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의 날씨]
[영하의 날씨] 누벨바그의 속사정
2013-06-17
글 : 김영하 (소설가)
일러스트레이션 : 김현영 (일러스트레이션)
<로마 위드 러브> 속 샤워 부스와 예술가의 ‘무대의 조건’을 생각하다

샤워할 때면 명가수다. 관객은 오직 나 한 사람뿐. 거울과 타일로 둘러싸인 공간이라 울림도 좋다. 그런데 밖에만 나가면 수줍어서 노래를 못한다. 우디 앨런의 <로마 위드 러브>에 나오는 장의사의 고충이다. 이 놀라운 목소리를 우연히 욕실 밖에서 엿듣게 되는 미국인 사돈 제리, 왕년의 오페라 감독의 마음은 안타깝기만 하다. 혼자 듣기엔 너무 아깝다. 그래서 성악계 친구들에게 소개를 해주었건만 오디션장에서는 떨려서 노래를 못한다. 제리는 무대에 샤워 부스를 설치함으로써 이 고충을 해결한다. 이런다고 과연 해결될까 싶지만 극중에서는 되는 것으로 나온다. 그래도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그래도 저건 아니지 않나 하는 낭패감이 동시에 드는 희귀한 장면이다. 어쩌면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을 뒤집어놓은 장면인지도 모르겠다. 샤워를 하며 비장한 아리아를 노래하는 오페라 가수는 극장 3층에서 내려다보면 얼핏 비극의 한 장면 같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목욕 수건을 걸친 미친놈일 따름이다.

처음에 나는 이 ‘샤워실 가수’를 아마추어 예술가들에 대한 우디 앨런식 풍자로 보았다. 많은 아마추어들이 그렇듯 만만치 않은 실력을 갖추고 있다. 주변에서 슬슬 ‘이 정도면 예술로 밥을 먹고 살아도 되겠다’고 부추기기 시작한다. 당사자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펄쩍 뛰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자꾸 부추기면 은근히 “한번 해볼까” 하는 마음이 싹튼다. 이러다 ‘친구가 나 몰래 원서를 넣는 바람’에 오디션에 나가게 되는데 거기서는 보기 좋게 실패한다. 또는, 오디션에는 붙지만 그 이후로는 운이 따르지 않아 더이상 성공하지 못한다. 즉, 판에 안착하지 못하게 된다. 이때 길은 두 가지로 갈린다. 정신을 차리고 낙향을 하느냐, 무대에 샤워 부스를 설치해서라도, 즉, 자기만의 방식으로 약점을 커버하면서 살아남느냐. 그런데 ‘자기만의 방식으로 약점을 커버하면서 살아남’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잘못하면 샤워실 가수처럼 놀림감이 되기 십상이다. 우디 앨런이 샤워실 가수 에피소드로 보여준 것은 “아마추어 예술가도 자기 약점만 극복하면 충분히 프로페셔널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즉 스칼라 좌에서 노래하는 가수가 된다는 것은 노래 실력만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 거기에는 노래 실력 이상의 뭔가, 예컨대 최소한 담력이라도 필요하다는 것으로 나는 읽었다.

우디 앨런은 <브로드웨이를 쏴라>에서도 아마추어 예술가를 풍자한 전력이 있다. 제작비에 쪼들린 제작자 데이빗이 마피아 보스를 찾아가 제작비를 구걸한다. 보스인 닉은 자기 정부인 올리브를 출연시키는 조건으로 제작비를 주기로 한다. 그런데 올리브에게 딸려보낸 경호원 치치, 이 곰처럼 생긴 상남자가 자꾸 문제를 일으킨다. 그는 각본과 연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자꾸만 개입하더니 나중에는 아예 자기가 각본을 쓰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각본이 은근 괜찮다. 작가 데이빗은 결국 마피아 치치의 말을 받아적는 신세로 전락한다. 그런데 아마추어 예술가인 치치는 연극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자기 ‘작품’을 망치는 여배우 올리브, 보스의 애인을 죽여버리게 된다.

