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에서는 루니 마라가 출연한 <뉴욕타임스>의 광고 영상 ‘Touch of Evil’을 볼 수 있다. 공간 배경이 무중력의 세계인 듯 침대에서 일어난 루니 마라에게 저절로 가죽 부츠가 신겨지고 바지가 입혀진다. 카메라 앞으로 유영하듯 걸어가면 그의 머리에 모자가 날아와 얹히고, 오른손에는 지팡이가 날아와 쥐어진다. 루니 마라가 자신의 손에 있던 ‘악마의 눈썹’을 한쪽 눈에 붙이고 카메라를 쳐다보는 내용의 짧은 영상이다. 이 광고는 루니 마라의 두 가지 매력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하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으면서도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수수께끼 같은 표정이 묘하고 강렬하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눈썹 하나 붙였을 뿐인데 무표정에서 ‘악마’ 같은 표정으로 뛰어넘는 변신 능력이 인상적이라는 것. 마치 <소셜 네트워크>(2010)에서 연기한 당돌한 여대생 에리카에서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하 <밀레니엄>, 2011)의 거대한 상처를 안고 있는 컴퓨터 해커 리스베트로, 다시 <사이드 이펙트>(2013)의 우울증 환자 에밀리로 훌쩍 뛰어넘은 것처럼.
<사이드 이펙트>의 에밀리 역시 광고 속 루니 마라처럼 수수께끼 같은 우울증 환자다. 하지만 얼굴은 훨씬 더 무표정하고 (우울증 환자니까 당연하게도) 어둡다. 남편(채닝 테이텀)이 감옥에서 출소했지만 에밀리의 우울증은 여전하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 뱅크스(주드 로)의 신약 임상실험 제안을 받아들인다. 우울증이 조금씩 호전되던 어느 날, 에밀리는 신약의 부작용인 몽유병 증세를 보이며 주방의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칼에 찔려 죽어 있는 남편의 시신을 발견하고 놀란다. 남편을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수감된 에밀리는 약의 부작용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여자인 것 같다.” <롤링스톤>의 영화평론가 피터 트래버스가 진행하는 <ABC 뉴스>의 영화 꼭지 ‘팝콘’에 출연한 주드 로는 루니 마라가 연기한 에밀리를 한마디로 정리했다. 주드 로의 말처럼 에밀리가 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됐는지, 약의 부작용인 몽유병 증세가 왜 그에게 생기는지, 몽유병이라는 무의식 상태에서 왜 남편을 죽였는지 등 그의 우울증은 영화의 후반부까지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말수까지 적은 까닭에 에밀리의 슬퍼 보이고 어두운 표정만 계속 눈에 밟힐 뿐이다.
루니 마라는 “우울증 환자를 표현하기 위해 촬영 전 병과 관련한 여러 자료를 연구, 분석했”지만 “자료에 나온 대로 반영하진 않았”단다. 오히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지시를 따랐고 어느 장면을 ‘연기’했는지 모를 정도로 실제 내 모습을 즉흥적으로 보여준 작품”이라고 덧붙였다. 그 말은 들은 주드 로는 “그러고 보니 에밀리와 맞붙는 신에서 루니 마라의 실제 모습이 비치긴 했다. 음…, 그런데 루니 마라가 사실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주드 로는 루니 마라가 더 많은 것을 보여줄 가능성이 있고 신비로운 매력이 있는 후배라는 좋은 뜻으로 한 얘기일 것이다. 그 말은 루니 마라가 캐릭터에 자신을 내맡기는 유형의 배우가 아니고,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 점을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 좋게 본 것 같다. 스티븐 소더버그는“‘매우 클래식하다. 특히 무성영화에 어울리는 얼굴이라 촬영하기가 좋다’는 이유로 루니 마라를 캐스팅했다”고 말했을 정도니까. 어쨌거나 결과만 놓고 보면 에밀리의 우울증은 혼자만의 비밀을 간직한 사연 많은 얼굴이자 영화 전체를 지탱하는 어두운 정서이자 관객을 계속 이야기에 붙들어 매는 서스펜스 장치가 됐다.
