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일을 겪은 뒤에 그 놀라운 일을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예를 들어 마르코 폴로는 아랍 세계와 중국을 다녀와 <동방견문록>을 구술했지만 끝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까지도 <동방견문록>은 마르코 폴로가 뱃사람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이리저리 조합하고 윤색한 것뿐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꽤 있고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리스의 서사시인 호메로스는 트로이 전쟁이라는 당대 최대의 이벤트를 소재로 <일리아드>를 지었다. 이게 워낙 반응이 좋았던지 일종의 속편인 <오디세이아>도 만들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일리아드>의 스핀오프인 셈이다.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길고 긴 트로이 전쟁을 목마 하나로 승리로 이끈 꾀 많은 인물이다. 아킬레우스에게 무용에서는 뒤졌고 권세에서는 아가멤논을 넘어설 수 없었다. 그런데도 ‘독자’들은 그를 사랑했다. 호메로스와 그의 동시대 이야기꾼들은 이 사랑스러운 영웅의 천신만고 귀향에 얽힌 이런저런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여러 버전이 있었겠지만 현재까지 가장 널리 읽히고 있는 것은 호메로스의 버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오디세이아>를 어린이를 위한 축약본으로 처음 읽었다. 서사시가 아닌 소설풍으로 개작된 이 <오디세이아>에도 있을 것은 다 있었다. 뱃사람들을 홀리는 사이렌, 바위를 집어던지는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 등. 그런데 얼마 전에 완역 <오디세이아>를 읽게 되면서 몇번이나 놀랐다. 어린 시절에 읽은 축약본과 지금 읽고 있는 이 <오디세이아>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서사시 <오디세이아>는 우선 오디세우스가 전쟁이 끝난 트로이를 출발하는 장면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영웅 오디세우스가 포세이돈의 미움을 받아 끝없이 바다를 떠돌고 있는데 이 문제를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라고 항의하는 아테네로부터 막을 연다. 그 자리에 없었던 포세이돈을 제외한 뭇 신들의 묵인을 얻어낸 아테네는 행동에 나선다. 아테네는 오디세우스의 심약한 범생이 아들 텔레마코스를 찾아가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먼저 행동할 것을 촉구한다. 텔레마코스는 어머니 페넬로페를 노리는 구혼자들의 방해를 무릅쓰고 배를 빌려 항해에 나선다. 그러니까 이야기 초반에 항해에 나선 사람은 우리의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아니라 그의 듣보잡 아들이었다. 외로운 섬에서 오랫동안 요정 칼립소에게 붙들려 있어 이제는 고향에 돌아갈 꿈조차 잃어버린 오디세우스는 헤르메스와 아테네의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파이아케스에 도착하게 된다.
그런데 이곳에서 이 서사시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 등장한다. 잔치에 초대받은 오디세우스가 한 유명한 가객이 오디세우스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장면을 직접 보게 되는 장면이다. 데모도코스라는 이름의 이 가객(어쩌면 이 가객은 호메로스 자신일지도 모른다)에 대해서 오디세우스는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가 좌중에게 소개되었을 때 (아직 정체를 밝히지 않은) 오디세우스가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데모도코스!… 나는 모든 인간들 중에 특히 그대를 사랑하오. 그대는 아카이오이족의 불행을 그들이 행하고 당한 모든 것과 그들의 모든 노고를 마치 그대가 몸소 그곳에 있었거나 그곳에 있던 누군가에게 들은 것처럼 그야말로 제대로 노래하기 때문이오.”
그러면서 오디세우스는 ‘신청곡’을 내는데, 바로 자기 자신이 고안해 트로이성을 함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목마 얘기를 해보라는 것이었다. 가객이 이에 호응하여 트로이 목마 에피소드를 풀어놓자 당사자 오디세우스는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어 울음을 터트린다. 그것을 보고 파이아케스의 왕 알키노오스는 그가 조금 전 이야기의 주인공 오디세우스임을 알아차린다.
