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비밀기지에 고립되다 <넘버스 스테이션>
2013-06-05
글 : 이기준

<넘버스 스테이션>은 미끈하게 잘빠진 중소형 첩보액션물을 표방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김빠진 밀실 스릴러가 되고 만 작품이다. CIA 요원인 엠머슨 켄트(존 쿠색)는 비밀유지를 위하여 무고한 인명까지 살상해야 하는 자신의 직업에 환멸을 느낀다. 결국 현장에서 머뭇거리다가 임무를 실패의 위기까지 몰고 간 그는 상관이 암호화한 난수방송을 중계하는 어느 외딴 ‘넘버스 스테이션’으로 재발령받는다. 숫자암호 전문가인 캐서린(말린 에커먼)을 경호하며 조용한 시간들을 보내던 어느 날, 출근하는 캐서린을 데리고 넘버스 스테이션에 도착한 엠머슨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당에 습격당한 중계기지를 발견한다. 괴한들에게 협박을 당한 캐서린의 전 당번 근무자가 CIA의 간부 열다섯명을 암살하라는 난수방송을 보냈음을 알게 된 엠머슨과 캐서린. 모든 통신이 끊긴 채 기지에 고립된 둘은 잘못된 명령을 되돌리고 습격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에게 의지해야 한다.

덴마크 출신의 감독 카스페르 바르포에드의 <넘버스 스테이션>은 무책임한 각본과 나태한 연출의 합작품이다. 영화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각각의 소재들이 흥미롭기에 그 실패는 더욱 안타깝다. 숫자를 부호화하여 전송하는 난수 방송이라는 소재, 밀실에 가까운 제한된 공간, 엠머슨과 캐서린의 독특한 관계 등 꽤 새로운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었던 부분들이 밀도있는 드라마의 탄력을 받지 못해 어정쩡하게 연결되어 있다.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다가 마지막에는 보안 유지를 위해 같은 편의 총에 희생되는 비밀 요원의 비애, 윤리적 딜레마, 악당과의 대립과 주인공들의 애정 관계가 끝까지 제각각 따로 논다. 비밀기지라는 설정에 충실하고자 공을 들인 넘버스 스테이션의 풍경은 적절한 명암의 조절없이 시종일관 어두워 눈만 침침하다. 게다가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한 숱한 미국영화에서 그대로 걸어나온 듯한 촌스런 악당들도 영화를 심상하게 만드는 데 한몫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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