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영객잔]
[신 전영객잔] 출구를 마련하지 않은 악몽
2013-07-18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코스모폴리스>는 지금 우리를 어디에 위치시키는가

<코스모폴리스>에 대한 꼼꼼한 통찰이 담긴 글들(김효선 “지금 여기는 지옥입니다”, 허문영 “한 자본가의 미학적 승리”, 김지미 “구원은 없어라”)을 읽었다. 그 통찰들을 능가하는 정치경제학적 분석을 할 자신은 없지만, 하나의 질문만은 덧붙일 필요를 느낀다. 이 영화를 감상하는 당신의 시선은 지금 영화 속 어느 자리에서 어느 곳을 향해 있는가? 영화를 보는 동안 이걸 묻지 않은 채, 관객인 우리가 마치 객관적인 자리에서 자본의 추상성, 권능, 환상을 보고 있다고 말해도 될 것인가. 혹은 이 영화를 자본주의에 대한 근심으로 읽어내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위의 질문을 경유하지 않고 이 영화가 형상화하는 자본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초월적인 자리에서 그 자본의 매커니즘을 포착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유사한 착각일 수 있지 않은가.

허문영만이 이 영화에 대한 섬세한 비평의 결론에 이르러 ‘우리의 자리’를 의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크로넨버그는 한 자본가의 미학적 승리를 묘사하며, 저항자들의 상상력과 성기능과 비미학을 비웃는다. 당신이 스스로 패배자 혹은 저항자라고 생각한다면, 이 비웃음을 반박할 수 있는가.” 나는 그가 글의 말미에 던진 이 비관적이고 잔혹한 질문에서 다시 시작해 영화를 들여다보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코스모폴리스>를 보며 자본의 무시무시함을 경험하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건 우리가 단지 그 시스템에 대응하지 못하는 무력한 희생자, 실패한 저항자이기 때문인가. 이 무시무시함에는 더욱 복잡하게 얽힌 무언가가 있지 않은가. 영화는 지금 우리를 어디에 위치시키며 지켜보고 있는가.

트래블링은 자본의 문제

영화를 보고 난 뒤, <코스모폴리스>가 시종일관 자아내는 불안감과 불쾌감과 기묘함은 영화를 지배하는 두개의 이상한 불균형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인물들의 등장과 퇴장에 대한 것이다. 에릭 패커(로버트 패틴슨)의 필요에 따라 리무진에 들어오는 인물들에게는 하나같이 퇴장의 과정이 삭제되어 있다. 이들은 한순간 등장하고 다음 순간 사라져 버리거나 다른 인물로 교체되어 있다. 이는 리무진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다. 동선이 사라진 이행. 이 영화는 매 순간 입구는 있으나 출구는 없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래서 이 여정은 분절적으로 경험되고 에릭을 비롯해 그 앞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인물들은 때때로 환영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에릭을 중심으로 리무진 안팎을 오가며 등장과 입구만 존재하는 이 여정이 기이한 꿈의 세계를 연상시키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다만 여기서 꿈같다는 인상보다 중요한 건 이것이 과연 누구의 꿈처럼 보이는지를 묻는 일인 것 같다. 이것은 단추 하나만 누르면 언제든 원하는 걸 불러올 수 있는 에릭의 만족을 모르는 욕망이 형상화된 그의 꿈인가? 가장 쉬운 답은 이렇겠지만,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에 대답하기 전에 또 다른 불균형에 대해 먼저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줄곧 리무진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안에서 밖을 본다. 우리가 에릭의 시점을 동일시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그 창을 통과하지 않고 밖을 대면할 수 있는 순간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이때, 주목할 건 리무진 안과 밖의 속도 차이다. 밖의 소란함과 급박함과 대비되며 거기 섞이지 않는 안의 여유로움과 고요함에 대해 언급할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건 리무진 안에서 본 밖의 풍경이 마치 고속촬영으로 트래블링을 하듯이 천천히 펼쳐진다는 사실이다. 물론 시위대와 장례 행렬, 그리고 미국 대통령의 등장으로 리무진이 속력을 낼 수 없다는 표면적인 이유가 제시되지만, 문제는 차가 느리게 움직인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안에서 감지하는 밖의 속도가 실제의 물리적인 급박함에 비해 느린 파노라마처럼 체험된다는 점이다. 리무진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앞서 언급했듯, 여유롭게 보이지만, 그 여유로움은 실은 자본의 초국적인 속도에 지배된다. 그 속도는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따라잡을 수 없는 미래의 속도라고 해도 될 것이다. 영화 말미에서 베노 레빈(폴 지아매티)도 자신의 추락에 대해 에릭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너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어.” 반면, 그 미래의 속도로 바라본 리무진 밖의 현실의 속도는 구체성을 잃고 층위를 상실한 채 느리게 평면화되고 있으며 안과는 만나지 못하고 병렬되는 시간대로 느껴진다. 차 안에 있는 우리는 마치 미래의 속도로 과거를 구경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차이와 간극, 즉 미래의 속도와 과거의 속도 사이에 사라진 것은 현재성이다.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지만, 거기서 어떤 만족도 느끼지 못하며 우울증에 시달리는 듯한 자본가 에릭이 그토록 섹스에 집착하고 고통에 매혹될 때, 그가 집요하게 찾아 헤매는 것은 현재성의 감각이다. 혹은 정신병에 시달리는 듯한 실업자 베노가 가짜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며 불안과 피해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그는 스스로를 의미의 주체로 위치시킬 현재성을 갖지 못한다.

