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물리학 학사와 운영분석학 석사까지 마치고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던 이가 어느 날 갑자기 영화를 찍는다고 하면 다들 의아해할 것이다. 야론 질버먼 감독은 첫 다큐멘터리영화 <워터마크>(2004)전까지 영화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 작품을 통해 각종 영화제에서 인정받았고, 이어 두 번째 영화이자 극영화 데뷔작인 <마지막 4중주>를 통해 믿을 수 있는 배우들과 함께 완벽한 앙상블을 완성해냈다. 친구의 다큐멘터리 영화사업 계획을 세워주며 뒤늦게 영화계에 발을 들였지만 이제는 주목받는 감독으로 급부상한 그에게 영화, 음악, 인생을 적절히 조율해나가는 비결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클래식, 그중에서도 실내악을 무척 좋아한다고 들었다. 개인적인 취향과 체험이 <마지막 4중주>의 제작에 반영되었나.
=이 작품은 베토벤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 밝힌 베토벤 현악 4중주 14번에 대한 오마주이자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 작품 전체, 더 나아가 현악 4중주 자체에 대한 오마주이다. 거의 40분에 달하는 작품을 쉬지 않고 연주하다 보면 악기들의 음정이 완전히 어긋나게 된다. 이럴 때 연주자들은 중간에 잠시 멈추고 다시 튜닝을 해야 할까, 아니면 각자 음정을 조절해서 다른 단원들에게 맞춰가며 끝까지 연주해야 할까. 난 이것이야말로 오랜 세월 함께해온 관계에 대한 완벽한 은유라고 느꼈다. 인간은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변화를 겪기 때문에 관계 또한 그에 따른 끊임없는 조율이 필요하다.
-베토벤 현악 4중주를 설명하기 위해 T. S. 엘리엇의 시를 인용하는 오프닝이 흥미롭다.
=베토벤 최고의 걸작은 후기 4중주곡이라 생각한다. T. S. 엘리엇 역시 그 곡들에 영감을 받아 <4개의 사중주>라는 시를 썼다. 이 시들은 누가 뭐래도 엘리엇 작품 중 최고다. 엘리엇의 시와 베토벤의 후기 4중주곡 둘 다 ‘지금’의 시간개념에 대해 성찰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두 작품군은 상당히 유사하다.
-크리스토퍼 워컨,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 마크 이바니어, 캐서린 키너, 네 배우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영화다. 이런 캐스팅을 성사시킨 비결은 무엇인가.
=시나리오 덕이 컸던 것 같다. 물론 <매그놀리아>와 <마스터>의 캐스팅 디렉터였던 카산드라 쿨루쿤디스가 이들을 캐스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네 배우 모두 시나리오를 읽은 뒤 호감을 보였다. 그런 뒤 엄청난 악기 연습을 거쳐 우리의 ‘푸가’ 현악 4중주단이 탄생했다.
-배우들의 연주장면이 무척 사실적이다.
=실제 현악 4중주단인 브렌타노 현악 4중주단이 연주하는 모습을 5대의 카메라를 동원해서 가능한 모든 앵글로 촬영한 뒤 각각의 배우들을 위해 스토리보드를 만들었다. 그런 다음 배우 1명당 최소 2명의 레슨 교사가 배정되어서 짬이 날 때마다 틈틈이 레슨을 받게 했다. 덕분에 활을 켜는 손의 움직임이나 핑거링, 보디랭귀지 등 사실적인 연주 동작을 만족스럽게 담아냈다. 세계적인 연주자들인 만큼 악기 또한 최고급을 구해야만 했다. 어떻게 보면 흙과 나무의 느낌을 살린 악기들의 고급스런 갈색 색상이 영화의 전체적인 색감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도 할 수 있다.
-데뷔작인 다큐멘터리 <워터마크>에서도 나이 든 수영선수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인생의 황혼기에 대한 특별한 심미안이 있는 것 같은데.
=모든 것이 마음가짐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인생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은 노년도 신나게 즐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 될 수도 있다. 그러려면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도록 지혜와 너그러움을 쌓고,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데 에너지를 쏟는 훈련이 필요하다.
-감정적으로 격한 상태에 도달한 네 사람이 끝내 한 무대에 선다. 결국 예술의 완성이란 완벽함의 합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조정해나가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하나.
=무척 마음에 드는 견해다. 분명 그런 측면이 있다. 그러나 해석은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다. 그 부분이야말로 영화와 관객 사이에 조율이 필요한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