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릉.” 김창완이 탄 오토바이가 굉음을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인터뷰 장소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카페 귀퉁이에 놓인 기타를 발견하더니 쓱 꺼내들고선 한줄씩 튕겼다. “사장님, 이거 조율한 지 꽤 됐죠?” 그의 손이 한줄, 한줄 옮겨질 때마다 기타는 제소리를 찾아갔다. “기타 줄이 잘 맞아야 소리가 깔끔하고 좋아.” 기자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했던 김창완의 입꼬리가 그제야 올라간다. 생각지도 못한 그의 엉뚱함에 다소 당황스러웠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 좋은 이웃집 아저씨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한편으로는 안심이 됐다. 영화 <닥터>에서 그가 연기한 성형외과 의사 최인범은 온데간데없었기 때문이다. 어린 아내(배소은)가 바람 피우는 광경을 목격한 뒤 자신의 분노를 무자비하게 표출하는 그 살인마. 때로는 신경질적으로, 또 때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메스를 휘두르던 살인마 최인범은 어떻게 봐도 상식적인 인간은 아니었고,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런 최인범이 김창완의 눈에도 상식적으로 보일 리가 없었다. “진짜 별 이상한 인간이 다 있다 싶더라고. 아무리 내가 못된 역할을 많이 했기로서니….” 김성홍 감독의 출연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쉽게 만날 수 없는 강렬한 캐릭터에 대한 미련이 남았던 까닭일까. 시나리오를 거절한 뒤 그는 “그 작품에 대해 가졌던 거부감의 정체를 다시 생각”했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유작 <살로 소돔의 120일>(1975)처럼 배우가 똥을 먹어야 하는 영화도 있는데 왜 나는 이 시나리오를 보고 본능적으로 거부했을까. 그 생각의 틀을 깨보자, 시나리오를 보면서 느꼈던 분노를 표현해보자 싶은 마음에 결국 <닥터>라는 수업을 듣기로 결정했다.” 연기를 ‘수업’에 비유한 그에게 <닥터>의 최인범은 어떤 수업이었을까.
“열심히 들었으나 까다로운 수업이었지.” 흔히 그렇듯이, 그 또한 처음엔 ‘어쩌다가 중년 남성 인범이 괴물이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캐릭터에 접근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을 금세 포기해야 했다. “인범의 살인 행각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만한 성장 배경이나 성격이 시나리오에는 없었어. 인물을 이해할 만한 특별한 팁도 없었어. 그저 인범은 과거의 어떤 트라우마 때문에 계속 살인을 저지르고, 그로 인한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불안감을 관객에게 애써 보여줄 뿐이야.” 인범의 행동은 어쩔 수 없이 애매한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을 거라는 사실을 김창완 역시 예상하고 있었다. “시나리오에 인범과 관련한 어떠한 정보도 없다보니 논리적인 연기까지 이르기엔 자그마한 틈이 보이더라고. 영화를 다시 보니 연기가 잘못 표현된 것도 있고, 시원하게 설명해주지 않는 것도 있고. 그런 것을 이 인터뷰에서 고백하는 거지.” 무덤덤한 말투에서 자그마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의 말대로 인범은 설명하기가 다소 애매한 구석이 있는 캐릭터이긴 하다. 하지만 살인마는 특유의 신경질적인 인상과 행동이면 충분했다는 그의 설명이 흥미로웠다. 어떤 광기를 보여주기 위해 배우가 악악대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살인마라고 해서 어떤 감정에 확 빠질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지금 마누라가 젊은 놈이랑 난리치고 있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망치다. 그 망치를 찾으러 가는데 무슨 복잡한 심정이 필요하겠어? 그저 망치를 찾으러 어딘가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만 하면 돼. 그 사람의 광기는 관객이 완성해주는 거 아닌가.” 덧붙이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전달하면 된다는 게 배우 김창완의 생각이다. 그렇게 빚어진 최인범의 무시무시한 광기는 곧 <닥터>의 지배적인 분위기가 되었고, 이는 김창완이 최근 연기했던 ‘악역’들의 에너지를 훌쩍 뛰어넘는다.