리무진에 탄 냉소적인 인문학자는 “과거의 파괴가 미래를 만든다”고 말했다. 그 말에는 ‘현재’라는 단어가 없으며, 파괴와 재건만 있을 뿐, 누적된 시간의 서사가 없다. 우리는 현재성이란 과거가 미래로 돌아와 미래의 망각과 환상을 균열하는 바로 그 순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역사와 기억을 다룬 수많은 위대한 영화에서 경험해왔다. <코스모폴리스>라는 세계의 가장 끔찍한 점은 여기, 과거와 미래가 분리되어 존재하며 현재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순간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가 이 영화에서 리무진 안의 미래의 속도로, 그러니까 미래의 시점으로, 다시 말해 대부분의 평범한 우리가 가져본 적 없는 그 속도로 리무진 밖의 현실을 쳐다볼 때, 우리는 지금 우리의 현실을 과거로, 나아가 완료된 과거로 보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쥐 모형, 불에 타고 있는 사람, 더러움과 소음, 심지어 리무진 창 앞에서 양손에 쥐를 들고 괴이한 표정으로 안을 들여다보는(사실 선팅된 창에 비치는 건 자신의 얼굴이었을 것이다) 여인 등등은 미래에 결코 틈을 내지 못하는 미학적 스펙터클로서의 과거-이미지처럼 보인다. 그것은 에릭의 입을 통해, 현재의 구체적인 행위가 아니라 고통, 새로움 따위의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단어로 인식된다. 리무진 안에서 밖을 감각하는 그 우아한 숏들을 보면서 나는 “트래블링은 도덕의 문제”라고 말했던 장 뤽 고다르의 말을 비틀어 이렇게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코스모폴리스>에서 트래블링은 자본의 문제다. 이 영화가 자본가의 저택이 아닌 리무진을 전면화한 이유 중 하나도 리무진의 운동성이 바로 그 자본이 벌려놓은 시간적 간극, 현재적 감각이 거세된 시간성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자신의 욕망이 불쾌하다

그러니 앞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리무진 안과 밖을 오가는 에릭의 여정, 입구와 등장만 있는 그 꿈같은 여정이 그의 꿈이 아니라면, 누구의 것인가? 그것은 에릭으로 상징되는 무한한 자본의 욕망이 아니라, 실은 그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고 그 욕망을 욕망하는 우리의 두려운 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퇴장을 원하지 않고, 출구를 찾지 않으며, 그 안에 머물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을 마주하는 꿈. 이 영화가 불쾌하다면, 그건 영화가 자본의 초월적인 힘을 새삼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의 현실은 리무진 밖에 가깝고, 우리가 있어야 할 ‘올바른’ 자리도 거기라고 믿는 우리를 영화는 리무진 안의 안락한 인공성 안에 앉혀놓고, 그 밖을 물끄러미 보게 만들면서 안이 아닌, 그 밖을 지배하는 욕망과 마주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 우리는 에릭의 욕망이 불쾌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욕망이 불쾌하다. 슬라보예 지젝은 평등한 것을 정의로운 것으로 보는 발상의 전제에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향유하는 타자에 대한 부러움이 있고, 이때의 평등이란 타자의 향유에 대한 파괴를 의미한다고 지적한 적 있다(<폭력이란 무엇인가>). 인정하기는 싫지만 적어도 이 경우에 그의 지적은 우리의 불쾌한 욕망의 밑바닥을 설명해준다. 우리가 리무진 밖의 사람들에게 무력함을 느끼는 이유도 그들의 저항 방식이 자본에 대항하기에는 낡고 충분히 공격적이지 않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표면적으로는 리무진(으로 상징되는 시스템)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신들이 그 안에 포함되지 못한다는 열패감으로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를테면, 무정부주의자, 혹은 반체제 과격 인사로 소개되는 앙드레 페트레스쿠(마티외 아말릭)는 스스로를 권력과 부에 정면 대응하는 자라고 외친다. 에릭의 얼굴에 파이를 던지면서 그는 에릭을 파이로 공격하기 위해 3년을 기다려왔으며, 심지어 이 순간을 위해 대통령을 공격하는 것도 미뤘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도시락 폭탄도 아니고 가소로운 크림 파이 하나 던지면서 장광설을 내뱉으며 스스로에게 도취된 이 남자의 행위는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게다가 그가 파이를 던지는 순간 모습을 드러내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보건대, 그가 이 사진들을 황색 저널에 팔아 돈을 챙긴다는 사실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에릭과 그의 아내가 점심을 먹던 식당에 출현한 두 남자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 세상을 망령이 사로잡고 있다”고 소리치며 양손에 들고 있던 거대한 쥐를 식당 한가운데로 던지고 도망가는(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이들의 퍼포먼스는 대체 누구를, 혹은 어디를 향한 것일까. 심지어 그 식당은 한눈에도 상류계급을 위한 고급 레스토랑이 아니라, 이민자가 운영하고 서민들이 즐겨 찾는 식당처럼 보인다. 내내 무표정하던 에릭의 얼굴에 묘한 호기심과 생기가 도는 몇 안되는 순간이 여기 있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저항의 제스처를 취하는 대표적인 두 경우 모두 시스템에 최소한의 위협을 가하기는커녕, 마치 그 지루한 시스템에 즐거움을 주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이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코스모폴리스라는 장엄한 비극을 간질이는 작은 희극처럼 보인다. 영화에서 이들의 존재가 노골적으로 단순하고 뻔하게 그려진 탓에 분석한다는 것 자체가 민망하지만, 어쨌든 이들은 자본과 적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거기 기생하며 스스로를 가시화하고픈 욕망에 시달리는 이들에 가깝다.

