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대종사’ 전문 감독이자, 홍콩 무협영화의 진정한 레전드 유가량이 지난 6월25일, 백혈병으로 투병 중 향년 75살로 세상을 떴다. 홍콩 무협영화를 얘기할 때, 장철과 호금전은 누구나 알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뒤를 이은 유가량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르겠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2>(2004)에서 더 브라이드(우마 서먼)에게 무술을 가르치던 백발의 스승 페이메이를 연기한 유가휘의 큰형이자, 그와 함께 <소림삼십육방>(1978) 등을 만들며 이른바 ‘소림사 영화’의 전통을 구축한 사람이라고 하면 어떤가. 물론 <신타>(1975)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하기 이전 장철 영화의 고정 무술감독으로 활동했다.
데이비드 보드웰의 홍콩영화 연구서 <플래닛 홍콩>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제8장 ‘쿵후 마스터 3인’라는 부분에서 장철, 호금전과 더불어 유가량을 당당히 독립적으로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1935년 광둥에서 태어난 유가량은 소림무술의 일종인 홍권(洪拳)의 5대 정통 계승자로, 영화계에서 활동했던 부친이 황비홍의 제자 임세영의 직계 제자였던 만큼 그는 황비홍 무술의 독보적인 계승자라 할 수 있다. 이후 쇼브러더스에 무술감독 보조로 들어간 유가량은 장철 감독의 눈에 띄어 서른이 넘은 나이에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1967)에서 악당 무리 중 한명으로 출연하며 영화에 데뷔했고, 이후 <금연자>(1968) 등에서 당가와 호흡을 맞춰 장철의 무술감독으로도 활동했다. 애초의 바람대로 감독으로 데뷔한 유가량은 출세작인 <홍희관>(1977)과 <소림삼십육방> 같은 일련의 소림사 영화로 홍콩 무술영화의 흐름을 단숨에 바꿔놓았다. 배우와 무술감독을 병행하던 의형제 유가영도 <쿵푸소자>(1977)로 연출 데뷔한 이후 <용의 가족>(1988) 같은 현대물도 연출했다. 그에 비해 막냇동생 유가휘는 장철의 <홍권과 영춘>(1974)으로 데뷔한 뒤 머리를 박박 민 채 배우로 활동했는데, 이연걸이 등장하기 전까지 황비홍과 방세옥 역할은 거의 그가 독차지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선구적으로 무술팀 유가반(劉家班)을 꾸려 원화평의 원가반, 성룡의 성가반, 홍금보의 성가반과 함께 홍콩영화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그러니까 장철과 호금전이 홍콩 무협영화의 미학을 일군 사람들이라면 유가량은 그 시스템을 만든 사람이다.
유가량의 영화는 남파 소림의 역사적 사실과 무림의 야사를 흥미진진하게 묘사했는데 일대종사 홍희관, 육아채, 황비홍, 삼덕화상 등 실존 인물의 의협심과 호방한 기개를 생생하게 그려냈으며, 북미지역에서도 개봉해 큰 인기를 얻었다. 그중에서 <오랑팔괘곤>(1983)은 데이비드 보드웰이 월터 힐과 존 포드의 <수색자>(1956)까지 인용하면서 극찬한 영화다. 일곱 아들이 아버지를 구출하기 위해 전장으로 향한다는, 최근 <천하칠검 양가장> 등 무수히 많은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진 실제 송나라 장군 양업과 그의 일곱 아들에 관한 이야기다. <오랑팔괘곤>에서 유가휘가 여동생 혜영홍을 구해서 밧줄로 칭칭 매 등에 들쳐 업고 1, 2층을 오가며 수십명의 악당과 싸우는 장면은 그야말로 압권이자 걸작이다. 그렇게 유가량은 자신이 갈고닦은 소림사 영화 장르에 거대한 종지부를 찍었다. <오랑팔괘곤>에도 출연했고 최근 엽위신의 <천녀유혼>(2011), 진가신의 <무협>(2011) 등에 출연하며 새로운 전성기를 맞은 혜영홍 역시 유가량이 발굴한 배우다. 당시 유가량 영화에 늘 홍일점으로 등장했던 혜영홍은 유가량과 함께 <장배>(1981), <십팔반무예>(1982), <장문인>(1983) 등에서 맹활약했다.
하지만 <오랑팔괘곤>이 나온 1983년은 성룡이 본격적인 첫 현대물인 <오복성>을 내놓으며 박스오피스를 강타한 해였다(감독 홍금보). 그해를 전후하여 <최가박당>(1982)이 홍콩영화 최고 흥행기록을 세웠고, 서극은 <촉산>(1983)을 만든 뒤 SFX 효과 지원을 위한 전영공작실을 세웠으며, 위기를 느낀 쇼브러더스는 신인 감독을 대거 기용했다. 완전히 뒤바뀐 환경에서 유가량은 고집스레 본토로 들어가 이연걸을 기용해 <남북소림>(1986)을 만들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물론 후배 원화평에게 많이 뒤처지긴 했으나 변함없이 홍콩 무협영화의 ‘마스터’로 활약했다. 이후 재기를 노리며 <취권2>(1994)에 무술감독 겸 배우로 출연했으나 성룡과 갈등 끝에 영화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따로 <취권3>(1994)를 만들면서 실질적으로 연출자로서 그의 경력은 끝나고 말았다(마치 <소오강호>로 갈라선 호금전과 서극처럼). 이후 10여년이 지나 마지막 연출작 <취마류>(2003)를 만들긴 했지만 시대의 흐름을 전혀 읽지 못하는 영화였다. 또한 마지막 출연작은 당대의 고수이자 명나라의 사형집행인 부청주로 출연한 서극의 <칠검>(2005)이며, 2010년에는 홍콩필름어워즈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다. 안타까운 것은 아직 환갑도 되지 않은 유가휘 역시 중풍이 겹쳐 반신불수 상태로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홍콩 무협영화의 화려한 날이 저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