나쁜 놈, 또 나쁜 놈, 계속 나쁜 놈
“최근 10년을 나쁜 짓만 하며 돌아다니고 있어.” 병원에서 메스를 드는 대신 정치를 했던 드라마 <하얀거탑>(2007)의 우용길 부원장 이후 탐관오리 중의 탐관오리였던 ‘흰도포’(드라마 <일지매>(2008)), 이몽학의 난을 피해 홀로 의주로 도망친 못난 왕 선조(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2010))를 거쳐 바이러스 치료제 연구에 대한 열정이 과한 나머지 세상을 혼돈에 빠뜨렸던 최근의 천재 과학자 최수철(드라마 <세계의 끝>(2013))까지 악역을 주로 연기하고 있 는 자신을 두고 김창완은 그렇게 말했다. 알다시피 배우 김창완이 처음부터 악역을 주로 맡은 건 아니었다.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는 사람 좋은 ‘이웃집 아저씨’였다. 소탈한 미소를 보여주던 중 그는 “자신의 연기 스펙트럼 선을 넘어 악으로 확장시킨 드라마” <하얀거탑>을 만났다. 이후 지금까지 많은 감독들이 그에게 악역을 주문했다. “감독들은 내게 시나리오를 주며 그런다. ‘전에 했던 나쁜 놈과 다른 나쁜 놈’이라고. 내가 볼 때는 다 똑같은 나쁜 놈인데. 나빠봐야 거기서 거기인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거지. 인성이 나빠서 나쁜 짓을 했는지, 주어진 상황이 나빠서 나쁜 짓을 했는지, 어떤 폭력의 희생자라서 나쁜 짓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등 여러 이유가 있으니까.”
주로 악역이 들어오다보니 자신의 내부에서 각기 다른 악의 면모를 정확하게 골라 끄집어내는 게 매 작품 그의 숙제가 되었다. “특별한 노력 없이 시나리오에 쓰인 대로 편하게 연기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연기 접근 방식 자체가 많이 바뀐 것도 그래서다. “예전에는 시나리오를 몇번 안 읽었어. 지금은 정말 수도 없이 읽어. 암기하려고 읽는 게 아니라 대사의 말뜻을 찾기 위해 읽어. 사또의 말 한마디가 엄청난 뜻을 가지고 있으니까. 백번 읽을 때마다 그 뜻이 백번 다르니까 이제는 이걸 이렇게 할지, 저렇게 할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아.” 직접 쓴 동시 <대본 읽기>(지난 3월 격월간 동시 전문지 <동시마중>에 김창완은 오래전부터 써왔던 동시 5편(<어떻게 참을까?> <할아버지 불알> <대본 읽기> <공전> <잃어버린 신발>)을 발표했다)는 여느 회의실에서 볼 수 있는 대본 읽는 풍경을 그린 작품인데, 이 시를 읽어보면 대본 읽기가 그의 일상에서 큰 자리를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1985년 황인뢰 감독의 어린이날 특집극 <바다의 노래>에서 로커 역으로 배우로 데뷔한 지 어느덧 28년째가 되었다. 연기 인생 30주년을 코앞에 둔 그가 지금 특별히 맡고 싶은 역할이 있을까. 또 다른 못된 역할? 다시 이웃집 아저씨? 아니면 중년의 로맨스? “그거 로망이지! 그래. 좋은 생각이 났다. 우리 사진 촬영을 내 오토바이 앞에서 찍자고. 그러면 딱 그림이 나오지 않겠어? 오빠~ 달려!” 안타깝게도 그의 차기작은 중년의 로맨스물이 아니다. 7월20일 첫 방영되는 tvN 월화드라마 <유실물 센터>에서 착한 강력반 형사 역을 맡았단다. 로맨스물은 아니지만 다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역할이라 반갑다.
magic hour
김창완의 안경
김창완이 의사 가운을 입은 건 <닥터>가 처음이 아니다. 드라마 <하얀거탑>에서 연기한 우용길 부원장 역시 의사였다. 당시, 그는 안판석 감독의 권유로 안경을 벗은 채로 연기했다. “악역을 어떻게 그렇게 잘 소화할 수 있었는가”라는 당시 <씨네21>의 질문에 그는 이런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안경을 벗으니 되더라.” 이번 <닥터> 때도 같은 고민을 했지만 그의 선택은 “안경을 그대로 쓰는 것”이었다. “<하얀거탑> 때는 그전의 착한 이미지와 다르게 가려고 했던 거고, 관객에게 악역이 익숙해진 지금은 안경을 그대로 써도 문제가 없다.” 최근에 김창완이 안경을 벗고 연기한 악역은 드라마 <세계의 끝>의 11화 때였다. 국민을 혼란에 빠뜨리는 연설 시퀀스에서만 그는 안경을 벗고 천재 과학자의 이면을 표현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