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가 개봉일을 9일 앞둔 8월5일 배급사를 갑자기 변경했다. 기존의 CJ E&M (이하 CJ) 대신 영화의 제작사 아이러브시네마(대표 정훈탁)가 직접 배급에 나선 것이다. 역시 CJ가 배급하고, 8월8일 목요일 오전 현재 개봉 8일 만에 450만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을 돌파한 <설국열차>와 2주 간격으로 개봉하는 까닭에 아이러브시네마는 CJ가 <감기>에 정상적인 배급 역량을 쏟아붓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해 내린 결정이라고 한다. 2004년 배급사로 출발한 아이러브시네마는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2004)를 시작으로 <얼굴없는 미녀>(2004), <S 다이어리>(2004), <새드무비> (2005) 등 여러 영화를 배급한 바 있다.
“정치권의 압력을 걱정해 내린 결정이 절대 아니다”
아이러브시네마가 이번 결정을 하면서 영입한 권지원 배급 담당 이사는 “이미 보도자료에 밝힌 대로 <설국열차>와 2주 간격으로 개봉하는 만큼 CJ가 <감기>에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판단해 직접 역량을 쏟아붓기로 한 것”이라며 “기자, 배급 시사가 진행된 뒤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겠지만 최소 500개 이상의 스크린을 확보하는 게 일단 목표”라고 제작사가 영화를 배급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배급 규모를 예상했다. CJ 역시 권 이사의 말에 동의했다. “개봉일을 9일 앞둔 상황에서 갑자기 결정된 건 아니다. 애초 6월 개봉 예정이었던 <감기>가 후반작업 일정이 미뤄지면서 <설국열차>와 나란히 개봉하게 된 것이다. 100억원 이상의 제작비가 투입된 대형 프로젝트이다보니 제작사로서는 <설국열차>의 흥행이 <감기>의 스크린 확보에 영향을 끼칠까봐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이같은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이라는 게 CJ 홍보팀 이창현 팀장의 말이다. 그는 “배급대행은 아이러브시네마가, 홍보마케팅은 기존대로 CJ가 맡기로 정리됐다”고 덧붙였다.
아이러브시네마와 CJ, 두 회사의 이번 결정을 두고 영화계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은 결정”이라며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현재 영화계 안팎으로 거세게 불거지고 있는 스크린 독과점 논란을 피해가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게 첫 번째 반응이다. <설국열차>가 8월8일 오전 기준으로 1036개의 스크린에서 상영되고 있고, <감기>가 제작사의 목표대로 500개 이상의 스크린을 확보한다면 CJ가 배급하는 두 영화는 확실히 스크린 독과점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 된다. 스크린을 최대한 확보해야 하는 제작사의 간절함과 그룹 안팎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상황에서 스크린 독과점 논란을 끝내고 싶은 CJ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투자배급사와 제작사가 서로 양보할 건 양보하고, 이해할 건 이해해서 내린 결정이라는 내용이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영화계 일각에서는 “CJ가 투자, 배급하는 대작 영화가 2주 간격으로 개봉하는 경우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며 “개봉일이 임박한 상태에서 ‘정상적인 배급 역량 확보’를 이유로 배급사를 바꾸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 실제로 CJ는 2011년 여름 시장에서 <퀵>(개봉일 7월20일, 제작 JK필름)과 <7광구>(개봉일 8월4일, 제작 JK필름)를 2주 간격으로 각각 473개(개봉 첫주 기준)와 733개의 스크린에서 개봉해 312만여명과 224만여명을 불러모은 바 있다.
무엇보다 한 제작자는 “100억원에 달하는 대형 프로젝트의 배급대행수수료를 양보하면서까지 CJ가 그런 결정을 내린 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름 시장을 장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혹여 영화가 흥행에 실패할 경우 배급대행수수료는 투자배급사의 리스크를 조금은 최소화할 수 있는 안전장치이기 때문이다. 또 형식적으로만 제작사가 배급하고 투자배급사가 배급대행수수료를 가지는 그림을 가정해볼 수도 있겠으나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명필름 심재명 대표는 “<감기>처럼 배급이 바뀌면 배급계약서를 새로 쓰기 때문에 그같은 가정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배급대행수수료를 포기하면서까지 배급을 변경한 건 제작자 정훈탁 대표의 의지가 컸다는 게 CJ쪽의 설명이다. 정훈탁 대표는 “100억원 이하의 프로젝트였다면 <설국열차>의 흥행을 감수하고서라도 투자배급사에 맡겼을 텐데 많은 제작비가 투입되다보니 최고의 환경에서 개봉하고 싶은 게 제작자의 심정”이라고 말했다. 이유가 무엇이건 투자배급사가 100억원 가까이 투자하면서도 배급대행수수료를 챙기지 않고 제작사에 배급을 일임한 것을 단순히 스크린 독과점을 피하기 위한 의도라고 받아들이기엔 비즈니스적으로 명쾌하게 설명이 되지 않는다.
