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x&talk]
[틸다 스윈튼] 연대의 체험 예술가의 창작 과정에서 뺄 수 없어요
2013-08-16
글 : 김혜리
사진 : 최성열
<설국열차>의 배우 틸다 스윈튼

“우리 가족사진인가요? 이런, 역기능 가족 같으니!” 사진기자의 셔터가 콩 볶는 소리를 내는 표지 촬영 현장에 봉준호 감독, 송강호, 크리스 에반스와 나란히 선 틸다 스윈튼이 유쾌하게 속삭였다. 그가 쓰는 가족이라는 말의 뉘앙스는 ‘내 편, 우리 식구’ 같은 배타적인 의리의 느낌과는 다르다. 틸다 스윈튼에게 시네마를 포함한 모든 예술은 사랑에서 비롯된 노동이고, 영화는 집단 창작 과정을 통해 혈연과 국적, 활동 부문을 뛰어넘어 비전의 공동체를 짓는 작업이다. 방한 이틀째 레드 카펫 시사회를 마친 틸다 스윈튼은 새벽 1시를 넘긴 시각임에도 강남에서 따로 모인 <설국열차> 스탭들의 뒤풀이 자리를 찾아가기도 했다. 기자가 스윈튼을 스크린 밖에서 처음 본 것은 뒷날 <아이 엠 러브>를 연출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단편 다큐멘터리가 상영된 2002년 베니스영화제에서였다. 출품작의 제목은 <틸다 스윈튼: 러브 팩토리>. 이 배우를 알아갈수록 절묘하다고 탄복하게 되는 제목이다. 틸다 스윈튼은 필모그래피의 대부분이 예술영화로 채워진 희귀한 국제적 스타다. 최근 10여년간 저예산 예술영화 3편을 투자 단계부터 감독과 밀고 끌며 힘들게 완성한 이 ‘아방가르드의 그레타 가르보’는 <설국열차>를 통해, 여태 경험한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이나 유럽 예술영화와 다른 새로운 창작 방식을 접한 사실을 흡족해하고 있었다. 짧은 인터뷰를 아쉬워한 <씨네21>에 스윈튼은 스코틀랜드에서 추가 답변을 보내왔다. “더 많은, 더 나은, 어떤 것이든 필요하면 알려줘요”라는 서두의 메시지에는, 그가 임하는 모든 크고 작은 일에서 그러하듯 ‘사랑으로’(with love)라는 수식어가 당연스레 포함돼 있었다. 다음은 915호 커버스토리에 이어 지난 7월29일 서울에서 진행된 인터뷰와 서면 문답을 합친 대화다.

-<설국열차>에 나오진 않지만 당신이 연기한 메이슨이 기차의 권력자 윌포드와 실제로 어떤 관계이고, 어쩌다 기차의 2인자 자리에 오르게 됐다고 상상했나요.
=메이슨은 윌포드에게 홀렸고 그의 리드를 받으며 춤추기를 바랍니다. 메이슨의 과거사는 가상의 <설국열차> 프리퀄과 관계가 있죠. 사실 속편을 꼭 보고 싶은 영화지만 가능성이 없다는 건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고. (웃음) 승객들이 기차에 오르기 전 어떻게 살았고, 기차에 탑승하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는 재밌는 이야깃거리예요. 더구나 메이슨같은 중년은 기차가 출발하기 전까지도 꽤 긴 인생을 살았을 테죠. 난 메이슨이 특별할 것 없는 삶을 살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도서관 사서나 비서였을 수도 있고요. 내내 비굴하게 살아오다 난생처음 권력을 휘두를 기회를 잡았을 거라는 상상도 했죠. 지금 맴도는 생각이 있어요. (망설임) 섣부른 아이디어일 수도 있지만(그는 인터뷰 전날밤 <설국열차>를 시사했다) <설국열차>의 승객들은 독일식 표현을 빌리면 ‘글라우벤자츠’(Glaubenssatz, 신념체계)에 따라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열차에는 ‘나는 죽이고 싶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나는 죽고 싶어’ 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는 살고 싶어’라고 열망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메이슨은 살고 싶다고 말하는 쪽이죠. 극단적 관점인지는 몰라도 ‘살고 싶다’는 것이 반드시 현실적인 소망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우린 결국 다 죽을 테니까. 송강호가 연기한 남궁민수는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인물이고 가장 현실적이죠. 한편 커티스는 죽여야 할 사명을 띤 동시에 마음 한쪽에 뿌리내린 극단적 죄책감(shame) 때문에 스스로 죽고 싶어 하는, 복잡한 곤경에 처한 인물인 것 같아요.

