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손현주] 보통 사람의 미학
2013-08-15
글 : 이후경 (영화평론가)
사진 : 오계옥
손현주

<숨바꼭질>의 ‘성수’는 낯설다. 세면대 거울 위로 비치는 얼굴은 분명 1년 전 ‘백홍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울렸던 그 사내가 맞는데, 그의 무표정은 친숙하기는커녕 섬뜩하기까지 하다. 쌍꺼풀 없이 길게 찢어진 눈이나 가는 입꼬리, 창백한 피부에는 귀기마저 흐르고, 그 표정의 빈자리는 보는 사람을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든다. 병적인 결벽증을 지닌 중산층 가장 성수. 피부가 마찰을 못 견디고 찢어질 때까지 닦고 또 닦고, 씻고 또 씻는 저 남자는 무엇을 자신의 손에서, 자신의 얼굴에서,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서 저리 열심히 지워내려 하는 것일까. 이 스릴러를 꽉 채워주는 그 불길한 공백으로서의 성수를 기다리는데, 누구에게든 선뜻 두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동네 아저씨 같은 배우 손현주가 다가왔다.

데뷔 때부터 그는 ‘옆집 남자’였다. 마당극을 주로 했던 극단 ‘미추’를 떠나 1991년 KBS 14기 탤런트 공채에 합격한 뒤 처음 맡은 일이 농촌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였다. 영화 데뷔작에서도 비슷했다. <피아노맨>(1996)에서 그가 연기한 김 형사는 강력계에서 유일하게 구수한 사투리를 구사했다. 그 친숙한 인상이 연기인생의 문을 열어젖히는 그만의 열쇠이기도 했을 것이다. “마트나 시장을 가면 사람들이 ‘손현주씨’가 아니고 (팔꿈치를 툭 치며) ‘어이, 오랜만이야’ 그래요. 그게 정말 감사해요. 그분들이 제게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이.” 이후로 그는 장르, 역할 불문하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의 방바닥에 눌러붙은 감정들을 노래해왔다.

그 ‘옆집 남자’에게서 특별한 희극성을 발견해낸 것은 장진 감독이었다. 한국사회의 주변적 인물들로부터 희극적 요소들을 끄집어내는 재능으로 인정받았던 데뷔 초기의 장진 감독과 손현주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장진 감독이 내 졸업작품 <햄릿>을 기억하면서 신선하게 잘 봤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땐 한창 과도기여서 번역극 특유의 말투가 있었어요. 근데 난 그냥 한국형 햄릿을 해버렸거든.” 엘리자베스 시대 영국에서 태어난 비극의 대명사 햄릿을 한국 관객의 삶 가까이로 과감히 당겨올 줄 아는 이 기막힌 사내는 장진식 블랙 코미디의 한 지류를 담당했다. <기막힌 사내들>(1998)에서 “6시간 동안 똥 한번 못 누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취조를 당하는 억울한 죄수나, <킬러들의 수다>(2001)에서 “막 질문을 하길래 막 대답을 하니까 무죄! 딱 그럽디다. 대한민국 살 만한 나랍디다?”라며 형사에게 깐족거리는 건달 탁문배나, 처한 입장은 달라도 똑같이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부조리한 웃음을 날렸다.

이후 2000년대 중반에는 그 해학을 좀더 밀고 나갔다. 2004년에는 <투 가이즈>에서 국제 스파이 조직 두목에게 권총으로 총알이 아닌 ‘똥침’을 날리는 국가정보원의 임 차장부터 <라이어>에서 신‘장’원을 잡은 모범 시민의 성 정체성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변태 박 형사, <맹부삼천지교>에서 온몸을 짝퉁 명품으로 도배하고서는 생선 가게나 지키고 있는 어설픈 건달 ‘돼지 아빠’까지, 연달아 세 영화에서 ‘간’을 맞추는 역할을 했다. 그런 그의 간간한 연기는 언뜻 임기응변 같지만 실제로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약속”이라 여기는 그의 꼼꼼한 준비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연리지>(2006)에서 두 주인공의 사랑에 눈물 맛만 배지 않도록 웃음을 끼얹는 주치의도, <더 게임>(2007)에서 조카가 처한 기괴한 상황에 비굴하고 능글맞은 제스처를 뿌려대는 건달 삼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6년이 흐르는 사이 그는 TV에서 대한민국 보통 중년 남성의 한을 대표하는 얼굴이 되었다. 백홍석으로 짊어졌던 짐을 어떻게 내려놓아야 할까 고민할 즈음, 다시 영화가 손을 내밀었다. 먼저 웹툰을 원작으로 한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피도 눈물도 없는 북한군 장교 김태원이 있었다.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겠더라고요. 박정률 무술감독이 그러대요. ‘손 선배가 김태원을 하게 되면 처음부터 끝까지 손현주라는 사람이 무술을 해야 한다. 합도 직접 짜야 한다.’ 내가 그런 거 뭐 짜보기나 했나요.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온전히 내 몸으로 끝까지 부딪혀본 게 좋았어요.” 그렇게 그는 가짜 눈알과 깊게 파인 흉터와 너덜너덜해진 귀를 장착하고 자기 손으로 키운 ‘들개’들을 자기 손으로 죽여가며, 백홍석의 얼굴과 기억을 지워냈다.