이때부터 오디세우스는 데모도코스로부터 ‘마이크를 넘겨받’아 자기가 직접 자기 고생담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그전까지 이야기의 저자가 데모도코스였다면 이 순간부터는 오디세우스 자신이 저자로 나서는 것이다. 이 얼마나 흥미로운 방식인가. 주인공이 자신의 이야기가 ‘상연되’는 현장에 갑자기 등장해 자기 입으로 자기가 겪은 이야기를 전해준다는 것.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유명한 이야기들, 예컨대 사이렌이나 키클롭스, “내 이름은 ‘아무도 아니’오” 등은 모두 이 부분에 들어 있다. 만약 <오디세이아> 축약본을 만들어야 하는 편집자라면 이 부분만 들어내 책으로 엮어도 된다. 그러나 호메로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디세우스가 자기 입으로 전해주는 이야기들은 당대의 독자들에게도 믿기 어려운 것들이었을 것이다. 호메로스는 일련의 정교한 서사적 장치를 통해 이 믿기 어렵지만 매력적인 오디세우스의 모험담을 매우 부드럽고 능란하게 의심 많은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서두에서 벌어진 신들의 회의는 바다를 떠도는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이미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오디세우스 자신에 의해 제시된 신비로운 고생담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라는 중층적 구조 안에 위치하게 되면서 그 진실성을 따질 필요가 없는 것으로 바뀌어버린다. 트로이의 목마를 구상해낸 그 ‘꾀바르’고 ‘지략많’고 ‘임기응변에 능’한 오디세우스가 하는 말 아닌가. 전부 꾸며낸 것이라 해도 좋고 전부 사실이라 해도 좋은 것이다. 어쩌면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머물게 된 어떤 섬에서 여자 만나고 애 낳고 그럭저럭 진부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갑자기 돌아와서는 제 과거를 근사하게 꾸며내고 있다, 라고 생각하는 독자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재밌는 것은 오디세우스 자신의 입으로 전하는 이 신비로운 전설들의 환상성 덕분에 아테네와 제우스, 오디세우스의 아들과 페넬로페가 등장하는 서두는 상대적으로 마치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호메로스는 마치 20세기의 포스트모던 소설가들처럼 이야기 구조를 중층적으로 배치해 여러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면서도 굉장한 설득력을 덤으로 확보하고 있다.
마르코 폴로가 거듭하여 <동방견문록>에 수록된 모든 얘기가 다 진실이라고 주장했음에도 그 진위를 오래도록 의심받는 것과 비교해본다면 <오디세이아>라는 텍스트가 가진 이 기묘한 핍진성과 설득력은 참으로 놀랍다. 작가의 역량은 여러 가지로 평가될 수 있겠만 그중 하나는 그가 말하는 이야기를 독자로 하여금 얼마나 그럴듯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느냐일 것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오디세이아>와 유사한 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항해 도중 지난한 고생과 신비로운 모험을 겪은 주인공은 먼 훗날 자신을 찾아온 한 소설가(그들은 만나기 전에 이미 서로를 알고 있었다!)에게 자신의 신비로운 고생담을 말해준다. 풍랑으로 부모를 잃고 호랑이와 구명보트에 올라 대양을 가로지르고 미어캣으로 가득한 식인의 섬에 기착하기도 한다. 이 믿기 어려운 전설을 우리에게 전하기 위해 작가는 흥미롭게도 2800여년 전 호메로스의 트릭을 채택했다. 현명한 선택이었고 이 부분은 리안 감독의 각색 과정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겪은 일을 ‘진심’을 담아 전하기만 하면 상대에게 전달되리라는 믿음 속에서 살아간다. 호메로스는 이미 2800여년 전에 그런 믿음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진심은 진심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진심 역시 ‘잘 설계된 우회로’를 통해 가장 설득력있게 전달된다. 그게 이 세상에 아직도 이야기가, 그리고 작가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