-<설국열차>의 메이슨 역은 이를테면 <케빈에 대하여>나 <줄리아> <아이 엠 러브>처럼 거의 모든 장면에 당신이 등장하는 영화의 연기와 사뭇 다른 종류의 퍼포먼스가 필요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예를 들어 <케빈에 대하여>의 에바나 <아이 엠 러브>의 엠마가 괄호 쳐진 공백을 품은 인물이라면 메이슨은 대답으로 꽉 찬 캐릭터잖아요.
=확실히 영화의 매 프레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주는 무게가 있죠. 하지만 어떤 면에서 메이슨은 <줄리아>의 줄리아 랑 닮은 인물이에요. 두 사람 다 거짓말쟁이니까요. 줄리아도 메이슨과 똑같이 일종의 ‘퍼포먼스’를 하며 사는 인물이에요. <아이 엠 러브>와 <케빈에 대하여>에서 당신이 ‘공백’이라고 표현한 대목은 반대로 인물의 표리부동함, 정직성(sincerity)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메이슨은 ‘윌포드 신화’라는 프로그램의 운반 장치예요. 광신도인 동시에 그 종교의 지도자이기도 한데 알다시피 그런 리더가 가장 위험하죠.

-체코 세트에서 한국영화 특유의 현장 편집이 연기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쳤나요.
=만약 영향을 줬다면 쉬웠을 텐데…. 현장 편집은 작업을 쉽게 만들어주더군요. 전반적으로 봉 감독은 프로덕션을 세세히 컨트롤하면서도 장면의 핵심을 표현하는 법은 자유롭게 맡겨 해방감을 줬어요. (찻잔을 들어 올리며) 앞 숏은 찻잔을 잡기까지이고. 이어질 숏은 찻잔을 받침에 내려놓은 다음이라고 쳐요. 그러면 봉 감독은 “여기서 필요한 건 찻잔을 잡는 순간이 다예요. 하지만 당신이 결국 찻잔을 다시 내려놓기만 한다면, (찻잔을 휘둘러 보이며) 그사이에는 잔을 집어던지든 소파에 홍차를 쏟든 자유예요”라고 말하죠. 즉 확실한 구조와 구조 내부에서의 한없는 자유를 느낄 수 있었어요.

-1990년대에 <올란도>의 제작비를 구하기 위해 올란도로 분장하고 찍은 사진집을 만들어 샐리 포터 감독이랑 칸영화제에 들고 갔다면서요. 에릭 종카 감독과 처음 대면해 <줄리아>를 찍기로 의기투합한 장소도 칸이었고, <설국열차>의 시작도 2년 전 칸에서 봉 감독과 만난 자리였습니다. 이쯤 되면 당신이 국제영화제 가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아닌가 싶은데, 이것이 통상 영화제를 즐기는 당신의 방식인가요. (웃음)
=나의 첫 영화인 데릭 저 먼 감독의 <카라바지오>는 1986년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상영됐어요. 생애 첫 영화제인 그해 베를린에서의 경험은 내가 영화제를 영원히 사랑하게 해주었죠. 평소 꿈도 못 꾼 다양한 국적의 영화를 봤을 뿐 아니라 나의 ‘동료 여행자’인 전세계의 영화인들과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요컨대 시네마와 시네마 만들기의 범우주적 가능성이 내 앞에 만찬처럼 펼쳐진 거죠. 위대한 감독 크리스 마커가 “나는 여행하기 위해 영화를 만든다”라고 말했는데, 나 역시 동감해요. 모든 영화 티켓은 다른 사람의 자리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여행’을 약속합니다. 영화제들은 그 여행을 상업적 배급망에 제한된 통상적 환경 너머로 확장하는 힘을 지녔고요. 우리 필름메이커들은 거기에 덤으로 새로운 대화와 관계, 지원 시스템, 동지를 찾을 기회와 ‘즐거움’(fun)까지 영화제에서 얻죠.

