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캐스팅으로 연기에 발을 들인 배우 박기웅은 길을 외우는 취미가 있다고 했다. “새로운 곳에 가면 그 동네를 많이 걸어다닌다. 처음 간 장소에서 느껴지는 설렘이 너무 좋아서.” 그 설렘이 어느 정도 가시고 나면,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두발로 직접 작성한 동네의 지도가 완성됐다. 이 소박한 취미는, 그의 연기 경력에 대한 비유도 된다. 2005년 영화 <괴담>으로 데뷔한 이래 매 작품 새로운 얼굴로 관객의 인지력과 기억력을 시험해온 그는, 새로 이사 온 동네를 산책하듯 30여편의 영화와 드라마를 통과해왔다. <동갑내기 과외하기 레슨2> 같은 코미디영화부터 한/중/일 합작 드라마 <풀하우스 테이크2>까지 목록도 다양하다. “어느 작품을 들어가든 첫 촬영 때의 그 간들간들한 기분을 정말 좋아한다. 그렇게 새 캐릭터를 몸에 익히는 게 그전 캐릭터에서 빠져나오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더라.” 그 간들간들함에 이끌려 그는 쉼 없이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확장해왔다.
2012년 겨울, 그가 드라마 <각시탈>의 기무라 슌지 순사의 옷을 벗은 지 2주 만에 도착한 곳은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달동네. 북한 특수부대 출신 남파간첩 중 최고라 불리는 원류환(김수현)이 이미 2년 넘게 잠복 중인 동네다. 그와 단짝이자 라이벌인 리해랑은 영화가 시작한 뒤에야 막 그곳에 도착하는데, 소명의식이 투철한 원류환에 비하면 처음 접한 남한 문물을 퍽 즐기는 눈치다. 오렌지 핑크빛으로 과하게 물들인 머리카락과 아낌없이 착용한 액세서리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하지만 웹툰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내 색깔을 입히려 했고, 그 과정이 재밌었다.” 처음 배운 기타는 요즘도 계속 칠 정도로 취미를 붙였고, 처음 맛본 최고난이도 액션도 의기충천한 태도로 소화했다. 주체사상보다 “나 혼자 그냥 폼나게 즐기다 가면 그만”이란 신조가 더 투철한 듯한 간첩 리해랑. 그가 건들건들거리며 즐긴 것들을 박기웅도 간들간들한 기분으로 즐겼던 모양이다.
리해랑도 박기웅도, 그러나 ‘나 혼자’ 즐기는 유아독존형 캐릭터는 결코 아니다. “함께 연기해보고 싶었던 배우들이 너무 많아 이 영화를 선택했다”는 박기웅은 상대 배우와 서로 채워줄 방법을 제일 많이 고민했다. “예를 들어 서상구 박사(고창석)가 류환이한테 5446부대 가족들은 이미 수용소에 수감됐다고 말할 때, 북한 최고위층 간부 아들인 해랑이의 리액션이 그 말이 사실임을 전달해야 했다. 그런 리액션들이 배역의 크기보다 중요한 것 같다.” 또래보다 주/조연작 경험이 많은 그는 연기를 자신이 전공한 그림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림 그릴 때 주제와 부주제를 다 그리면 허접해진다. 부주제는 적시적소에 들어가야 하고, 때로는 과감한 생략도 필요하다. 그래야 그림이 풍성해지더라.” 그 팀워크가 그가 드라마 <남자이야기>를 하면서 고(故) 박용하에게 배운 기본이자, <추노>의 그분이나 <최종병기 활>의 몽골 왕자 같은 작은 악역으로도 진한 잔상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잘 놀다 간다”며 스크린 너머로 몸을 던졌던 리해랑을 넘어 박기웅은 또 어디로 향할까. “아직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그의 앞에는 그러나 다양한 장르와 캐릭터를 품은 시나리오들이 산재하다. “무슨 복인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도 한 가지 이미지에 고착되지 않는 배우들을 매력적으로 느끼는데, 날 그렇게 봐주시는 것 같아서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급할 것도 없다. “어머니가 집에 걸어놓으신 경주 최 부자의 육연을 보며 자랐다. 그중 ‘자처초연’을 기억하려 한다. 항상 전화위복과 호사다마를 생각하려 하고.” 당장 다음 작품에서도 감초 역을 맡든 원톱 주연을 맡든 그저 “잘할 수 있다고 한 약속을 지키고자” 오늘도 수면 아래서 열심히 헤엄치고 있는 배우 박기웅. 그가 자신의 연기 지도에 앞으로 어떤 새로운 길들을 그려넣을까. 다만 그가 수많은 갈림길 앞에서 행복한 고민 중인 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