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다. 태일이 얘기하기 전까진 잊고 있었다. 무심코 <비포 미드나잇>을 봐야 하지 않겠냐고 태일에게 말했다. <비포 선라이즈>도 <비포 선셋>도 함께 봤으니 마무리까지 같이 해야 하지 않겠냐고. 그러자 태일이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은아도 불러야겠네.” 어떻게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은아는 우리 스무살 무렵 알게 된 친구다. 여러 학교의 다양한 친구들이 몰려다니며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글을 쓰고 연극을 만들어 올리던 모임에서다. 동아리와는 달리 기수를 이어가지 않았고 선후배가 따로 있지도 않았다. 그저 모여서 떠들고 노래하고 술 마시고 여행하는, 느슨하지만 열정이 넘치던 열명 남짓의 패거리였다. 나의 이십대 초중반을 수놓았던 그 모임에서 태일과 은아를 만났다. 은아는 디자인을 전공하는 미대생이었다. 늘 단발머리에 바지만 입던 그녀는 모임 안에서 남녀 모두에게 인기가 좋았다. 선머슴 같은 털털함이 싱그러웠다. 은아는 전공을 살려 우리가 잘 모르는 화가나 디자이너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전공자에게 얻는 정보는 늘 값졌다. 그녀가 가방에서 에곤 실레의 도록을 꺼냈을 때 모두 동시에 침을 삼켰던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우스운 광경이지만.
“<비포 선라이즈> 봤던 게 몇년도였나? 서울극장에서 봤지?” 태일이 묻는다. 이제 떠오른다. 태일의 기억이 틀렸다. <비포 선라이즈>는 은아의 자취방에 예닐곱명의 모임 친구들이 모여서 봤다. VHS 테이프였다. 나는 이전에 몇번 홀로 와본 적 있던 은아의 자취방이 처음인 것처럼 짐짓 연기를 해야 했다. 그 어색함 속에서 마주치는 그녀의 눈빛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날 본 <비포 선라이즈>는 사랑영화라면 질색하던 내게 유일한 사랑영화로 남았다.
<비포 선셋>을 볼 때는 우리 모임이 이미 효력을 다한 뒤였다. 1년에 한번, 송년회 정도로만 겨우 만나며 끈을 놓지 않을 뿐이었다. 모두들 자신만의 전장(戰場)에서 격전을 시작하고 있었다. 무턱대고 돌격하다 벌써 부상을 당한 친구도 있었다. 그러던 시절 은아가 <비포 선셋>을 함께 보자며 연락을 해왔다. 우리에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영화 아니냐며. 여기서 ‘우리’가 ‘우리 모임’인지 ‘그녀와 나’인지는 묻지 않았다. 만나보니 태일도 불려나와 있었다. 우리 셋은 논현동의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에단 호크가 비행기를 탔는지 안 탔는지에 대해서 열을 내며 각자의 논리로 떠들어댔다. 서른을 갓 넘긴 그때, 인생은 지금보다 조금 더 많은 수수께끼를 품고 있었다. 그날 밤 거나한 술자리가 끝난 뒤 태일이 은아를 바래다주고 가겠다며 나만 택시에 밀어넣었다. 달리는 택시에서 뒤돌아보니 은아는 태일이 그녀의 어깨에 두른 손을 떨쳐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주 우리는 정말 오랜만에 셋이 모여 <비포 미드나잇>을 보았다.
“남의 부부 부부싸움 하는 걸 두 시간이나 봐야 해? 돈까지 내고?” 극장을 나서며 은아가 농담처럼 쏘아붙였다. 태일이 킬킬거리며 거든다. “그러게. 저렇게 지겨우면 깔끔하게 헤어지지 말이야. 구질구질하게.” “태일아, 너 나 들으라고 얘기하는 거니? 그게, 헤어진다고 또 만사 해결되는 게 아니더라.” 은아는 이혼해서 초등학교 1학년 아들 하나를 친정엄마와 키우고 있다. 디자인 일도 다시 시작했단다. 태일은 꿈쩍도 않고 한술 더 뜬다. “그러니까 그때 나한테 오라니까. 엉뚱한 놈 만나서 험한 꼴만 보고.” “지금이라도 갈까? 왜, 애 딸린 이혼녀는 부담스러우셔?” 왁 웃음이 터진다. 이런 공기라면 함께 웃어줘야 한다. “그래도 에단 호크도 줄리 델피도 후덕해지니 좋다. 다른 무엇보다 큰 위안이 되네. 원래 모델 몸매인데 일부러 이 영화 위해 중년 몸 만든 거 아니야? 힐링을 위해? 아휴, 나도 이제 아줌마 다 됐고 너희도 많이 상했다. 둘 다.”
벽에서 이십년 전 냄새가 나는 맥줏집에 앉아 우리는 더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태일이 자못 비장하게 시작한다. “결국 사랑엔 가장 빛나는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이 지나면 퇴색한 껍데기만 남는데, 그걸 굳이 못 버리고 끌어안는 애들이 미련한 거야.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지. 아니냐, 유부남 이적?” “빛나는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감정들이 새로 생겨. 익숙함, 애틋함, 정, 동지애, 가족애, 이런 거.” “우와, 동준이는 아직 알콩달콩 사나 보네. 나는 모르겠어. 사랑은 새로 시작할 때가 가장 짜릿한 것 같긴 해. 그런데 이제 그걸 또 하는 건 엄두가 잘 안 나. 귀찮다기보다는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기복이 부담스러워서.” 은아는 나를 당연히 본명으로 부른다. 곧 죽어도 이적이라고 부르는 태일의 의도가 불순할 뿐. 그가 능청스레 받는다. “그러니까 그걸 두려워 않고 늘 도전하는 내가 진정한 로맨티스트 아니겠냐. 여기 유부남, 돌싱녀, 미혼남 다 있는데 누가 제일 행복해 보이냐? 누가 제일 인간 본연의 감정에 충실해 보이냐고?” “최소한 네가 행복해 보이진 않아. 오히려 더 초조해 보여.” “오, 이동준 세게 나오는데? 옛날 동준이가 아니네. 태일아, 이젠 네가 밀린다.” 은아가 웃으며 일어나 화장실로 향한다. 둘만 남았다. 웃음기가 사라질 무렵 잠시 숨을 고른 태일이가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묻는다. “초조한 건 너 아니냐?”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그가 다시 묻는다. “<아이언맨3> 봤지? 누구랑 봤냐?” 혜원 얘기다. 이럴 줄 알았다. 어쩐지 혜원 얘기를 묻지 않는다 했다. 하지만 그 생각만 하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코끼리 생각을 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한 뒤에는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다. 혜원 얘기를 안 하려고 버텨봤지만 오히려 머릿속에는 혜원 생각만 가득해졌을 것이다. 나는 부당한 오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태일을 노려보지 않을 수 없었다. “뭘 꼬나봐. 너 은아도 이런 식으로 건드렸던 거냐?” 그녀가 화장실에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영원처럼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