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아침이면 오전 수업을 빼먹고 신주쿠교엔에 간다. 인적 없이 푸르고 축축한 정원엔 비와 선선한 공기가 그윽하다. 15살 다카오는 언젠가 멋진 구두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아빠는 돌아가셨고, 엄마는 연하 애인과 살림을 차렸고, 형이 독립을 시작하자 그는 혼자다. 6월의 비 오는 어느 날 공원 벤치를 찾은 다카오는 걷는 법을 잊어버린 듯한 이십대 중반의 유키노를 만난다. 투명한 꿈을 품은 애어른 다카오와 ‘그날’ 이후 거짓투성이인 어른아이 유키노는 고즈넉한 공원 정자에 앉아 비 오는 날이면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간다. 천둥소리, 희미하게 울리네,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린다면, 당신은 여기 있어줄까? 일본 옛 시집 <만요슈>에 나오는 시에서처럼, 비가 와야만 함께할 수 있던 다카오와 유키노. 장마 그리고 이어지는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도 소나기처럼 우연했던 이들의 만남이 지속될 수 있을까.
신카이 마코토는 전작을 통해 감성멜로와 판타지의 세계를 교차해 보여줬다. 그리고 분명 <언어의 정원>은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초속 5센티미터>를 잇는 신카이 마코토의 감성멜로다. 대기의 청량함, 하늘과 바람과 날씨, 계절과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물질들의 세계가 담담하게 잘 살아난다. 남녀 주인공의 관계를 이어주는 비는 제3의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문을 이루며 호수에 찰랑대는 가랑비에서 미칠 듯 퍼붓는 소나기까지 비의 향연은 주인공의 내면상태를 반영하듯 청량하고 소슬하다. 그리고 석양 속에 기적처럼 찾아오는 여우비 내리는 순간은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날씨가 인물의 정서에 관여하는 방식이 전작과 유사하여, 푸른 습기를 머금은 장마철과 인생 한 시절의 감성이 겹친다. 전작들에서 다소 소심하고 조심스러웠던 주인공의 내면이 보다 강건하고 굳세졌다는 점은 작은 변화다. 결말을 열어두어 미래에 대한 가능성과 예감을 남겨둔다는 점은 여전하다. <언어의 정원>에는 개인의 내면에 폐칩되어 있던 정서를 보다 보편적인 것으로 확장시키려는 감독의 노력이 반영되어있다. 내성적 순결성을 걷어내고 수긍 가능한 캐릭터를 살렸다. 비록 러닝타임은 46분으로 짧지만 서정적 전작들이 단편적이었음을 감안하면 서사적 안정성과 지구력은 늘어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영상 배경엔 손그림을 기본요소로 하여 아날로그적 감성을 살렸다. 살랑살랑 벚꽃이 지는 순간처럼, 후두두 비 내리기 시작하는 순간이 있다. <초속 5센티미터>가 봄의 애니메이션이라면 <언어의 정원>은 소나기 틈새로 비친 햇살처럼 싱그러운 여름 애니메이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