-2001년작 <딥 엔드>부터 비교적 근작인 ‘모성 3부작’ <줄리아> <아이 엠 러브> <케빈에 대하여>까지 모성은 다채로운 당신의 작품 이력에서 가장 빈도가 높은 소재입니다. 그래서 봉준호 감독의 <마더>를 어떻게 보았는지 궁금해요.
=최근에 봉 감독이랑 <케빈에 대하여>와 <마더>를, 이를테면 상호보완하는 음양 관계의 동시상영 프로그램으로 짝지으면 어떨까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마더>는 봉 감독의 또 다른 걸작이고 김혜자의 연기를 통해 봉 감독은 그녀의 규정하기 힘든 불안정함이 아들의 모습을 반영하는 인물로, 모성의 드문 초상을 그렸어요. <케빈에 대하여>와 <마더>에서 엄마와 아들은 한 아이덴티티의 양면입니다. 둘은 단풍나무 씨앗에 붙은 날개처럼 서로의 주변을 회전하죠. <케빈에 대하여>와 <마더>의 두 엄마가 겪는 곤경에서 가장 아픈 부분은 그녀들이 아들의 운명을 마치 제 것처럼 받아들이고, 아들들이 남겨두고 돌아선 이야기의 틈을 채워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아들과 절연하는 일은 이들에게 선택지가 아니에요. 가슴이 찢어지는 순간은, 그들이 자기 내부에 아들의 어둠을 수용할 자리가 있음을 발견할 때 옵니다. 끔찍하고 또 끔찍한 사랑입니다…. <줄리아> <아이 엠 러브> <딥 엔드>의 인물들도 비슷해요. 그런 자각, 정체성이 흔들리는 낭떠러지 같은 순간이 열쇠죠. 그녀들은 그제껏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믿고 살았던 상(像)의 한계에 닿아요. 어쩌면 변화야말로 모성이 직면하는 심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식들이 변화하는 동안, 모성은 한결같은 손길이기를 요구받으니까요.

이 영화의 의상 디자이너 캐서린 조지는 스윈튼의 전작 <케빈에 대하여>의 의상도 담당했다.

-연기자로서 모든 캐릭터는 하나하나가 새롭고 독특한 발명이겠죠. 하지만 외모의 변형이라는 기준에서 <설국열차>의 메이슨 역과 비교할 만한 당신의 과거 연기를 꼽자면 <러브 이즈 더 데블>(Love is the Devil: Study for a Portrait of Francis Bacon)에서 보여준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 친구 역부터 생각났습니다. 외모를 확 바꾼 두 사례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뭘까요.
=나는 종종 내 직업을 ‘반은 예술가의 모델, 반은 광대’라고 정의하는 편이 배우라는 표현보다 훨씬 정확하다고 생각해요. 확실히 내 연기 중에는 ‘광대과’에 해당하는 선례들이 있죠. <러브 이즈 더 데블>의 뮤리엘 벨처도 그랬고, 존 메이버리 감독이 연출한 <맨 투 맨>(1992)의 엘라도 그래요. 엘라는 1988년에 내가 무대에 올린 1인극에 나온 캐릭터입니다.(나치 치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죽은 남편으로 가장한 여자의 이야기다.) 최근에도 이 계열에 두건을 보탰어요. 테리 길리엄 감독의 신작 <제로 테오렘>(The Zero Theorem)에서 연기한 온라인 정신과 의사 닥터 슈링크-롬과 웨스 앤더슨의 신작 <그랜드 호텔 부다페스트>의 캐릭터예요. 내 동료들과 장기 프로젝트(<줄리아> <아이 엠 러브> <케빈에 대하여>를 지칭한다)를 개발하면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난 지금, 이런 소풍 같은 작업은 기운을 채워줍니다. 마치 죽을 듯한 마라톤을 경험한 다음의 상쾌한 단거리 질주처럼. 질문으로 돌아가 광대과로 묶이는 역할들 사이에도 사실성의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설국열차>의 메이슨은 작위적 구성체이고 가짜이고, 제스처와 기괴한 기호(수제 훈장이나 맞지 않는 가발 등)의 콜라주입니다. <맨 투 맨>의 엘라도 가장(假裝 masquerading)한다는 점이 메이슨과 비슷하고 <제로 테오렘>의 슈링크-롬 박사는 정체를 캐낼 수 없는 암호 같은 존재입니다. 반면 <아이 엠 러브> <줄리아> <케빈에 대하여>는, 대체로 엠마, 줄리아, 에바에 관한 확고한 사실을 단초로 텍스트를 지어올린 영화들입니다. 그래서 관객은 이 여인들이 아무리 긴장 속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더라도 그들이 지금 진실을 말하는지 부풀리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어요. 무엇보다, 우리는 엠마와 줄리아와 에바가 홀로 있는 모습을 통해 그들을 알아갑니다(We get to know them alone). 하지만 메이슨이 혼자 있는 장면은 절대 볼 기회가 없어요. 그래서 방문 뒤의 사생활을 상상하는 거고요.