캐릭터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
하지만 루니 마라가 자신이 가진 여러 모습 중 캐릭터에 맞는 면모를 꺼내는 유형의 배우인가, 그건 아니다. 루니 마라라는 이름을 대중에 각인시키고, 스티븐 소더버그가 그를 캐스팅하게 된 전작 데이비드 핀처의 <밀레니엄>. 미카엘(대니얼 크레이그)이 리스베트에게 이별을 암시하는 말을 하는 영화의 후반부 촬영현장(유튜브에서 이 장면의 메이킹 필름을 볼 수 있다)에서 대니얼 크레이그와 대사를 맞춰보던 루니 마라가 대뜸 데이비드 핀처에게 따졌다. “왜 두 사람이 헤어져야 하는 거죠? 미카엘이 전처에게로 가면 이 여자(리스베트)는요? 이 여자는 왜 계속 상처를 받아야 하는 거죠?” 작정하고 달려드는 루니 마라에게 데이비드 핀처와 대니얼 크레이그는 “너는 지금 너무 캐릭터에 몰입해 있어”라고 말하며 당황한다. 그 말을 들은 루니 마라는 감독의 선을 넘어서 미안한 기색이기보다 여전히 감독의 결정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당시 그가 감독의 결정에 필요 이상으로 흥분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영화에서 리스베트가 무심하게 보이는 건 무심한 성격이기 때문이 아니다. 상처로 가득한 상태에서 성장해왔기 때문에 상처가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에게 살아가는 과정이 상처였으니까. 그런 사람이 겨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나 싶은데, 이 남자가 전처한테 돌아간다고 하니 화를 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는 진심으로 리스베트를 동정하고 있었다. 아니, 리스베트에 완전히 몰입해 있었던 것이다. 그 점에서 루니 마라에게 <밀레니엄>은 “배우로서 더 많은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작품”이다. 덕분에 2012년 골든글로브상, 오스카상 여우주연상 부문 후보에 올라 메릴 스트립과 어깨를 나란히 했으며, 제니퍼 로렌스, 미아 바시코프스카, 제시카 채스테인과 함께 <배니티 페어>가 선정한 ‘2012년 올해의 영 스타’ 로 선정되기도 했다.
루니 마라가 하루아침에 데이비드 핀처와 스티븐 소더버그의 낙점을 따낸 벼락 스타는 아니다. 데이비드 핀처의 <소셜 네트워크> 오프닝 시퀀스에서 하버드대생 남자친구인 마크 저커버그(제시 아이젠버그)에게 퇴짜를 놓는 명장면은 잊기 힘들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바쁜 보통 호러영화의 여주인공과 달리 프레디와 ‘맞짱’ 뜬 여주인공 낸시는 침착하고, 용감했다(<나이트메어>(2010)). 데뷔작 <이유있는 반항>(2009)의 여주인공의 룸메이트 코트니는 대학 가기 전 남자 50명과 잠을 자는 게 소원인 조숙한 소녀인데, 특유의 진지하고 무심한 표정이 정말 웃겼다.
그녀의 신비로운 매력은 앞으로 테렌스 맬릭의 제목 미정의 신작, 스파이크 존즈의 SF 로맨스 <허>, 데이비드 로워리의 스릴러 <에인트 뎀 바디스 세인츠>에서 계속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필모그래피를 꾸준히 늘려가고 있는 그는 배우로서 자신의 성공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3살 때부터 주목받기를 좋아했다. 대가족이라 그랬던 것 같다(루니 마라의 아버지는 미국 프로미식축구리그(NFL) 뉴욕 자이언츠 구단 임원이다). 무언가를 표현하는 게 좋아서 지금까지 연기를 해왔고, 그것을 데이비드 핀처와 스티븐 소더버그가 좋게 봐준 것 같다. 당장 내일 아침 아무도 나를 선택하지 않게 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그저 현재 맡은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그의 말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겸손이자 더 많은 것을 보여주겠다는 욕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분명한 건 그의 새로운 길이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나이, 이제 겨우 29살이다.
magic hour
루니 마라의 초기작 <이유있는 반항> <데어> <위닝 시즌>
루니 마라의 팬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관객은 그가 이름을 알리기 전에 출연한 작품도 함께 챙겨 보면 좋겠다. 차분하고 성숙한 그의 최근 모습과 달리 의외의 면모가 많기 때문이다. <이유있는 반항>에서 여주인공의 기숙사 룸메이트 코트니로 출연한 그는 출연 분량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그중 기숙사 2층 침대에서 속옷 바람으로 누워 아무 말 없이 눈빛 하나로 남학생을 유혹하는 장면은 정말 빨려들어갈 정도로 강렬하다(유튜브에 돌아다니니 챙겨 보자). <데어>(2009)에서도 주인공 친구를 연기하는데, 그를 포함한 여학생 2명과 남학생 2명이 블루스 음악에 맞춰 흐느적거리는 춤을 추는 장면은 진지해서 더욱 재미있다. <위닝 시즌>(2009)에서 여자 농구선수로 출연해 코트가 닳도록 뛰어다니는 장면은 기특하다. 예나 지금이나 공통적인 건 영화에서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