팍팍한 현실로 돌아가는 길도 조금은 다르길 원했다. 김태원에 버금가는 두 포커페이스, <숨바꼭질>의 성수와 <황금의 제국>의 최민재가 그 길이 되어주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 뺏는 자와 뺏긴 자 사이”에 위치한 그들은 백홍석과 전혀 다른 옷차림과 신분을 하고 백홍석을 울렸던 세상 속에 다시 발을 들여놓는다. 우선 성수는 형 대신 양부모에게 재산을 물려받아 미국에서 유학하고 현재는 카페를 운영하며 초고층 아파트에 사는 전형적인 중산층 가장이다. 그가 형에 대해 갖고 있는 트라우마를 대면하고 다시 형을 찾기 위해 이름 없는 괴한과 섬뜩한 숨바꼭질을 벌이는 과정이 이 스릴러물의 골자다. “형과 관계된 과거를 숨기고 싶은데 자꾸 기어나오니까 혼란에 빠지는 거죠. 나(성수)는 그 표현을 (비누칠을 하듯 두손을 비비며) 안 했으면 좋겠더라고. 하면서 나도 미치겠더라니까. 그런 강박증으로 새어나오는 거죠.” 어쩌면 한국사회가 억압하는 것들을 결국 불러내도록 만드는 얼굴. 그의 한층 창백하고 무서워진 얼굴이 소환해내는 것은 또 저 비천한 현실이다.

그의 인물들은 그러나 끝내 누구로부터도 무엇 하나 빼앗지는 못할 팔자다. <황금의 제국>의 최민재도 아직까진 그렇다. 그는 성진그룹이라는 ‘황금의 제국’의 왕좌를 탐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성골과의 싸움에서 빈번히 지고 마는 이 진골이 또 동정심을 불러일으킨다. 서민 남자를 주로 연기해온 손현주의 필모그래피가 민재라는 캐릭터 아래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그래요. 신분 상승을 했으면 좀 가져야 하는 거 아니냐. 근데 별로 못 갖거든요. 근데 뭐 저만 못 갖나요. 다들 가졌다 못 가졌다 하죠. 근데 유독 제가 좀 가진 것 없게 생겼나봐요. (웃음)” 현실에서는 “말로만 셀 수 있는 1억달러보다 내 호주머니 안에 있는 2만5천원이 돈”이라 믿는 남자, “실제로 남의 집에 숨어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뭐 같이 살면 되죠”라며 웃는 남자, “이 시대의 거울이 되겠다는 큰 뜻은 전혀 없었고 흘러오다보니 이렇게 됐다”며 소탈하게 말하는 남자 손현주. 어떤 낯선 얼굴도 친밀하게 만들어버리는 그는 “연기란 아슬아슬한 줄타기”라 말하지만, 실제 그의 연기도, 그의 연기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늘 넉넉하기만 하다.

magic hour

친절한 현주씨

시나리오에 모든 답이 들어 있다고 해도 결국 현장에서 배우들이 공간에 발을 디디고 손으로 물건들을 만지면서 덧붙이는 디테일들이 있다. 영화 <숨바꼭질>의 곳곳에도, 영화로는 첫 단독 주연을 맡은 배우 손현주의 손길이 묻어 있다. 그중 한 장면이 성수가 실종 소식을 듣고 처음으로 형의 집을 찾아갔을 때다. 형이 혼자 살았다는 집을 조심스레 살피는데 화장실에서 생리대를 발견한다. “원래는 깨끗한 칫솔, 샴푸와 린스 정도만 있었어요. 그런데 요즘 그런 건 남자 혼자 사는 집에도 다 있잖아요. 그래서 생리대를 놔보자고 했죠. 조금만 더 친절하게 표현해주자는 거죠. <황금의 제국> 촬영하면서도 그래요. 유상증자니 맹지니 하는 걸 저도 처음 들어보는데 시청자는 어떻겠어요. 조금만 더 설명해주자고 늘 그래요.” “연기도 분명한 연기를 선호한다”는 그에게 그런 친절함이란 대중과의 소통에 대한 책임감의 동의어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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