-한동안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대형 상업영화를 포함해 다양한 규모의 영화를 섭렵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이후 그런 행보가 끊긴 듯합니다. 게다가 봉준호 감독을 만났을 무렵에는 영화를 더 찍고 싶지 않은 상태였다고 말하기도 했죠. 영화이든 영화가 아니든 작품 선택의 측면에서 현재 당신은 어떤 단계에 있나요.
=루카 구아다니노(<아이 엠 러브>), 에릭 종카(<줄리아>), 린 램지(<케빈에 대하여>)와 협력해 영화 3편을 완성하는 데 내 인생의 12년이 들었습니다. 봉준호 감독을 만났을 즈음 나는 12년치 결실을 축하하는 중이었어요. 독창적이고 독립적이고 가난한 영화들을 제작하고 전세계에 배급하기 위해 관련된 모든 이의 심장 속 피를 끌어모아야만 했던, 특정한 패턴의 나날에서 벗어나 마침내 휴식을 취하길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 패턴은 1980년대에 데릭 저먼과 영화를 만들기 시작할 때부터 든 습관이긴 해요. 그래서 큰 조류의 변화에 대한 갈증이 있었어요. 봉 감독과의 만남은 새로운 유형의 영화 만들기 파트너십을 맛보게 해줬어요. 조화롭고 친숙하면서도 전에 몰랐던 영감을 받았습니다. 앞으로도 봉 감독과 다시 일할 기회에 후각을 곤두세울 것이고 전시 아티스트, 큐레이터, 글 쓰는 작가로서 작업도 계속해나갈 겁니다. 어느새 내 마음은 다시 충만해졌고, 새로운 경이를 맞이할 만반의 태세가 됐어요.

-<올란도>(틸다 스윈튼이 남성과 여성을 오가며 엘리자베스 1세 치세부터 현대까지 수백년을 사 는 인물로 분했다)는 제가 시대극 장르를 이해하는 방식을 크게 바꾼 영화였습니다. 비단 <올란도>뿐 아니라 당신의 존재감과 연기는 언제나 사회적 성(gender)의 개념을 되묻게 한다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그런 당신이 하필 남녀 쌍둥이 남매를 낳았다는 소식이 어찌나 신기했는지…. (폭소) 쌍둥이를 키우며 남녀가 형성되는 과정에 대한 의견이 달라지거나 배운 바가 있나요.
=(웃으며 호텔 천장을 가리킨다) 걔들, 지금 위층에서 자고 있어요. 아, 쌍둥이 남매라니 정말이지 누군가 나한테 던진 아주아주 재미있는 농담 같았어요. 이제껏 남녀 사이에는 차이가 없어, 없어, 없어라고 말하는 작품을 실컷 만들었는데 그만 쿵! 차이가 있네? (폭소) 하지만 알다시피 남녀에겐 자연에 기인한 절대적으로 고유한 차이가 있고 그렇지 않은 차이도 있어요. 내 가장 소중한 친구 한명이 트랜스젠더인데 애들이 세살 때 우리 집에 놀러 와서 쌍둥이를 목욕시켜준 적이 있어요. 그때 제 딸이 “엄마, J는 숙녀야? 남자야?”라고 묻더군요. 내가 답을 꺼내기도 전에 친구가 말했어요. “상관없단다.” 이후로 나도 다른 답을 주지 않았고 딸아이도 다른 답을 요구한 적이 없어요.

