 중앙대학교 영상학과 교수이기도 한 그는 안식년을 고스란히 <길 위에서>에 바쳤다. “처음엔 거창한 꿈을 꿨다. 절에 가서 수행도 하고, 촬영도 하고, 1년 뒤엔 둘 다 얻어서 나오리라! 그런데 그곳은 지옥이었다. (웃음)” <길 위에서>는 여성 무속인의 삶을 그린 <사이에서> 이후 이창재 감독이 7년 만에 선보이는 다큐멘터리다. 치열하게 정진하는 비구니 스님들의 삶을 이보다 더 가까울 수 없는 거리에서 관찰한다. 금기를 깨고 금기의 공간에 들어선 이창재 감독에게 백흥암에서 보낸 시간들에 대해 물었다.
-종교가 없는 걸로 안다. <길 위에서>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평소 피안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다. 생활하면서도 힘들 땐 수행에 기대는 편이다. 예전에 남방불교 수행법 중 하나인 위파사나 수행처인 호두마을에 갔었다. 그곳에서 칠순쯤 된 비구니 한분을 만났다. 매번 수행하면서 조시더라. 그분은 집도 절도 없이 평생을 수행하며 살아온 수좌승이었다. 수행의 길 위에 있는 그분에게서 비장함이 아니라 애잔함을 느꼈다. 언젠가 비구니 스님 얘기를 영화로 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사건을 맞닥뜨릴지 모르는 상태로 백흥암에 들어갔다. 촬영 전 찍고자 하는 이야기가 분명했나.
=수행 자체에 대한 갈등처럼 관념적인 주제도 다루려 했다. 아는 스님이 말하길, 20년 정도 수행을 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제일 괴롭다고 하더라. 1년을 수행했든 10년을 수행했든 깨치기 전까진 똑같다는 거다. 그 얘기에 솔깃했다. 그런 식의 비장함을 담고 싶었는데 그 이야기까진 들어가지 못했다.
-백흥암 큰스님 마음은 어떻게 움직여 촬영 허락을 받아냈나.
=백흥암을 찾아갈 즈음엔 거의 절 섭외를 포기할 단계였다. 4개월 정도 이 절, 저 절 다 가봤다. 모두 거절당했다. 일단 최선을 다하고 끝내자는 심정으로 백흥암에 갔다. 십 몇년 전에 지방 MBC에서 백흥암 비구니들의 생활을 찍어갔다는 얘기를 들었고, 큰스님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그 지방 MBC 국장은 섭외하기 위해 10년 동안 절을 찾아왔다고 하더라. 그러고 며칠 뒤 절에 한번 더 내려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스님이 잘 찍을 심지가 있느냐고 물었다. 앞으로 거친 일들이 많을 텐데 심지가 굳지 않으면 못 찍는다고.
-촬영 중 여러 번 절에서 쫓겨났다고.
=정식으로 4번 쫓겨났다. 결국 마지막으로 쫓겨나면서 크랭크업을 하게 됐다. 그곳에선 만장일치제로 의사를 결정한다. 한분이 촬영하기 싫다고 하면 촬영을 못한다. 무릎도 여러 번 꿇었고 삼천배도 하고 초콜릿도 뇌물로 바쳐봤다. 단 한번도 설득에 성공하지 못했다.
-상욱 스님, 선우 스님, 민재 행자처럼 젊은 스님들의 이야기를 따라간 건 접근이 쉬웠기 때문인가.
=행자의 시선이 곧 우리의 시선을 대변한다고 생각했다. 촬영 여건이 녹록지 않기도 했다. 한번은 큰스님한테 찾아가 ‘도저히 못 찍겠다, 아무도 인터뷰를 안 해준다’고 하소연을 했다. 촬영 초반 두달 동안은 건물하고 자연만 찍었다. 스님들이 카메라만 보면 사라졌다. 개인적으로 상욱 스님은 꼭 찍고 싶었다. 교수 임용을 앞두고 집에 편지 한장 달랑 남기고 출가한 상욱 스님을 보면서, 한때 구체적으로 출가를 생각했던 과거의 내 모습이 겹쳤다.
-절에 들어갈 때의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도 궁금하다.
=나올 땐 무슨 (마틴 캠벨의 영화에 빗대) ‘압솔롬 탈출’ 같았다. 촬영이 너무 힘들어서 쫓아내준 게 고마울 정도였다. 내적으로는 불교에 좀 스며든 것 같다. 스님들을 통해 나를 시뮬레이션해본 것도 참 소중했다. 일차적으로 다큐는 인터뷰이의 거울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관객의 거울이 돼야 하고 세 번째로 감독의 거울이 되면 그만큼 좋은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번 작품은 그런 면에서 만족감이 컸다.
-호스피스에 관한 다큐를 준비 중이라고.
=제목은 <림보에서 보낸 한철>이라 지었다. 호스피스 생활 한두달은 살아가는 시간이 아니라 정리하기 위한 시간들이라 하루하루가 소중하다고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을 생각해보고 싶었다. 죽음 직전에 깨달으면 너무 늦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