두 회사의 이번 결정을 두고 “2천억원대 횡령 배임, 탈세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된 이재현 CJ그룹 회장과 관련해 그룹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정(치)권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목적”이라는 목소리도 있다. 지난 8월7일 언론배급시사회에서 처음 공개된 <감기>는 알려진 대로 감기 바이러스가 대한민국을 덮치는 전형적인 재난 블록버스터다. 재난 장르가 그렇듯이 이 영화에도 우둔한 정부 관리가 등장한다. 분당구를 지역구로 하는 국회의원은 나태하고 게으르며 재난 상황에서 제대로 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한다. 재난에 대처하기 위해 모인 정부 각계 장관들은 “백신을 빨리 개발해야 한다”는 의료진의 조언을 무시한 채 감염자들의 무조건적인 격리 수용을 지시한다. 물론 영화 속 묘사지만 관객에게 충분히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에서 국회를 비롯한 정치권이 불편해할 만하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확인된 바 없지만 아이러브시네마가 <감기>를 직접 배급하겠다는 보도자료가 발표되기 전, CJ엔터테인먼트 직원들 사이에서는 “회사(CJ)가 <감기>에 관여했다는 모양새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투자와 배급 크레딧을 삭제하려고 한다”는 풍문이 돌기도 했다.
실제로 CJ는 2005년 <그때 그사람들>(제작 MK픽쳐스)의 개봉을 한달여쯤 앞두고 정치적인 이유로 배급과 제작비 20% 정도의 부분 투자를 철회한 적이 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박지만씨가 이 영화의 상영금지가처분 신청에 대한 재판 결과를 기다리는 상황에서 내려진 결정이었다. 당시 CJ는 “정치권의 압력을 걱정해 내린 결정이 절대 아니”라고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이번에도 CJ 홍보팀 이창현 팀장은 “<감기>의 경우, 어디까지나 <설국열차>와의 윈-윈 전략을 염두에 두고 내린 결정이지 정치적인 이유는 절대 아니”라고 정치권을 염두에 두고 몸을 사린 게 아니냐는 추측을 강하게 부인했다.
몸 사리기와 외압 사이
그럼에도 그같은 정치적인 이유가 설득력있게 들린다면 그건 CJ가 현재 투자계약을 고려하고 있는 <N.L.L-연평해전>(제작 로제타시네마, 감독 김학순, 이하 <연평해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연평해전>은 2002년 6월 일어난 제2차 연평해전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제작비 15억원을 들여 촬영을 마쳤다. <씨네21> 912호 국내뉴스에서 CJ 이창현 팀장은 “<48미터>와 함께 <연평해전>은 올해가 정전 60주년이자 한국전쟁 63주년이라 마케팅하기가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투자와 배급에 참여하게 됐”고 “CJ엔터테인먼트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화려한 휴가>(2007)나 공군을 소재로 한 <알투비: 리턴투베이스>(2012)도 제작한 적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기획 단계나 촬영 전 이루어지는 보통의 투자계약과 달리 촬영이 이미 끝나고 후반작업 돌입을 앞둔 프로젝트에 뒤늦게 투자하는 건 갑작스러운 결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투자가 진행된다면 촬영이 이미 끝난 영화의 어떤 부분에 투자금이 투입될까. 로제타시네마의 한 관계자는 “영화의 완성도를 좀더 높이기 위해 보충 촬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CJ와 논의하고 있는 계약은 보충 촬영에 투입될 예산과 관련한 투자계약”이라고 밝혔다. “투자 규모가 항간에 떠도는 50억원이 맞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실과 다르다. 정확한 투자 규모나 방식은 아직 결정된 바 없다.” CJ 이창현 팀장 역시 “<연평해전>은 아직 결정된 게 하나도 없고 논의 중”이라며 “조만간 결정날 것”이라고 전했다. <연평해전>의 투자를 두고 CJ엔터테인먼트의 또 다른 관계자는 “주체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고 어느 정도 외압이 작용했는지 모르지만 이 영화의 투자는 정치적인 외압과 무관하지 않다”고 모호하게 말하기도 했다.
<연평해전>이 그렇듯이 <감기>의 갑작스러운 배급 결정 역시 정치권의 외압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외압이 있었건, 아니면 기업이 정치권을 의식해 먼저 몸을 사렸건 기업의 합법적인 비즈니스와 영화가 가진 표현의 자유가 정치적인 이유로 직간접적으로 제한받은 건 분명하다. 정치적인 외압이 없었다면 감기 바이러스처럼 번지고 있는 으슬으슬한 CJ발 풍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