-아니 그렇게 단번에 납득해버린 건가요.
=무의미한 질문이라는 걸 그냥 깨달은 거죠. 고맙게도 그 깨달음은 딸애 스스로 도달한 거예요. 남녀 성차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글쎄요. 예를 들어 아들은 한살 때 버스 장난감을 갖고 노는데 딸은 그러지 않더라고요. 이런! 싶었죠.(좌중 폭소) 아뇨. 딸은 인형도 갖고 놀지 않았고 늘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였어요. 결론적으로 쌍둥이를 키우면서 나는 일반화에 더 신중해졌어요. 남자아이는 자동차를 좋아하고 여자아이는 자동차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일반화는,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분명히 있으니 해롭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일반화는 불가능하다는 일반화 역시 의심할 여지가 있어요. 육아 경험은 그저 내가 더 열린 마음을 갖도록 도와줬어요.

-최근 당신이 모스크바 크렘린 궁 근처 붉은 광장에서 (러시아의 동성애자 탄압 입법에 항의해) 무지개 깃발을 들고 찍은 사진을 인터넷에서 접하며, 영국의 섹션28 법안(동성애에 대해 공개적으로 긍정적 견해를 밝히는 행위를 금한 대처 정권의 법안으로 성소수자 인권운동에 불을 붙였다)과 당신의 동지 데릭 저먼 감독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년이 저먼의 20주기인데 따로 준비 중인 행사가 있나요.
=특정한 계획은 없지만 어느 때보다 데릭의 작품과 삶을 추억하고 기념하기 적절한 해가 되길 바라고, 그간 떠난 지 20년이 흐른 지금 현재 러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가 대중의 경각심을 일깨우길 바라요. 때로는 정말 악몽을 꾸고 있나 싶어요. 20년 전의 나는, 내가 모스크바에 가야만 할 거라는 것도, 무지개 깃발을 들고 경찰차 앞에 서는 일이 위험한 짓이 될 거라는 것도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그러나 위험한 행동이었고 오늘 이 순간도 위험합니다. 우리와 수만명의 저항은 영향력을 형성했고 이 법안은 끝내 무효화됐어요. 우리는 목소리를 내서 싸우는 일이 짐작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어요. 과거에 같은 탄압에 저항하고 나아가 승리한 선례가 있다는 사실을 지금 러시아의 젊은이들에게 알리는 일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예술은 어떤 의미에서 공공서비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생각에 대해 조금 더 상세히 듣고 싶습니다.
=예술과 예술가들의 세계에 처음 들어섰을 무렵 내가 동시에 발견한 건 공동체(collective)의 공기였어요. 데릭 저먼 감독이나 그의 국내외 동지들과 창작하는 과정에서 나는 우리가 일종의 사회운동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습니다. 특히 마거릿 대처 정권의 탄압과 보수적 선동, 그중에서도 광업노조 파업을 부른 경제정책과 악명 높은 섹션28 법안- 현재 러시아 정부가 취한 조치와 충격적일 만큼 비슷한 내용이었어요- 에 맞서야 했던 시기에 이 의식은 강렬했어요. 저먼 감독의 <에드워드 2세>에도 등장하는 활동가 그룹 아웃레이지(OUTRAGE)가 저항을 주도했죠. 그러한 연대의 체험과 목격은 내가 경험한 예술가의 창작 과정에서 불가결한 요소가 됐습니다. 내게 익숙한 방식이라는 것밖에 더 간단히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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