이 영화에서 가장 예외적인 인물은 현실에서 구체적인 노동을 하는 리무진의 운전사다. 후반부에 존재를 드러내는 그의 얼굴에는 에릭이 그토록 동경하는 고통(고문)의 흔적이 있고 그에게는 에릭에게는 없는 삶의 역사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표면적으로는 위의 활동가들에 비해 에릭의 부를 동경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그만이 에릭의 가장 반대편에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역시 백인 중심 사회에 정착해야 하는 제3세계 출신의 충직하고 선한 피고용인 이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베노 레빈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에릭의 자기 파괴적 욕망에 대해 허문영은 “자본가의 미학적 승리”라고 지적했는데, 이 흥미로운 지적 앞에서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그렇다면 베노는 왜 그토록 에릭을 살해하려고 애쓰는 것일까. “널 죽여야 내가 살아”라고 그는 여러 차례 이야기한다. 그리고 총구를 에릭의 머리에 대며 “시시하게 죽으면 영웅도 못돼”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저 자신의 보잘것없는 처지를 감당하지 못하는 소심한 남자의 그저 병적인 복수심, 혹은 보상심리의 결과일 따름일까. 영화는 이 가련한 남자를 마지막까지도 시스템 승리자의 미학적 승리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며 저항의 완전한 실패를 말하는 걸까. 우리는 알고 있다. 몰락한 자본가 하나를 이제 와서 죽인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가 에릭을 죽인다고 해도 베노 레빈의 삶의 조건은 나아지지 않을 것이며 그에게는 범죄자의 신분 하나가 더 추가될 뿐이다. 그런데 베노의 행위가 어쨌든 억압된 복수심의 발현이냐, 결국 시스템에 조종당한 무력한 실패냐를 논하기 전에 눈여겨봐야 하는 이 영화의 모호한 선택이 있다. 영화는 베노가 에릭을 쏘기 직전에 끝내며 죽음의 장면을 생략한다. 에릭의 죽음은 다만 우리의 짐작일 뿐이다. 에릭은 온갖 거창한 이유와 발가락 무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살해를 합리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우스운 핑계를 대면서까지 살해의 순간을 지연하고 있다고 읽는 편이 더 타당해 보인다. “널 죽여야 내가 살아”라는 그의 말을 나는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다. 직장도, 가족도, 돈도, 성기능도, 최소의 인간적 존엄성도 상실한 그가 지금껏 버틸 수 있었던 건 아마도 모든 원인을 에릭에게 돌리며 그를 죽이는 상상을 하는 쾌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에릭을 진짜로 죽인다면, 그의 실존의 이유는 사라질 것이며, 아마도 다음 죽음의 차례는 별 도리 없이 그 자신일 것이다. 에릭이 죽으면 베노도 죽는다.

정말, 이 꿈에서 퇴장하기를 원하는가

죽음을 보여주지 않는 이 모호한 결말에서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앞서 말했듯, 에릭의 여정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끝이 나지 않는 꿈이라면, 에릭의 죽음은 이 꿈의 출구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꿈이 우리의 의지를 벗어나 스스로 증식하는 악몽이라고 생각하지만, 거기서 깨어나면, 그리고 에릭의 ‘자리’가 사라지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소음과 증오와 쓰레기가 뒹구는 진짜 혼돈의 악몽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나는 이 마지막 장면을 열린 결말이라고 생각하는 세간의 평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것은 출구를 끝내 마련하지 않는 닫힌 결말이다. <코스모폴리스>는 그 꿈의 막다른 곳에 불현듯 멈춰서 묻는다. 당신은 정말 이 꿈에서 퇴장하기를 원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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