<로마 위드 러브>의 장의사와 <브로드웨이를 쏴라>의 경호원은 (이탈리아 혈통이라는 점은 빼고라도) 닮은 데가 많다. 이 아마추어들은 놀라운 실력을 지녔으나 스스로도 그걸 모르고 주변에서도 인정받지 못해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어떤 계기가 찾아와 그들의 놀라운 노래 실력과 작가적 능력이 발견된다. 그런데 이들은 이쯤에서 멈추지 않고 달려간다. 장의사는 샤워를 하면서까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경호원은 자기 작품과 너무 사랑에 빠진 나머지 감히 보스의 정부를 죽여버린다. 장의사는 오랫동안 지켜오던 품위를 잃고 경호원은 불귀의 객이 된다.

그런데 샤워실 가수의 에피소드를 이렇게 아마추어 예술가들에 대한 풍자로만 읽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프로페셔널 예술가들에게는 샤워실 가수의 면모가 과연 없을까? 있을 것이다. 왜 없겠는가. 한 작가에게 반복적으로 하나의 모티브가 지속적으로 관찰될 때, 즉, 한 작가가 어떤 특정한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그 모티브 혹은 서술 방식이 그의 샤워 부스일 것이다. 평생 물방울만 그리는 화가에게는 아마도 물방울이 그 화가의 샤워 부스일 것이다. 미녀와 살인사건이 등장하지 않으면 소설을 도저히 써나갈 수 없는 작가에게는 미녀와 살인이 샤워 부스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양한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하는 소설가는 샤워 부스에 의존해야 하는 소설가보다 더 훌륭한 작가일까.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작가는 ‘다양한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해야만 한다’는 식의 샤워 부스를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가 소속된 문학계가 한 주제를 평생에 걸쳐 집요하게 파는 것을 높이 평가하고 그게 프로 예술가의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곳이라면 어떨까? 아마 이런 문답이 오가리라.

“죄송합니다. 저는 한 주제를 오래 팔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여러 이야기를 산만하게 하는 것에는 정말 자신있습니다.” “뽑아드리지 못해 유감입니다. 작가는 무릇 한우물을 팔 줄 알아야 합니다. 다양한 이야기를 다양하게 하는 건 아마추어들의 특성이죠.”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샤워를 하지 않아도 노래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즉, 예술계의 현실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무대의 조건’을 자기에 맞게 바꾼다. 고전 오페라 장면에 샤워 시설을 설치해 주인공이 샤워를 하면서 아리아를 부르게 하면 되는 것이다. 앤디 워홀이 그랬고 백남준이 그랬다. 그들은 자기가 가장 잘하는 것, 그러나 아직 예술계가 용인하지 않던 것을 그대로 판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러고선 그게 ‘현대적’이라고 우겼고, 그렇게 오래 우기자 하나둘 믿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멀쩡한 동료들이 워낙에 말이 안되는 것들을 믿기 시작하자 처음에는 안 믿던 불신자들도 그쪽으로 확 쏠렸고, 나중에는 무대에 샤워 부스가 없으면 이상해 보이기 시작했고, 뭐 그런 일들이 벌어졌던 것이다.

영화사만 둘러봐도 샤워 부스와 함께 나타난 인물들이 수도 없이 떠오를 것이다. 장 뤽 고다르가 대표적일 것이다. 비평가 출신이었기에 영화의 기술적인 면에 무지했다. 그런데도 그냥 찍었다. 한마디로 막 찍었다(그러고 보면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는 제목과 형식이 일치한다). 촬영은 엉망이고 이야기는 건너뛰고 비약과 생략이 난무한다. 그런데 그는 그게 ‘새로운’ 영화라고 주장했다. 당신들이 알고 있던 영화는 이미 낡았다고 비판했다. 그의 비판은 먹혔다. 사람들은 고다르풍의 영화를 찍기 시작했고 그런 흐름은 누벨바그라 불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모든 무대에 샤워 부스가 설치되었고 그로부터 한동안 샤워하면서 얼마나 노래를 잘할 수 있느냐가 새로운 미학적 기준이 되었다.

내 샤워 부스도 있을까, 있다면 뭘까, 를 생각하는 아침. 음, 일단 샤워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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